“성소수자 진료, 몰라서 차별하면 안되잖아요···국내 최초 ‘성소수자 의료가이드’

이영경 기자
국내 최초 성소수자의료 가이드 <차별 없는 병원> 펴낸 윤현배 서울대 의대 교수가 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육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국내 최초 성소수자의료 가이드 <차별 없는 병원> 펴낸 윤현배 서울대 의대 교수가 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육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지난해 국내 최초로 서울의대 성소수자 의료 강의 시작
올해 150명 의대생 전체 대상으로 ‘확대’
미국선 6년 전부터 성소수자 의료 교육 시작
의료진 14명 집필 참여로 ‘성소수자 의료가이드’


2021년 3월3일, 윤현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휴먼시스템의학과 교수는 들떠 있었다. 국내 최초로 서울대 의대에 개설된 성소수자 의료에 관한 첫 강의 전날이었다. 기대와 긴장이 교차했다. 그날 저녁, 변희수 하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국에서 6년 전부터 성소수자 의료과목이 개설됐어요. 너무 늦기 전에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변 하사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갈 길이 멀구나, 더 이상 희생이 없으려면 적극적으로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역할의 한계가 있어서 의대 교육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하겠지만,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 그래도 사회가 바뀌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보수적인 의대에서조차 성소수자 의료 교육을 시작했고, 앞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첫 수업은 성공적이었다. 의대 2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라는 선택과목을 12명이 수강했다. 임상실습은 시기상조라 여겼지만, 원하는 학생들이 있어 4명을 대상으로 임상실습을 했다. 올해는 수업이 전체 학생으로 확대됐다. 1시간의 개괄적인 수업을 의대생 2학년 150명 전원이 수강해야 한다. 선택과목과 임상실습은 예년처럼 진행된다. 성소수자 의료에 관한 교육은 ‘확대’되었다.

하지만 성소수자의 의료접근권과 건강권은 ‘갈 길이 멀다’. 한국의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 연구에서 LGB(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 우울 증상은 일반인보다 4.76배, 트랜스젠더의 우울 증상은 6~10배 높게 나타났다. 자살 생각은 LGB가 9.25배, 트랜스젠더가 10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성소수자들은 흡연·음주·약물 중독도 높게 나타난다. 의료기관에서의 차별 경험으로 병원 진료를 꺼려 병을 키우는 경우도 많다. 성소수자가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 것은 기술이나 치료법이 없어서가 아니다. 의료인의 ‘무지’ 때문이다. 2022년, 전국 40개 의대에서 공식적으로 성소수자 의료 수업을 개설한 것은 단 한 곳뿐이다.

<차별 없는 병원>(휴머니스트)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간됐다. 서울대 의대 강의 내용을 정리해 국내 최초의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를 만들자는 취지에서다. 윤 교수가 소속된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가 기획하고 성소수자 진료를 활발히 하고 있는 추혜인 살림의원 의사, 이은실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교수, 황나현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교수, 김결희 강동성심병원 LGBTQ+센터 성형외과 전문의 등 필자 14명이 함께했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의과대에서 윤 교수를 만났다.

“아내가 과거 살림의원 의사로 일했어요. 성소수자 환자가 많이 찾아오는데 모르는 게 많아 찾아보고 배우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제가 내과 전문의인데 성소수자가 의료적 도움을 요청해도 도와줄 길이 없겠더라고요.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졸업한 지 20년 가까이 되는데(윤 교수는 97학번이다) 지금도 성소수자 의료 교육이 없습니다. 지금 학생들이 10년, 20년 지나 의료현장으로 갔을 때도 달라질 게 없겠구나 생각에 강의를 기획했죠.”

윤 교수는 국내에서 성소수자 진료를 하고 있는 의료인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공부했다.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의료인 10명이 소속돼 있다.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는 지난 7월 서울광장 퀴어퍼레이드에서 의무실을 운영했다. 연구회 소속 이은실 순천향대 서울병원 교수, 이선영 서울대병원 교수, 황나현 고려대 안암병원 교수,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왼쪽부터).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제공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는 지난 7월 서울광장 퀴어퍼레이드에서 의무실을 운영했다. 연구회 소속 이은실 순천향대 서울병원 교수, 이선영 서울대병원 교수, 황나현 고려대 안암병원 교수,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왼쪽부터).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제공

성소수자 우울증·자살사고 일반인보다 5~10배
성소수자 건강은 ‘사각지대’···의료인의 ‘무지’가 원인
진료 병원 손꼽고 수도권 집중
성소수자만을 위한 의료는 드물다···
인식 전환과 교육 필요
‘차별 없는 진료실’이 성소수자 건강 첫걸음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차별금지법조차 제정되기 힘든 현실이지만 ‘국내 최초 성소수자 의료 수업’을 개설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의료인이라는 직업의 본질적 특성이자 사명이 환자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성소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죠. 진료실에 언제라도 성소수자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의료인으로서 성소수자에게 필요한 의료 조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기본적 공감대는 형성돼 있습니다.”

한국 성소수자에 대한 공식 집계는 없다.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을 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00만~300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를 제공하는 병원은 손에 꼽는다. 2012년 여성주의 의료 실천을 기치로 시작한 살림의원을 시작으로 서울시 마포구 무지개의원, 순천향대 서울병원 젠더클리닉, 고려대 안암병원 젠더클리닉, 강동성심병원 LGBTQ+센터 등이다. 윤 교수는 “의료기관 자체도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지만, 성소수자 진료 병원은 대부분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병원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나서거나, 트랜스젠더는 성확정 수술을 위해 외국을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성소수자들은 진료실에서 모욕과 차별 발언을 듣거나, 성 경험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기 힘들다. 파트너가 아픈 경우에도 보호자가 될 수 없다. 또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기 어려워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잘못된 정보가 오가기도 한다. 성확정 수술을 외국에서 한 경우 합병증이 생기더라도 제대로 된 후속 치료를 받기가 힘들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과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깃발이 나란히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과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깃발이 나란히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윤 교수는 ‘성소수자만을 위한 의료지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상당부분 의대 수련과정에서 배운 지식인데,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는 거죠. 가령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원하는 성별의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받는 호르몬 치료는 다른 환자에게도 일반적으로도 쓰이는 방법입니다. 조금만 더 배우면 원래 알고 있는 지식과 의료행위를 성소수자를 위해 어떻게 적용할지 알 수 있어요. 대부분의 수술도 원래 하던 수술입니다. 유방암에 걸린 경우 유방제거를 한다거나, 성형외과에서 유방확대술을 하기도 하죠. 인식의 전환, 아주 기본적인 교육으로 의료인들이 쉽게 성소수자 의료에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과대학협회는 2014년 성소수자 의료 교육 확대를 촉구하는 권고안을 냈다. 2016년 하버드 의과대학이 4학년 학생들을 위한 임상실습 과정을 최초로 개설하고, 다음해 워싱턴 의과대학이 4년짜리 성소수자 의료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성소수자는 차별과 폭력, 거절에 대한 예상, 내재화된 성소수자혐오로 ‘소수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는 정신건강을 위협할 뿐 아니라 음주·흡연을 더 많이 하게 만든다. 과체중 또는 비만일 가능성도 높고, 심장질환의 위험도 크다. 의료기관 방문을 꺼리면서 ‘건강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윤 교수는 “악순환의 고리를 깰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 의료인이다. 혐오와 차별에도 불구하고 정신·육체 건강을 지킬 수 있게 악순환 고리를 깨고 힘이 돼줄 수 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성소수자의 삶이 의료만으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변 하사는 트랜지션 등 의료적 수술을 통해 성확정을 했지만 군대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윤 교수는 “성소수자 삶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사회 인식, 법·제도 등 많은 것이 개선되어야 한다. 의료인들은 성소수자 권익 향상을 위해 적극 옹호·지지해야 한다. 혐오와 차별을 받지 않아야 건강한 정신, 생활이 가능하다. 진료실 안에서만이라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출발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환자 우리 손으로.” 성소수자의료연구회의 모토다. 한국에서 부족한 의료서비스를 찾아 외국을 찾거나, 지역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진료를 하는 병원을 찾기 힘들어 수도권까지 오는 경우가 없도록 하자는 취지다. 현재 순천향대, 가천대 의대, 인하대 의대에서도 한 시간짜리 성소수자에 관한 개괄적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차별 없는 병원>은 성소수자 개념과 올바른 용어 같은 기초적 지식부터 성소수자의 건강격차, 정신건강, 트랜스젠더를 위한 호르몬치료와 성확정 수술, 성소수자에 대한 건강검진, 아동·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한 상담 등 성소수자 건강과 의료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차별 없는 병원>은 전국 의대에서 성소수자 의료 교육이 확대되고, 성소수자의 건강권을 확대시킬 수 있는 하나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성소수자 당사자와 가족에게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일반 독자 또한 이 책을 통해 성소수자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앎’을 얻을 것이다.

차별 없는 병원

차별 없는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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