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오염된 피’에서 코로나19가 보였다···현실을 분석하려면 게임에 접속하라읽음

임지선 기자

게임의 사회학

이은조 지음|휴머니스트|224쪽|1만6500원

엔씨소프트사의 MMORPG 게임인 ‘길드워2’의 한 장면. <게임의 사회학> 저자는 오늘날 현실 세계와 거의 유사한 게임을 통해 심리와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매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엔씨소프트사의 MMORPG 게임인 ‘길드워2’의 한 장면. <게임의 사회학> 저자는 오늘날 현실 세계와 거의 유사한 게임을 통해 심리와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매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팬데믹 상황의 예고편 같은
2005년 WoW ‘오염된 피’ 사건처럼
가상 세계 속 캐릭터들의 행동은
사회를 이해하는 데이터가 된다
오락을 위한 단순 도피처가 아니라
인간사가 그대로 담긴 공간이다


게임은 대개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 세계의 유희 또는 놀이 정도로 치부된다. 게임(Game)은 ‘기쁨’ ‘재미’라는 뜻에서 유래했고, 중국어에서 게임을 뜻하는 단어도 요우시(游戏·유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은 전 세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의 사회학>은 이 관점이 비디오 게임을 통해 익숙해진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온라인 게임의 세계는 이미 현실 세계와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고, 게임 데이터를 통해 사회를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분석하기 힘든 사건이나 현상도 게임 세계에서는 할 수 있다.

게임 속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벌어지는 사건이 모두 게임 서버에 기록·저장되기 때문에 이 로그 데이터를 분석하면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게임 회사인 엔씨소프트에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저자는 게임 데이터를 바탕으로 팬데믹과 종말, 조직 경영 등 게임 사회학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소개하고 직접 게임 데이터를 분석했다. 게임은 정말 사회과학의 실험실이 될 수 있을까.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를 끈 MMORPG(대규모 다중접속 역할수행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크래프트(이하 WoW)’에서는 2005년 설정 오류로 인해 캐릭터 대부분이 감염돼 죽은 ‘오염된 피’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학카르라는 몬스터가 ‘오염된 피’라는 질병을 일으키는 기술을 사용했다. 이 기술에 걸린 캐릭터는 체력이 깎이고, 다른 캐릭터와 접촉하면 그 캐릭터도 감염됐다. 당초 이 질병은 해당 공간을 나가면 사라지도록 게임이 구현됐으나 해당 공간을 나가도 다시 소환하면 감염이 유지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일부 캐릭터는 마을에 들어오는 캐릭터들을 감염시키는 슈퍼전파자가 됐다. WoW의 가상 세계 속 캐릭터는 전멸에 가까운 죽임을 당했고 게임 회사인 블리자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감염된 캐릭터들은 격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게임 회사는 서버를 재시작해야 했다. 전염병을 연구하는 역학자들은 이를 가지고 대규모 감염 사태 속에서 사용자는 어떤 행동 유형을 보이는지 분석했다. 우선, 완벽한 격리는 불가능했다. 감염돼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도 있었지만 도시 곳곳을 누비며 다른 캐릭터들을 마구잡이로 감염시키는 캐릭터도 있었다. 감염 상황을 알리려고 마을 입구에서 계속 소식을 전하는 캐릭터, 심지어 완전한 치유가 어려운데도 자기가 가진 힐링 기술을 이용해 계속 다른 캐릭터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캐릭터도 있었다. 치료 효과가 있다며 거짓 아이템을 팔아서 이익을 챙기는 캐릭터도 있었다. 저자는 ‘오염된 피’ 사건과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비교해보면, 가상 세계의 캐릭터와 현실 세계의 인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게임 ‘피니지’의 한 장면 캡처.

게임 ‘피니지’의 한 장면 캡처.

인센티브 등 조직 경영의 관점에서도 게임을 분석할 수 있다. 저자는 엔씨소프트의 한 게임에서 가치가 높고 구하기 어려운 ‘영웅’ 변신 카드를 복권에 비유하며 이를 우연히 얻은 캐릭터들의 행동을 분석했다. 영웅 변신 카드를 우연히 얻은 캐릭터들이 ‘복권’을 얻은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 한 달 동안 게임 활동 정보를 회귀 분석을 했더니 결과는 흥미로웠다. 영웅 변신 카드를 얻은 집단, 즉 로또에 당첨된 집단은 대조군과 비교했을 때 평균적으로 게임에 더 자주 접속했고, 활동량도 늘었다. 좋은 아이템을 얻고서 게임에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경향은 보상이 주어지기 전 게임 참여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사용자에게서 더 크게 나타났다.

반대로 패널티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게임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게임 세계에서 캐릭터끼리 서로 죽이는 행위를 의미하는 PK는 일종의 패널티다. PK를 당한 캐릭터들은 경쟁심이나 호기심을 자극해 게임 활동에 긍정적 효과를 준다고 했다. 다만 악명 높은 캐릭터들에게 반복적 PK 피해를 본 캐릭터들은 이후 게임 활동 지표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즉, 적당한 패널티는 사용자가 게임에 더욱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자극제’이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부정적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이 책에선 게임이 현실과 유리된 도피처가 아니라 이미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돼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고 말한다. 현실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관계를 수행하는 확장된 세계라는 것이다.

게임 아이템을 전문으로 생산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이를 사업으로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가상 아이템과 현금 거래는 국가 간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기를 쳐서 값비싼 아이템을 가로채는 범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아직까지 이를 해결할 구체적인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다. 게임 세계의 아이템을 재산권으로 인정할 경우 발생할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가상 세계에 대한 수사권은 누구에게 있나. 현실 세계의 윤리와 법률 체계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인 상황에서 저자는 별도의 새로운 법률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게임 세계가 단순한 오락이나 반사회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데이터로 입증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특히 메타버스, 가상현실(VR) 등이 더욱 실생활을 파고드는 이 시점에서 게임과 가상 세계를 둘러싼 오래된 편견을 깰 기회를 제공한다. 다만 저자의 말대로 확대 해석은 경계하고,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책과 삶] ‘오염된 피’에서 코로나19가 보였다···현실을 분석하려면 게임에 접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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