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는 사람을 통해 견딜만한 것이 될 뿐이다”···새 시집 펴낸 진은영

김종목 기자

진은영의 새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 ‘시인의 말’엔 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1924~1998)의 ‘포위 공격을 받는 도시에서 온 소식’ 한 구절이 나온다.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진은영 시집에선 혼자, 한 사람 같은 고독, 개별, 소외, 배제를 뜻하는 단어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맨앞에 세운 시 ‘청혼’의 구절이다.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진은영 ‘청혼’

입안을 베어낼 정도의 고통을 감당하며 쓴잔을 마시려는 이유는 뭘까. 시집 1장 ‘사랑의 전문가’ 머리에 인용한 영국 비평가 존 버거(1926~2017) 말에 답이 든 듯하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해줄 말들을 찾고 있어요.” 진은영은 시인의 말에서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고 썼다.

작가 개인 사정 때문에 e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진은영은 ‘혼자’ ‘한 사람’의 뜻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진은영 시인. 진은영 제공

진은영 시인. 진은영 제공

“‘고통받는 사람을 환대해야 한다’는 철학을 말하면 ‘우리가 참 아름다운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그 고통받는 사람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리잖아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고통받는 사람은 잊히지 않아요. ‘내가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다 도와야 해’ 이렇게 생각하면, ‘아니 내가 예수님도 아니고 그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고통에는 진지해질 수 있잖아요. 전능한 존재라서 뭘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그거라도 하는 거죠. 구체적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고통 받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위해 보잘 것 없는 어떤 일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끼던 시간들을 거쳐 이 시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구체성을 지닌 ‘한 사람’이기에 개별적 모든 사람입니다. 그 운명적인 ‘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인생은 많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말했던 ‘딴사람’이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 ‘한 사람’ 중 하나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예은이다. 참사 이후 써온 세월호 시들을 여러 편 실었다.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 진은영 ‘그러니까 시는’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 진은영 ‘그날 이후’

진은영은 ‘천칭자리 위에서 스무 살이 된 예은에게’라는 편지도 썼다. 참사 때 사위 권재근과 손자 혁규를 잃은 판만차이와 남편과 아들을 잃은 판록한 이야기도 시어로 풀었다.

진은영은 인터뷰집을 묶고 시를 쓰는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를 더 구체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예은이를, 막연하게 느껴지는 세월호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이름도 알고 얼굴도 자주 보고 친구들과 노래하는 것도 들었던 이웃집 소녀처럼 느끼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시절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같은 반 친구(‘사실’), 중학생이 되자마자 희소병으로 세상을 떠난 외사촌 남동생(‘봄에 죽은 아이’)에 관한 시도 수록했다. “어린 시절 친구, 사촌 동생처럼 예은이가 잘 아는 아이로 느껴지니까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고통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 신형철 해설의 요지다. 진은영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힘인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 처한 한 사람, 가령 환자에게 어떤 의미로든 가망이 없다는 선고가 내려질 때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고 그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죠. 가망이 있어서 환자의 곁에서 병과 싸우고 죽음에 저항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오래 남아서 누군가와 함께 저항하는 사람이죠. 온갖 방법을 다 써보고 번번이 실패해도 끝까지 시도해요. 만일 사랑의 전문가라는 게 있다면 실패의 전문가일 거예요. 그렇지만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치유는 하나인 것 같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인간의 조건>에 쓴 “모든 슬픔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1885~1962)의 문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슬픔이 없어진다고 선언하지 않아요.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통해 그저 견딜 만한 일이 되는 거죠. 개인적인 수난을 겪는 사람이든 사회적 부정의로 수난을 겪는 사람이든 그 사람들 곁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함께하는, 사랑에 가까운 관심과 연대의 마음이 그 수난을 조금은 작게, 조금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뿐이에요.”

사회적 참사나 국가 폭력의 기억으로 생긴 상처는 금세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긴 치유의 시간을 거쳤으니 넌 다 나았다’고 말하면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그의 여전하고 실제적인 고통은 세상에서 숨겨야 할 것, 사라져야 할 것이 되고 맙니다.”

[인터뷰]“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는 사람을 통해 견딜만한 것이 될 뿐이다”···새 시집 펴낸 진은영

진은영은 2015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과 함께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창비)를 냈다. 진은영은 이 책에서도 “이웃에 대한 환대와 사랑은 아둔할 정도로 희생적이고 선량한 마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의 신비가 강조될수록 우리는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에 함께 머무는 시간은 살던 그대로 살아가는 습관의 맹목성을 우리에게서 거둬가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고요한 공간을 열어주리라 믿는다”는 말은 이번 시집에서 도달하려는 목표와도 이어지는 듯하다.

시집은 교보문고 시 부문 베스트셀러 1위 등에 올랐다. 소감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랑의 시도 있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시, 상실과 슬픔의 시가 많은데, 독자들이 공감하며 읽어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우리가 같은 부분에서 슬퍼하고 환멸을 느끼고 사랑의 용기를 가지려고 애쓰는구나,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독자들에게 깊은 연대감과 우정을 느낍니다.”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출간 20년 되는 해 낸 시집이다. ‘그러니까 시는’에서 시에 관해 이렇게 썼다.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라고 썼다.

시 쓰는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참 고전적인 비유지만) 시는 자화상입니다. 시를 쓰면서 ‘내 영혼의 생김새는 이런 거고 내 삶의 풍경은 이런 거네, 아 내 뒤통수, 내 뒷모습은 이렇게 생겼구나’ 깨달아가요. 처음 시를 쓸 때는 자화상이 그냥 혼자 그리는 그림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제법 시간이 많이 흐르고 보니 다른 사람들이 제게 건네주는 여러 질감의 종이와 다양한 물감(사랑, 고통, 환멸, 분노, 기쁨 아주 다양한 색이죠)으로 저 자신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아요.”

저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 유리빌딩 그림자와/ 노란 타워크레인에서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에”. <우리는 매일매일>(창비, 2008)에서 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로 숨진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시(‘Quo Vadis’)로 옮겼다. 진은영은 쌍용차, 콜트콜텍 등 여러 노동 투쟁 현장에서 시로 연대했다.

참사 희생자부터 이주노동자까지 진은영은 소수자에 관한 시와 글을 꾸준히 써왔다. 2007년 나온 <소수성의 정치학>(그린비)에 그는 ‘소수자, 우리는 어디에서 그들과 마주치는가’를 썼다. “모든 이들은 어떤 면에서든 항상 표준에서 벗어나는 실존의 독특성을 지닌다. 소수자는 우리가 특별히 만나야 할 어떤 인물, 어떤 계층이 아니다. 그는 기준에 벗어나는 모든 순간을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이다. 다수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자는 아무도 아닌 자이다.”

진은영은 연대 활동을 두고 “제한적이고 소박한 것이었다. 늘 송경동 시인이나 다른 동료 예술가들이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고, ‘작은 일이라도 좀 도와줘’라고 요청하면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는 않았던 정도”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시를 읽고 연대와 지지의 목소리를 표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다만 “이 일을 종종 꺼리게 하는 건 우리 안에 숨어있는 정치적 냉소주의”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 한다고 거대한 시스템이 무너지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보면 마음만 괴롭지’ 이런 생각이요. 거시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하는 실천들을 보면 사실 한숨이 나오죠.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합법칙성에 따라 역사가 진보한다는 관념은 아득한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망상이 아닌가 절망감이 들 때가 많잖아요.”

그는 다시 ‘한 사람’을 거론했다. “늘 현실은 관념을 박살 내니까 관념이나 이념의 차원에서만 사태를 바라보면 우리는 무력해지고 환멸에 빠집니다. 그럴 때는 진보나 역사의 합법칙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대신 눈앞에 고통받는 한 사람에 집중하고, 그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궁리해보는 거예요. (세계는 하나의 대재앙과 파국으로만 보이고, 세계가 그런 지경이라는 경고가 경고로만 끝나면 무력감을 강력하게 주지만) 구체적인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걸 위해 작은 활동이라도 조직하다 보면 뭔가 이 견고한 파국에 미세한 틈이라도 낼 수 있고 그 틈들이 점점 커질 수도 있지요. 우리 자신이 작은 연대의 흐름이라도 만들고 서로 보호할 수 있는 작은 구멍들을 무수히 뚫어 이 단단하고 완고한 절망을 스펀지같이 만들어야 하지 않나...”.

‘진보- 노동-문학’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관한 답이다. 이번 시집에 ‘아뉴스데이, 새뮤얼 바버-한 노동운동가에게’를 게재했는데, 노회찬을 추모하는 시라고도 했다.

진은영은 철학자이자 교육자, 번역가다. 최근 실비아 플라스의 <에어리얼 복원본>(엘리)를 번역 출간했다. “시를 번역하는 일이 시를 쓰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내 안의 시인을 누르고 번역자의 본분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시구들을 내 호흡과 감각에 맞춰 배열하거나 우리 말로 번역했을 때 시적 긴장을 해칠 수 있는 단어들을 지우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고. 시인이 전달하려는 뉘앙스에 충실하려고 애썼다”(‘옮긴 이의 말’ 중).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에 문학상담 전공 교수로 일한다. 문학상담은 “독자, 감상자로만 남아있는 사람들을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다. “자신이 쓴 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이들과 자신의 삶을 공유하는 경험을 해요. 많은 이들이 글 쓰는 데 자격(등단)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런 편견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글로 자기 삶과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발견하는 일을 즐겁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내더라고요. 소크라테스는 ‘음미 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했죠. 그런 의미에서 문학상담은 철학적인 활동이기도 하고요.”

이 학교에서 많은 이들이 실존철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의 저력은 그들의 저술이 가진 풍부한 문학성에 있는 것 같아요. 읽고 있으면 실존주의 텍스트에서 튼튼한 손이 하나 솟아나서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을 끄집어내 주는 듯한 열정과 의지 같은 것을 많은 분이 느끼시는 것 같아요.”

진은영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자기 삶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는 “실존철학과 더불어 사회철학적 논의들을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육하는 데 관심이 커졌다. 문학이나 철학을 매개로 하는 시민 교육을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실행해보는 일을 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진은영은 지식공동체 ‘수유너머’ 회원이었다. “건강이 좋아지면 가까운 친구들과 시민 교육에 관련된 공부 모임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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