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담배 피우던 호랑이, 내겐 정체성을 물려줬지

김유진

(16) 이야기의 힘

[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옛날 옛적 담배 피우던 호랑이, 내겐 정체성을 물려줬지

올해 100주년 맞은 뉴베리상, 차이를 억압하는 폭력과 여기에 대항하는 다양성에 주목
‘페트라’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옛이야기와 ‘릴리’가 듣는 ‘호랑이가 걷던 시절’ 이야기
‘미국 백인 중산층 남성’만이 아닌 세계 모든 어린이가 자신만의 이야기 만들 수 있기를

뉴베리상(Newbery Medal)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아동문학상으로 1922년 첫 시상 이후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상의 이름은 문학에서 아동문학 분야를 독립시켰다고 평가받는 18세기 영국의 출판인 존 뉴베리(John Newbery)에게서 따왔으며, 상의 운영은 미국도서관협회에서 맡고 있다.

뉴베리상은 미국 시민이나 미국 거주자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해 이수지 작가가 수상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Hans Christian Andersen Awards)’이나 백희나 작가가 수상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문학상(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 ALMA)’처럼 전 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상이 아닌 미국 국내의 상이다. 그러니 권위나 명성으로 따지면 두 상의 무게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한국 독자에게는 뉴베리상 수상작이 좀 더 친숙하다. 안데르센상과 린드그렌상은 노벨 문학상처럼 전작을 통틀어 ‘작가’에게 수여되는 데 비해 뉴베리상은 ‘작품’에 수여되기 때문이다.

매년 발표되는 수상작 한 편에 이목이 집중되고 그 한 편의 파급력이 큰 셈이다. 지난 100년간 쌓아온 뉴베리상 수상작은 이제 아동문학의 고전이 됐다. <시간의 주름>(1963년 수상작, 이하 수상연도), <줄리와 늑대>(1973),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1977), <헨쇼 선생님께>(1984), <그리운 메이 아줌마>(1993), <기억전달자>(1994), <두 개의 달 위를 걷다>(1995), <구덩이>(1999), <생쥐 기사 데스페로>(2004) 등 아동문학 독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사랑하는 작품이 대표적인 수상작이다. 한국 독자에게 뉴베리상 수상작이 널리 알려진 이유 하나는 영어교육에 있기도 하다. 수상작은 모범적인 영문으로 쓰인 동화나 청소년소설인 만큼 영어책 독서 목록에 단연 1순위로 들어간다.

이처럼 외국의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 수상작이 한국에서도 널리 읽히고, 매년 빠르게 번역·출간되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런 한편 안데르센상과 린드그렌상 수상 작가의 비영어권 아동문학 작품도 좀 더 많이 만날 수 있길 바라게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이 번역되어 한국 독자가 동시대의 세계 문학을 향유하듯 한국 어린이 독자가 세계의 아동문학 작품을 읽으며 세계 시민의 감수성으로 성장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b>마지막 이야기 전달자</b> 도나 바르바이게라 지음 | 김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도나 바르바이게라 지음 | 김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올해로 100주년인 만큼 이목이 더욱 집중된 가운데 2022년 뉴베리상 수상작은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도나 바르바 이게라 저·김선희 역·위즈덤하우스·2022)로 선정됐다. 영어 원제는 ‘THE LAST CUENTISTA’로 스페인어 ‘cuento’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SF인 이 작품은 SF 서사만으로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멕시코 문화 배경을 지닌 미국인 소녀 페트라를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장대한 질문을 펼쳐놓는 점이 뉴베리상 100주년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듯 각별하게 느껴진다.

2061년 핼리 혜성 충돌로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 페트라의 가족은 인류의 새 정착지 세이건 행성으로 탈출하는 우주선 탑승을 허락받는다. 세이건에 도착하기까지 모든 선발자는 ‘포드’에서 수면 상태에 들어가고 특히 어린이는 ‘엔 코그니토’ 장치로 뇌에 직접 지식을 주입받아 인류 문명을 이어갈 준비를 한다. 지구에서 탈출한 지 거의 400년 후인 2442년에 드디어 세이건 행성에 도착하자 페트라는 수면 장치에서 깨어나지만 이 계획을 준비한 ‘콜렉티브’에게 가족이 ‘제거’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콜렉티브’는 과거 지구에서 인류의 불안과 불행이 불일치와 불평등에서 발생했으며 오직 하나의 집단이 되려는 노력만이 생존을 보장한다고 여겼다. 이 신념으로 수면 장치에서 선발자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 전체에 봉사하도록 프로그래밍했으며 이 과정에 실패한 이들을 제거했다. ‘콜렉티브’가 건설하려는 새로운 세계상은 지금까지 어린이SF가 디스토피아를 전체주의 사회로 그리던 것과 비슷하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행성에 도착한 것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이전 세계에 일어난 일은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를 뒤로하고 떠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콜렉티브 덕분에 갈등, 기아, 전쟁으로 가득 찼던 세계에 대한 기억은 단 하나도 우리의 미래에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님도 더 나은 미래를 원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곳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방법에 대해 정반대로 말했다.

“우리가 잘못한 부분은 기억하고, 우리 자녀와 손주들을 위해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될 거야. 서로의 차이를 감싸고,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150쪽)

이 책은 평화를 위해 ‘차이를 앞서 제거하느냐, 아니면 차이 속에서 공존을 모색하느냐’의 상반된 견해를 보여주며 차이가 존중되는 세계를 인류의 바람직한 미래로 그린다. 대개 어린이SF는 전체주의 사회상을 디스토피아로 상상하고 비판하는 데 그쳤지만 여기서 나아가 다양성을 전체주의의 대안으로 삼으며 미래를 구성하는 구체적 원리로 탐색한다.

페트라는 ‘콜렉티브’의 계획대로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유일한 인간으로 지구에서의 기억에 의지하며 ‘콜렉티브’의 음모를 막으려고 분투한다. ‘콜렉티브’에 대항하게 이끄는 페트라의 기억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성장한 멕시코 문화와 할머니가 들려준 옛이야기다. 미국 사회를 이루는 다양성의 하나인 라틴 문화가 전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이을 계기로 작용하는 이 설정에서 뉴베리상이 제시하는 오늘날 아동문학의 비전을 확인한다. 지금 현실 세계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차이를 억압하는 폭력과 이에 대항하는 다양성의 외침도 돌아보게 된다.

다양성뿐 아니라 기억에 있어서도 ‘콜렉티브’와 페트라의 세계관은 대립한다. 과거의 기억을 지워야 새로 출발할 수 있다는 입장과 기억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기억을 담고 나르는 그릇은 이야기다.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인 페트라에게 이야기란 곧 기억이다. 페트라는 할머니가 들려준 옛이야기를 기억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용기를 얻는다. 기억이 제거된 아이들과 달리 페트라에게는 두려움의 감정이 남아있지만 할머니의 목소리와 옛이야기 주인공의 모험을 기억하며 세이건 행성에서 시작될 새 인류의 이야기를 써 나간다. “위험을 감수하고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믿으면 네가 건너야 할 바다를 찾게 될 거야” “위험하지 않아. 저게 인생…… 여행이야. 따라가 봐야 알 수 있는 거란다”. 이야기가 페트라에게 힘이 되듯 페트라의 이야기와 세상 모든 이야기가 어린이 독자에게 용기가 되어 유일한 첫 발자국을 내디디길 바란다.

<b>호랑이를 덫에 가두면</b> 태 켈러 지음 | 강나은 옮김 | 돌베게 | 2022년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태 켈러 지음 | 강나은 옮김 | 돌베게 | 2022년

전년도 뉴베리상 수상작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태 켈러 저·강나은 역·돌베개·2021) 역시 다양성을 배경으로 이야기의 힘을 말하는 동화다. 이 책의 다양성은 한국 문화다. 작가의 이름 ‘태’(Tae)는 할머니 이름인 ‘태임’에서 따왔고, 작가는 할머니에게 호랑이가 등장하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에서 페트라의 할머니가 ‘에라세 케 세 에라(Erase que se era, 옛날 옛적에)’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듯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에서 릴리의 할머니도 ‘옛날 옛날 호랑이가 사람처럼 걷던 시절에……’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다. 호랑이는 할머니와 엄마, 릴리에게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동일하게 내재된 문화적 정체성이다.

할머니는 릴리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그와 별개일 수 없는 자신의 생애 이야기는 일부러 잊었다. 슬픈 이야기는 없어지는 게 좋다며 숨기는 태도는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에서 ‘콜렉티브’가 새로운 시작을 위해 기억을 삭제한 것과 같다. 릴리는 할머니가 두려워한 이야기의 비밀을 알아가면서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의 억압을 벗고 자신의 정체성을 수용한다. 그 정체성에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문화적 정체성과 호랑이 상징으로 해방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동시에 자리한다. 단군 신화에서 곰이라는 상징으로 여성에게 부여된 인내의 덕목을 호랑이의 기상으로 전환시킨다. 릴리는 말한다. “내 자신이 맹렬하고 강한 것 같다. 천하무적 같다. 내 이빨이 칼날이 되고 내 손톱이 호랑이 발톱으로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를 위해 일어설 수 있고 누구도 감히 날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244쪽)

호놀룰루에서 출생하고 시애틀에 거주하는 미국인 작가가 재미교포인 할머니를 통해 경험하고 자료로 습득해 재현한 한국 문화의 정체성은 한국인인 우리가 보기에 아쉬운 점이 물론 있다. 릴리의 할머니는 수시로 고사를 지내며 영혼들의 음식을 마련하고 쑥, 쌀, 잣을 지니거나 뿌리며 액막이를 한다. K팝과 K드라마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인 시대에 고릿적 무속 문화를 한국 문화의 정체성으로 대표하고 게다가 이를 오컬트와 다를 바 없이 그린 점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한밤중에 김치 몇 점이 당긴다는 둥 하는 묘사를 보면 “아시아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몽땅 토해 놓은 가게네”(<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186쪽)하는 비판이 작품에도 해당되는 걸 완전히 피해가긴 힘들 것 같다. 더구나 할머니의 무속 행위는 치매의 병증으로 설명되기도 하면서 문화적 의미를 잃은 채 갈팡질팡한다.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으로 평가하는 게 우선 타당하지만 다양성의 가치를 숙고하는 의미로 디아스포라에서 파생된 한국 문화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여지 또한 끝까지 고민해본다.

올해와 전년도 뉴베리상 수상작인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와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은 다양성의 가치를 바탕으로 이야기의 힘을 말한다. 페트라와 릴리는 자기 문화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습득하고 반복하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 이 책들에서 강조되는 다양성은 어린이가 어떠한 인종, 종교, 성별 정체성을 지니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응원하는 바탕이 된다.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의 남성 어린이만이 아닌, 세계 모든 어린이가 이 책들을 가슴에 안고 꿈꿀 수 있다.

<b>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 양장</b> 라자니 라로카 지음 | 김난령 옮김 | 밝은미래 | 2022년

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 양장 라자니 라로카 지음 | 김난령 옮김 | 밝은미래 | 2022년

<b>어둠을 걷는 아이들 양장</b> 크리스티나 순토르밧 지음 | 천미나 옮김 | 책읽는곰 | 2022년

어둠을 걷는 아이들 양장 크리스티나 순토르밧 지음 | 천미나 옮김 | 책읽는곰 | 2022년

뉴베리상 수상작은 아니지만 아너 리스트에 오른 <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라자니 라로카 저·김난령 역·밝은미래·2022)와 <어둠을 걷는 아이들>(크리스티나 순토르밧 저·천미나 역·책읽는곰·2022) 역시 인도와 태국의 문화 배경을 지닌 미국인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한 이야기를 전한다. 오늘날 세계의 윤리적 화두가 다양성이듯 뉴베리상이 추구하는 아동청소년문학의 비전 역시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평에 있다.

이야기의 힘을 강조하는 건 문학이 힘을 잃어가는 듯 보이는 시대의 마지막 자존감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자화자찬이 아니다. 이야기가 이끌어온 세계에 대한 자기 고백이자 내게 그랬듯 어린이 독자에게도 이야기가 작은 빛으로 반짝이길 바라는,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이다. 동화는 오늘도 그 희망을 안고 세상 곳곳에서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어린이를 부른다.

■김유진

[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옛날 옛적 담배 피우던 호랑이, 내겐 정체성을 물려줬지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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