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강은주 지음 | 이봄 | 392쪽 | 2만5000원
지금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가를 떠올려보라.
여성 미술가를 떠올린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클로드 모네,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피트 몬드리안….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 미술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들 모두 남성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명화를 소개하는 교양서부터 미술사 전문서적까지 모두 남성 미술가로 가득하다. 미술사의 고전으로 불리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와 H W 잰슨의 <미술의 역사> 초판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 속에 단 한 명의 여성 미술가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장 좋아하는 미술가로 여성을 지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 미술가를 잘 떠올리지도 못한다.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술사가 여성들을 위대한 미술가로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강은주 이화여대 교수는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의 말을 빌려 “미술사가 여성들의 존재를 간과했고, 이로 인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술사 속에서 여성 미술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인근 학교에서 청강을 올 정도로 인기 있는 강 교수의 ‘여성과 예술’ 강의 내용을 엮은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이 출간됐다. 책은 여성 화가와 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잘 알려진 남성 화가의 작품 속에서 당시 여성의 현실을 포착한다. 강의를 책으로 옮긴 만큼 쉬운 구어체로 쓰였다.
젠더는 우리 삶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미술가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켈란젤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3년 동안 고집스럽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완성했다. 피카소는 12세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도, 천재성의 발견도 남성이었기에 가능했다.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미켈란젤로 같은 천장화를 작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피카소처럼 어릴 때부터 붓을 쥘 수도 없었고, 그린다고 해서 재능을 알아봐 주는 이도 없었다.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은 ‘위대한 예술가의 기준’은 예술가 개인의 능력보다 미술 제도가 누구에게 기회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누가 좋은 미술학교를 졸업했고, 누가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했는가로 미술가의 위대성이 정해졌고, 백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과 유색인종은 위대하다고 평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작품이 남성 미술가의 것인지, 여성 미술가의 것인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 일도 있다. 책의 표지에는 콩스탕스 마리 샤르팡티에의 ‘샤를로트 듀발 도네스 부인의 초상’이 삽입돼 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 작품을 남성 화가인 자크루이 다비드의 작품으로 착각하고 엄청난 고가에 구입했다. 당시 역사학자 앙드레 모루아는 “이 그림은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작품”이라며 미술관의 선택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30여년 후에 이 작품이 다비드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발표됐다. 찰스 스털링은 작품이 “피부와 옷의 표현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해부학적 정확성이 떨어진다”며 “미묘한 술책을 사용해 여성적인 정신성을 드러냈다”고 했다. 초상이 샤르팡티에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에도 미술관은 정보를 수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25년 뒤에야 ‘무명의 프랑스 화가’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정정했다. 여성 화가의 작품임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무명 화가의 것으로 남기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책에는 이런 황당한 사례가 다수 수록돼 있다.
척박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그림을 그린 여성 화가들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같은 사건을 남성 화가들과 전혀 다르게 그렸다. 구약성서에는 유대인 여성 유딧이 이교도 장군의 막사를 찾아가 잠자는 그의 목을 자르고 유대 민족을 구해냈다는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얀 마시스 등 남성 화가들은 유딧을 관능적인 여성으로 표현하거나 겁에 질려 망설이는 모습으로 그렸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젖가슴을 드러낸 채 도취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유딧을 표현했다. 반면 젠틸레스키의 그림 속 유딧에게서는 결연함과 영웅적인 의지가 느껴진다.
강 교수는 유명 작품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도 살펴본다. 남성들의 그림 속에서 여성은 존재가 미미하거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표현됐다. 전쟁 등 역사적 사건을 그린 그림에서 여성은 부수적인 위치에 작게 그려졌다. ‘씨 뿌리는 사람’에서 남성의 표정을 실감나게 그린 장프랑수아 밀레는 ‘이삭 줍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성은 누드화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남성의 시선 속에서. 누드화는 대부분 귀족 남성 후원자들의 의뢰를 받고 만들어졌다. 누드화를 보면 당시 남성들이 어떤 외형의 여성을 선호했는지를 읽을 수 있다.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 속 여성은 가슴이 작고 아랫배와 엉덩이는 포동포동하다. 그림 속 여성들은 뒤로 돌아 엉덩이를 노출하는 등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 채 무방비 상태로 그림 밖 감상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밖에도 이브로 대표되는 ‘창녀’, 성모 마리아로 대표되는 ‘성녀’의 이미지도 남성 화가들의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예술은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전복한다지만 미술의 역사는 딱 세상만큼 기울어져 있다. 강 교수는 “성, 인종, 계급의 구분을 넘어 모두가 평등하게 예술의 생산과 향유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페미니즘 미술사의 목적이라고 썼다. 책은 그림 속 여성에게 이입하지도, 그림 밖에서 여성을 관음적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여성들에게 주체로서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익숙한 미술 작품들도 새롭게 읽힌다. 제목처럼 ‘첫 미술사 수업’ 같다. 기존의 미술사가 ‘거장’ ‘걸작’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서 지금, 이곳에서, 내게도 같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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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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