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정보라가 정도경이던 시절···역사와 가공 섞어 그린 미친 사랑 이야기

김종목 기자

전공인 러시아 문학도 녹여내

환상의 매개 ‘벽’·복수 등이 테마

정보라 작가 | 김창길 기자

정보라 작가 | 김창길 기자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429쪽 | 1만7000원

정보라가 ‘정도경’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던 시기 쓴 단편 11편을 모았다. 정보라는 <저주 토끼>(아작, 2017) 이전까지 번역은 본명, 소설은 필명을 썼다. 2018년 온라인소설 플랫폼 ‘브릿G’ 공개작 ‘물’과 미발표작 ‘비오는 날’을 빼곤 2010~2013년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실은 소설들이다.

이 중 ‘Nessun sapra’(2011)와 ‘완전한 행복’(2011)은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정보라의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완전한 행복’은 1590년대 즈음부터 1613년 이전까지 시기를 배경으로 ‘참칭자 드미트리’ 사건을 변형해 만든 이야기다. ‘학자 정보라’ 이력이 더 강하게 반영된 듯한 ‘Nessun sapra’는 ‘아프토르 니카그다네브일롭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으로 시작한다. 원저자 이름은 “러시아어로 ‘저자는 원래 없었다’는 말을 대충 사람 이름처럼 ‘스키’를 붙여서 만든 것”이다. 주인공 다닐 바실리예비치 이바쵸프는 소비에트 정권의 미움을 사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다닐 이바노비치 유바쵸프(1905~1942)와 스탈린 대숙청 때 감옥에서 죽은 폴란드인 브루노 야센스키(1901~1938)의 삶을 “적당히 조합해서 만들어낸 인물”이다. 정보라는 야센스키로 박사논문을, 유바쵸프로 학술논문을 썼다.

소설은 러시아의 조국 수호 전쟁 종료 6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전쟁 생존자를 찾아 나선 국영 방송 직원들의 대화로 시작한다. 편집 기사가 피디에게 1941~1943년 독일군의 ‘레닌그란드 포위전’ 직후 환자 시체를 먹었다고 주장한 정신병원 간호사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한다. 피디는 공식 기록이라 하더라도 생존자와 희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다른 의견을 구하려다 생존자 할머니가 먹은 사람이 이바쵸프라는 말에 취재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소비에트 문학계를 혼자서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인물이었다. 스탈린 사후 복권돼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1937년 대숙청 때 체포된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날은 역사 속에 묻힌 미스터리였다. 지금 카자흐스탄에 생존했다는 설까지 별의별 소문이 돌았다.

그 간호사는 류보프 아르카디예브나. 취재진을 만난 그는 1940년 이바쵸프가 자신이 일하던 정신병원에 온 일부터 꺼낸다. 이듬해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의사와 간호사들, 환자까지 전선으로 가자 병원 운영은 엉망이 됐다. 그 와중에 남은 간호사와 환자가 두 사람이었다. 아르카디예브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상대방에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인 이바쵸프를 사랑하게 된다.

아르카디예브나는 이바쵸프가 ‘티파미아에게 보낸 편지’, 즉 자기가 암송한 유서 내용을 들려준다. 이바쵸프의 시신과 일주일간 함께 지내며 자신의 체온과 눈물로 녹인 이야기에 왜 인육을 먹었는지도 이어 말한다. “그는 어느 구덩이 속의 이름 없는 시신으로 끝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두렵다고 했어요.” 당시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도 털어놓는다.

직원들은 방송국에 돌아온 뒤 이바쵸프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네순 사프라(아무도 모를 것이다)’와 ‘티파미아(ti fa mia, 너를 내 것으로 만든다)란 말의 출처와 이바쵸프에 얽힌 사연을 확인한다. 영상을 확인하면서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장면도 보게 된다. 이들은 아르카디예브나와 다시 인터뷰를 진행하려 병원에 연락한다.

역사와 가공 이야기를 결합한 기이하고 미친 듯한 사랑에 관한 소설의 축은 ‘환상’이다. 단편집에서 ‘벽’은 환상의 매개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 ‘Nessun sapra’엔 이바쵸프가 15년 전 죽은 아들이 면회를 왔는데 식사를 가져온 아르카디예브나 때문에 병원 벽으로 들어가버렸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정보라 작가. (C) 혜영. 퍼플레인(갈매나무) 제공.

정보라 작가. (C) 혜영. 퍼플레인(갈매나무) 제공.

“사랑과 공감을 갈구”하는 세상을 휘감고 다니는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인 ‘머리카락’(2011)에서 벽은 주인공의 고독하고 무익한 생활을 상징하는 물리적 공간이다. 벽은 머리카락의 주요 이동 경로이면서, 사람들을 단절하는 장벽의 매개이기도 하다. ‘가면’(2012)에서 벽은 남자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스며든 공간이다. 이 여자는 자신이 죽은 연립주택에서 검은 얼룩으로 머물다 이사 와 사는 ‘남편’에게 다가간다. 이 남편은 검은 얼룩의 여자에게 중독된다.

‘벽’은 정보라 소설의 근원 같기도 하다. ‘Nessun sapra’ 중 이바쵸프는 아르카디예브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벽 속에서 이야기가 걸어 나오지요. 당신이 오지 않을 때 나는 혼자 이 방에서 벽을 쳐다보며 지내니까요.”

출판사는 “정보라의 환상 세계, 그 뿌리를 들여다보는 초기 걸작선”이라고 소개한다. SF도 넣었다.

단편집에서 ‘복수’를 빼놓을 수 없다. 정보라는 <저주 토끼> 작가의 말에서 “출판사에서는 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이 단편집을 내기로 했다는 다분히 진취적인 의견을 준 적이 있다”고 전한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중 ‘나무’(2013)가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나귀를 타고 지나가던 여행객에게 개암을 던졌다고 땅에 파묻힌 뒤 ‘검은 나무’가 된, 다리는 불편하나 팔 힘은 센 장애인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철없는 소년들의 장난과 무자비한 여행자 대응이 불러일으킨 “미약한 사건”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정보라는 2022년 5월 ‘채널예스’와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소설을 “뭔가 불살라버리고 싶은 분들이 읽고 싶은 소설”로 분류했다. <저주 토끼> 작가의 말에서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말도 기억해야 한다. ‘나무’에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버린 삶의 흐름과 죽음의 불꽃 앞에 너무나 무력한 자신에게 분노”하며 우는 장애인 소년의 친구 ‘그’에게 ‘변치 않는, 여전히 외로운’ 삶을 앞서 투영한 듯도 하다.

정보라는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권으로 낸 이 책을 두고 “나의 이야기에는 교훈이 없다” “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면서 “독자님들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재미와 환상을 강조했지만, 단편집엔 장애인 차별이나 데이트폭력, 주택 문제 같은 지독한 한국 현실 문제도 녹아 있다. 그는 차별금지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위한 오체투지, ‘낙태죄’ 폐지 1주년 시위 등에 참여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시위에도 나갔다. 소설 경계 앞에서도 현실 문제에도 거침없는 이 작가는 러시아 암흑기를 배경으로 쓴 ‘완전한 행복’을 설명하면서 “러시아는 2022년 현재도 암흑 시기를 겪고 있으며 남의 나라까지 암흑 시기로 만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전쟁이 빨리 끝나고 나쁜 놈들이 얼른 몽땅 죽어서 전부 늑대에게 뜯어 먹히기를 소망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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