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임신을 했다···젠더 경계를 허무는 ‘논바이너리’의 삶

이영경 기자

남·여 이분법 젠더 체계에 갇히지 않는

젠더퀴어 두 명의 자전적 이야기

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 맞춰 출간

에이섹슈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코베이브

논바이너리 트랜스매스큘린으로 임신·출산한 벨크

두 사람이 걸어온 치열한 ‘진정한 나’ 찾기

<논바이너리 마더>의 저자 크리스 맬컵 벨크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오렌지디 제공

<논바이너리 마더>의 저자 크리스 맬컵 벨크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오렌지디 제공

<젠더퀴어>와 <논바이너리 마더>. 모두 낯선 제목의 책이다. 영어로 조합된 용어를 한국어로 정확히 대체할 단어를 찾기란 어렵다. 이질적인 용어만큼, 그 존재 또한 이질적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이들에게 적당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고, 제도적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젠더퀴어>는 논바이너리에 에이섹슈얼로 자신을 정체화한 퀴어 작가 마이아 코베이브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노블이다. 논바이너리는 남성 또는 여성으로 이원화된 젠더체계를 따르지 않는 성별정체성을 뜻하는 말이다. 논바이너리와 같이 이원적 젠더 체계로 구획되지 않는 이들을 포괄해 젠더퀴어라고 부른다. 에이섹슈얼은 무성애자로, 누구에게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거나 관심이 적은 성적 지향을 일컫는다.

<논바이너리 마더>의 저자 크리스 맬컴 벨크는 좀 더 복잡한 정체성의 길항을 보여준다. 논바이너리 트랜스매스큘린(지정성별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남성성이 더 크다고 인식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체화한다. 아이를 갖기 위해 성확정(트랜지션)을 미루고, 임신과 출산·수유가 끝난 뒤 호르몬요법을 시작한다. 그의 정체성과 신체가 맺는 관계는 이 책에서 계속해서 변화하며 요동친다.

두 ‘젠더퀴어’의 이야기는 한국사회의 제한된 상상력을 훌쩍 벗어난다. 법적인 성확정을 받은 군인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쫓겨나 생을 포기하는 사회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한도 초과’다. 하지만 완강하고 견고한 벽을 허물기 위해 ‘다른 이야기’는 꼭 필요하다.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날로 1990년 5월17일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정신장애 항목에서 삭제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21년 변희수 하사의 죽음 이후 한국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날에 맞춰 출간된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마더>는 삶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시켜 나가기를 기꺼이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젠더퀴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정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앞선 성소수자 인권운동, 주변의 성소수자 동료로부터 앞으로 딛고 나갈 디딤돌을 마련하고 친밀한 이들의 지지로 쓰러지지 않을 버팀목을 마련했다. 두 책이 누군가에겐 디딤돌과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픽노블 <젠더퀴어>의 한 장면. 학이시습 제공

그래픽노블 <젠더퀴어>의 한 장면. 학이시습 제공

젠더퀴어

마이아 코베이브 지음·이현 옮김|학이시습|276쪽|1만3000원

<젠더퀴어>는 실제로 그랬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화제가 되었는데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그랬다. 예약 구매가 쇄도하고 독자들로부터 책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2020년엔 미국도서관협회에서 수상하는 상을 두 개나 받았다. 미국 각지의 공공도서관과 학교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2021년 보수 정치인이 퀴어 서적을 도서관과 학교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젠더퀴어>도 위기를 맞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주에서 금서가 되었고, 보수 학부모 단체에 의해 학교 도서관에서 퇴출되었다. 이에 반발한 학생·학부모·교사 독자들이 반대 서명 운동과 도서 배포 운동을 벌이면서 지금은 10만부 이상 팔린 책이 됐다. 그야말로 ‘화제작’이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 대부분은 한때 내가 무덤까지 안고 갈 비밀이라고 여겼던 것들이다. 그러나 내 안에서 꺼내고 나자, 이 또한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측면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코베이브가 자신을 젠더퀴어이자 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히피 부모의 보호 아래 성장했지만, 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언어는 많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엔 자신이 반쪽짜리 영혼 두 개(하나는 여성, 하나는 남성)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론을 세우기도 하고,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그것도 아닌 무성애자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원할 때마다 성별을 바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란마 1/2>에 나오는 주인공처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학 시절,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대해 저울에 놓고 여성성과 남성성의 양쪽 추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코베이브에게 자신의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은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끼친다.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시도해보지만 성별정체성에 대한 고민 때문에 “혼란스럽고 우울한 기분”을 느낀다. 그때 자신을 그와 그녀가 아닌 ‘그들(they)’로 불러달라는 미대 교수를 만나게 되고, 코베이브는 자신을 부르는 대명사를 바꾸는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두고 저울질하던 자신의 머릿속 성별개념에서 벗어나 ‘풍경’으로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산에서, 어떤 이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행복하게 살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성장하고 꽃피울 수 있는 기후를 찾아나서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는 거친 숲이 있다. 바로 내가 살고 싶은 곳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되는 길을 찾아간다. “무엇이 되기 싫은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로” 스스로를 정의해나가고자 한다.

그래픽노블 <젠더퀴어>의 한 장면. 학이시습 제공

그래픽노블 <젠더퀴어>의 한 장면. 학이시습 제공

하지만 그 역시 혐오와 편견을 마주해야 했다. 어머니는 열린 태도의 따뜻한 사람이었고, 그가 ‘양성애자’라는 이야기엔 “그럴 줄 알았다”라고 쿨하게 대답하지만,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자 “네 몸을 싫어하지 않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이모는 “여성 혐오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이모의 반응을 통해 윗세대 페미니스트·퀴어와 현 세대의 차이와 변화를 볼 수 있다.

책의 끝은 이야기의 시작이다. 십대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논바이너리 어른을 본 적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말을 하지 않으면 이 아이들 모두에게 잘못하는 게 아닐까?”라며 커밍아웃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젠더퀴어>는 그 결심의 결과물이다.

[책과 삶] ‘아빠’가 임신을 했다···젠더 경계를 허무는 ‘논바이너리’의 삶

논바이너리 마더

크리스 맬컴 벨크 지음·송섬별 옮김|오렌지디|300쪽|1만7500원

<논바이너리 마더>는 임신과 출산을 하는 논바이너리라는 더 복잡하고 민감한 주제에 대해 말한다. 저자 크리스 맬컴 벨크는 배우자 애나와 함께 네 아이를 키우며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다. 퀴어 커플인 두 사람은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를 낳았다. 벨크는 지정성별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대부분의 세월을 남성 정체성을 갖고 살았다. 대학에서 만난 애나와 결혼을 하고, 애나가 출산을 하자 벨크의 심정은 복잡해진다. 애나가 낳은 첫째 아이 숀은 자신과 어떤 유전적 연결도 없는 아이였다. 그는 숀을 “애나의 연장선상”처럼 사랑한다. 애나가 겪는 출산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과, “나 역시 아기와 연결되고 싶다”는 생각에 임신과 출산을 결심한다.

임신과 출산은 그의 정체성과 신체 사이에 격렬한 갈등과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짧은 머리의 그를 보고 청소년들은 “남자가 임신했어!”라고 외친다. 그는 “이 임신의 모든 것이 수치심으로 뒤범벅되어 있다”고 느낀다. 과거 그는 음식을 거부하면서까지 생리를 멈추고 싶어했고 자궁은 “황폐한 겨울 숲” 같은 공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초음파를 통해 들여다본 자신의 자궁과 태아를 보고 그는 자신의 신체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논바이너리 마더>의 저자 크리스 맬컴 벨크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오렌지디 제공

<논바이너리 마더>의 저자 크리스 맬컴 벨크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오렌지디 제공

임신을 했다고 ‘여성 같은 기분’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가 느끼는 몸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단지 생명을 창조하고 빚어낼 수 있는 신체 부위가 달린 그대로”인 “생명을 내보내고 돌볼 수 있는 몸”이었다. 벨크가 낳은 아기 샘슨은 신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샘슨은 내 몸을, 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 놓았고 그 애는 여전히 나를 밀어붙이고 있다.”

출산 후 샘슨을 보면서 그는 묘한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가 어린 시절 그토록 되고 싶었던 자신을 쏙 빼닮은 ‘남자 아이’가 거기 있었다. 그는 테스토스테론 요법을 시작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점점 ‘아빠’가 되어간다. “샘슨이 없었더라면 나는 예스라고 외칠 만큼 나 자신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와 샘슨은 유일무이하며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샘슨은 다른 아이들은 아빠가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걸 안 믿는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애나와 크리스를 “우리 엄마, 우리 크리스”로 소개한다.

<논바이너리 마더>의 저자 크리스 맬컴 벨크 ⓒMark Likosky

<논바이너리 마더>의 저자 크리스 맬컴 벨크 ⓒMark Likosky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한 편견과 혐오, 차별도 언급된다. 벨크는 출산 후 자신이 낳은 아기를 입양해야 하는 행정적 절차를 거치며 모욕감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책은 독특한 회고록의 형식을 취한다. 초음파 사진과 출생신고서와 입양신청서, 벨크의 개명에 관한 행정서류가 중간중간 등장하며 저자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콜라주 같은 서사를 펼쳐보인다. 아마 그에게 삶이란 사회가 조각내고 재단한 자신의 정체성을 이어붙여 새로운 삶을 발명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는 샘슨을 보며 생각한다. “그 애의 자유는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그 무엇이고 때문에 나는 그게 겁이 난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내가 그 애한테 이 거침없는 삶을 준 거다.” 이 책은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강하게 남는 것은 단 하나의 이야기다.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자식과의 사랑. 모든 부모는 자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형성한다.

두 책과 함께 10대들을 위한 성소수자 가이드북인 <LGBTQ로 살아가기>(징검돌)와 한국의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당신의 성별은 무엇입니까?>(오월의봄)도 함께 출간됐다.

[책과 삶] ‘아빠’가 임신을 했다···젠더 경계를 허무는 ‘논바이너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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