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건진 문단
‘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미술 담당을 할 때인 2021년 9월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란 전시 기사를 썼습니다. 발달 장애와 정신 장애 작가 16인의 작품을 모았습니다. “독자적인 미술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발달장애 및 정신장애 창작자들과 다양한 예술표현을 시도하며 창작과 소통의 방향을 찾는 아티스트 그룹”인 밝은방이 기획한 전시입니다.

장애인과 관람의 문제라면? 휠체어도 편히 오가게 시설을 만들거나 청각 장애인 영화 관람을 위해 자막을 다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정책을 떠올릴 겁니다. 극장 ‘무장애 영화’는 시각장애인의 감상을 위해 ‘화면 해설’도 넣습니다. 장애인이 찾기 힘든 상영 시간에다 상영 횟수가 부족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저는 전맹(全盲)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시각장애인의 미술관 관람? 이번 주 ‘책건문’인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김영현 옮김, 다다서재)는 바로 ‘시각장애인 미술 관람자’ 이야기입니다.

“저는 전맹(全盲)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말로 설명해주었으면 합니다. 잠깐이라도 상관없으니 부탁드립니다.”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는 여러 미술관에 전화를 겁니다. 시라토리는 “미술관에는 미확인 민폐 물체라고 할 만한 존재”였죠.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거듭된 거절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장애인’으로 살아온 나한테는 이미 익숙한 대응”이었죠. “그래도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며 끈질기게 부탁합니다. 미술관 사람 중 “좋아, 같이 봅시다”라고 생각한 이들이 나왔죠.

다빈치 해부도.

다빈치 해부도.

시라토리가 미술관에 처음 간 건 일본복지대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호감 가는 여성이자 동기이고, ‘눈이 보이는 사람’인 S가 데이트 중에 미술관에 가고 싶다고 했죠.. 그날이 인생 분기점이었습니다. 나고야 아이치현 미술관에 함께 갔죠. ‘엘리자베스 2세 컬렉션: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체해부도 특별전’이 개최 중이었습니다. “전맹인 나도 그림을 즐길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리고 맹인이 미술관에 다니는 건 어쩐지 맹인답지 않은 행동이라 재미있기도 했고.”

이후 미술 정보 잡지를 친구에게 읽어달라고 합니다. 궁금한 전시회가 있으면 직접 미술관에 전화를 걸었죠. 이후 매년 수십 번가량 미술관에 갑니다. 동행자들도 여럿입니다. 그 중 한 명이 논픽션 작가이자 이 책 저자인 가와우치 아리오의 친구 사토 마이코(마이티)다. 어느 날 사토가 가와우치에게 말합니다. “시라토리 씨랑 함께 작품을 보면 정말 즐거워! 다음에 같이 가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 작품을 ‘본다’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 작품을 ‘본다’고?” 가와우치는 시라토리가 체험형 작품을 만지는 건지, 작품에서 발산되는 기를 느끼는 건지, 혹시 초능력을 가진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 세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본 전시가 도쿄 마루노우치 미쓰비시 1호관 미술관에서 열린 ‘필립스 컬렉션 특별전’입니다. 미국인 부호 던컨 필립스(1886~1966)가 소장한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소장품엔 인상파와 입체파 작품이 많았습니다.

피에르 보나르(1867~1947)의 ‘강아지와 여자’(1922)

피에르 보나르(1867~1947)의 ‘강아지와 여자’(1922)

세 사람은 피에르 보나르(1867~1947)의 ‘강아지와 여자’(1922) 앞에 바싹 붙어 섭니다. 시라토리가 다른 관람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와우치에게 속삭이며 말합니다. “그럼, 무엇이 보이는지 가르쳐주세요.” 가와우치는 “그렇구나, 시라토리씨는 ‘귀’로 보는 거야”라고 문득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합니다.

“한 여성이 강아지를 안고 앉아 있는데, 강아지의 뒤통수를 유독 자세히 보네요. 개한테 이가 있는지 보는 건가.”
마이티와 시라토리 씨는 “뭐? 이?”라면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사실 동물에 붙는 것은 벼룩인데 그때는 내가 착각했다).
어? 뭐지?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닌데. 그림 속 여성의 모습은 내 어머니가 고양이를 안고 벼룩을 확인할 때와 똑같았다.
마이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는 이 여성이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은데. 눈이 초점을 잃은 느낌이랄까. 저기 보면 테이블 위에 음식이 있잖아? 먹는 중에 뭔가 생각하기 시작해서 음식에 손을 못 대는 게 아닐까?”
그렇군. 듣고 보니 여성은 슬퍼하며 고개를 숙인 것 같기도 했다.

‘눈이 보이는’ 두 사람은 눈과 말을 사용해 그림의 윤곽을 계속 묘사합니다. “스웨터 색깔이 정말 예쁜데. 빨갛다기보다는 주홍색에 가까워.” “벽의 색은 옅은 파란색인데, 붉은 스웨터랑 서로 보색 관계라 예쁘게 대비되었어.”

색을 본 적이 없는 이가 색을 이해하는 방식

가와우치는 색과 빛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시라토리에게 전해질지 걱정하죠. 색을 본 기억이 없는 시라토리는 색을 개념적으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색’은 시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얀색이니 갈색이니 파란색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시점에 개념적이기도 해요. 각각의 색에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걸(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그 특징적인 이미지로) 이해하고 있어요.”

이 말을 듣고 가와우치는 자기가 실제로 목격할 수 없는 전자파나 미생물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가와우치는 이후 시라토리와 미술관 순례를 합니다. 불현듯 깨달은 건 20년 동안 수많은 예술 작품을 친구 사토와 관람하면서 “재미있었지.” “그러게.” 하는 대화밖에 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다른 점이라고는 시라토리 씨의 존재밖에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는 덕에 우리 눈의 해상도가 올라갔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심지어 매우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면 “여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 당시의 상황이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게 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로 그림을 보여주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아닌 시라토리 씨인지도 몰랐다

‘보이는 사람’이 전부 제대로 보는 건 아니죠. ‘눈이 보이는 사람’은 방대한 시각 정보에서 필요한 부분에 주목해 필요한 정보만 취사선택합니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봐도 똑같이 보지 않습니다. 검은 셔츠와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경기하는 농구장에서 움직이는 고릴라 인형을 사람들이 보지 못한,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을 예로 듭니다. 가와우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평소에 사용하는 뇌의 취사선택 기능이 꺼지고, 우리의 시선은 말 그대로 작품 위를 자유롭게 헤매며 세세한 부분에도 눈길을 준다. 그 덕분에 ‘지금껏 보이지 않던 게 갑자기 보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탄식에 흐르는 생각, 감정, 음색을 즐기다

“시라토리 씨는 관람을 즐기고 있을까?” 작품을 두고 가와우치와 사토 의견이 엇갈리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면 시라토리는 “두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재미있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시라토리는 “작품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나 공식적인 해설보다는 ‘눈앞에 있는 것’이라는 한정된 정보에 기초해 이뤄지는 즉흥적인 대화”를 흥미롭게 여겼다. “한 작품을 둘러싸고 다양하게 존재하는 관점과 해석, 그 사이의 여백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 뒤에도 우리는 종종 작품 앞에서 “이건 뭘까?”라며 할 말을 잃고 망설였다. 그럴 때 시라토리 씨는 느긋하게 우리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백’조차 그는 사랑한다. 무의식중에 새어 나오는 “아아….” 하는 탄식에 흐르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그 즉흥적인 음색을 그는 즐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자아내는, 태어나자마자 사라지는 음색을.

시라토리는 1969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눈앞 10㎝ 앞 손을 흔들면 보이는 정도의 약시였습니다. 가족 중엔 시각장애인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거듭해서 타이릅니다. “겐짱(시라토리 어릴 적 애칭)은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한다.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꼭 감사하다고 인사하렴.” 어린 시라토리는 “그럼 눈이 보이는 사람은 노력 안 해도 돼? 치사해!”라고 생각했죠.

“왜 눈이 보이는 사람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야 할까”

중학생 때부터 전혀 보이지 않았죠. 맹학교로 가도 비슷한 말을 듣습니다. ‘장애인다운 모습’이 뭔지 의문이 커지죠.

“맹학교에서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어. 아마 선생님들도 ‘장애인은 약자에 비장애인은 강자’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걸 메꿔서 가능한 비장애인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것 같아.”

“왜 우리 맹인은 ‘보이는 사람’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야 할까?”라는 의문도 커집니다.

주위 어른들이 “큰일이구나.” “딱해.”라는 말에 “왜? 왜?”라며 의문을 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향한 선입견과 편견은 어른이 되어서도 겪습니다. ‘길이라도 잘 찾아다닐까?’ ‘눈이 보이지 않는다니 큰일이구나’ 하고 여기죠.

“응, 애초에 나한테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평범한 거고, ‘보이는’ 상태는 모르니까. 보이지 않아서 뭐가 큰일인지 실은 잘 몰라.” 시라토리는 의료 기술 발전으로 눈을 보이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냐는 질문에도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그러기 싫어. 어렸을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채로 살아왔는데, 인제 와서 보이면 오히려 더 큰 일이잖아!”

“인제 와서 보이면 오히려 더 큰 일이잖아!”

“청각 등 다른 감각이 엄청 날카로울 게 틀림” 없을 것이라는 편견도 있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게 있지 않느냐고 자주 듣는데, 그야 보이지 않아서 느끼는 게 있긴 해요.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까 느끼는 건, 보이니까 느끼는 것과 나란히 있는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고 싶다니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맹인을 미화하는 게 아닐까 싶어.

시라토리는 그저 관람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일본장애인예술문화협회가 기획하고,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기 위한 워크숍: 두 사람이 볼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 진행을 맡습니다. 이 워크숍은 “시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의 미술 감상이란 만져서 감상하는 것”이라는 기존 관념을 크게 바꿉니다. 많은 사람이 “만질 수 없는 평면 작품을 말로 감상하는 방식에 커다란 가능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미토 예술관은 시라토리의 요청을 수월하게 받아들인 곳입니다. 1997년 이곳 미술관의 교육담당자 모리야마 준코가 안내했습니다. 이 워크숍에서 우연히 시라토리를 만난 모리야마는 1999년 ‘대화형 감상 투어’ 자원봉사자 연수에 시라토리를 초청합니다. 그 뒤로 시라토리는 1년에 한두 차례 연수를 맡았습니다. 모리야마는 투어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줄이려는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과 함께 작품을 보면 미술관, 학예사, 그리고 눈이 보이는 감상자도 무언가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작품을 보는 방식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일치하지는 않아요. 그런 인식의 엇갈림을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 대화하면서 보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가와우치는 “그것은 도움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라는 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발상이었다”고 말합니다. 미토 예술관은 2006년에도 시라토리 진행 아래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관람 투어를 열었습니다. 2010년 투어의 명칭을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감상 투어, 세션!’으로 바꾸고, 현재까지 1년에 한두 차례씩 진행합니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하는 것, 모르는 것을 아우르는 ‘대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작품을 보는 행위의 목적은 작품의 이미지를 서로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실마리로 삼으면서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하는 것, 모르는 것, 그 전부를 한데 아우르는 ‘대화’라는 여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감상과 해석이 같지 않다고 해서 상대방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고, 그 덕에 내 내면의 바다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도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이야기하게 될지 모른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애인은 불행하다’는 생각과 내면의 차별 의식

책은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의 대화와 소통의 기록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차별도 비판하죠. 나치 독일의 ‘유전병 자손 예방법’을 참고해 만든 ‘국민우생법’을 계승한 일본의 ‘우생보호법’은 1996년까지 시행됐습니다. “20여 년 전까지 국가가 ‘태어나도 괜찮은 생명’과 ‘태어나면 안 되는 생명’, ‘아이를 낳아도 되는 사람’과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사람’을 나누었다는 사실”에 가와우치는 소름이 돋습니다.

가와우치는 자신도 뒤돌아봅니다.

나는 지금껏 우생 사상과 차별을 혐오해왔지만, 그것들의 싹은 내게도 분명히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차별을 비난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이 당사자가 되는 것은 몹시 두려워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아닌가. 딸을 임신했던 그때, 나는 무엇을 겁내고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까. 태어날 아이의 미래였을까, 아니면 장애가 있는 아이의 부모가 되는 것이었을까. 차별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내게도 밑바탕에는 ‘장애인은 불행하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닐까.

시라토리는 이 우생 문제를 어떻게 여길까요.

가령 평소에 장애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이가 태어날 때 조금쯤 장애가 있어도 어떻게든 된다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과연 자신의 아이가 무뇌증도이어 괜찮다고 할까? 거기까지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우생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야.

응, (내게도 우생 사상이) 있는 것 같아. 아니, 있었어. 나도 맹학교에 다닐 때는 맹인답지 않은 것을 동경했거든. 예를 들어 전맹인 사람이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거침없이 다니거나 생선 가시를 깨끗하게 발라 먹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부러워했어. 그리고 그런 걸 못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그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맹인답지 않은 행동의 뿌리에 있었던 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비슷해지는 건 좋은 일이라는 일종의 차별 의식과 우생 사상이었을지도 몰라.


안대를 쓰고 시각장애 체험을?

눈이 보이는 사람이 안대를 쓰고 시각장애 체험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국에서도 장애인의 날이면 이런 체험 행사가 종종 열리곤 합니다. 장애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취지의 체험이지요. 책에선 시라토리의 20년 된 친구이자, 에이블 아트 저팬(구 일본장애인예술문화협회) 이사인 호시노 마사하루의 반론이 나옵니다.

안대를 쓰면 일단 시각장애인처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연수가 끝나고 안대를 벗으면 다들 말해. 와 보인다, 보여. 보이는 건 역시 대단해! 그러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무슨 게임이라도 하면서 논 거냐고.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안대를 쓰는 건 정말이지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따지고 보면, 나는 겐(시라토리 애칭)의 머릿속에 억지로 들어가지 않아. 감각에도 개입하지 않아. 그저 가까이 다가갈 뿐이에요. 그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시각장애인의 마음이 되어본다는 시점에서 이미 틀려먹은 거야. 그 틀려먹은 생각이 세계를 뒤덮고 있어요.

가와타쿠는 “타인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힘이야 말로 지금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엠퍼시(empathy, 공감력)라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직면한 어려움을 상상”하는 게 뭐가 틀려먹었을까요? 호시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어. 심신이 피폐해져서 방 안에 틀어박힌 우울증 환자로도, ADHD인 사람으로도 될 수 없어. 시각장애인도 될 수 없고, 그 외에 누구도 우리는 될 수없어.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되어볼 수 없다고요! 될 수 없는데, 되자고 생각하는 천박한 생각만이 얄팍하게 폼을 잡는 그런 사회인 거예요. 지금의 사회는. 그래서 불쾌해!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나서서 되는대로 “와아아아!” 하고 싶은 거예요. 이 세계에서 웃고 싶어요.

체험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그저 함께 있으면서 웃는 일

호시노가 강조하는 건은 “(안대 체험을 하면서 장애인 머릿속을 생각하는) 상상력”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그저 함께 있으면서 웃는” 일입니다.

책의 한 축은 ‘장애인과 미술관’의 관계입니다. 대가의 작품과 장애인의 작품을 동등하게 전시하는 ‘시작의 미술관’이란 이름의 미술관 이야기도 넣었습니다. 장애인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이 미술관 관장 오카베 다카요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 미술관을 열었을 때는 장애가 있는 분의 작품을 보여주면 장애인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지 않겠냐고, 예술을 ‘이미지 개선을 위한 수단’처럼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관하고 5년이 지나서 돌이켜보면 우리를 끌어당긴 예술의 중심에는 전혀 다른 것이 있었어요.”
전혀 다른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바로 모든 사람이 타고나는 ‘표현의 힘’이죠.”
표현의 힘?
“장애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표현의 힘’이 있어요. 이곳에서는 장애 유무를 따지지 않고 함께 작품을 전시하고 관람하죠. 그런 경험이 오히려 ‘장애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계기를 주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조선인 노동자 죽음 가린 사회, 개발과 경제 성장 고발하는 가자마 사치코의 작품들

‘시각장애인 미술 관람자’인 시라토리 겐지(가운데)와 저자 가와우치 아리오(오른쪽), 미술관 에듀케이터 다키가와 오리에가 가자마 사치코의 ‘디스림픽 2680’(2018)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다다서재 제공 사진 크게보기

‘시각장애인 미술 관람자’인 시라토리 겐지(가운데)와 저자 가와우치 아리오(오른쪽), 미술관 에듀케이터 다키가와 오리에가 가자마 사치코의 ‘디스림픽 2680’(2018)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다다서재 제공

책은 장마다 작가와 작품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가와우치는 자기 내면의 차별 의식을 ‘가자마 사치코 특별전: 콘크리트 모음곡’의 도록을 보다 깨닫습니다. ‘디스림픽 2680’(2018)은 “경쟁 원리에 따라 사람에게 순위를 매기고,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르는 가혹한 올림픽”에 관한 작품입니다. “쓸모없는 패배자들은 담장에 둘러싸여 생매장당한다. 반대로 ‘쓸모 있다’고 뽑힌 사람들은 이목구비를 잃고 매스게임에 참가”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콘크리트 모음곡’은 개발과 경제 성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입니다.

가자마의 ‘게이트 피어 No.3’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36~1940년 건설된 구로베강 댐 공사 노동자에 관한 작품입니다. 온천 용출 지대다. 뜨거운 증기와 유황으로 가득한 터널 공사 때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공사 때 300명이 죽었는데 그중 3분의 1 이상이 조선인입니다. 이 죽음은 묻혔죠.가자마는 하나는 여러 노동자 중 상투를 한 조선인 노동자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선인 노동자의 모습을 지운 한 쌍의 목판화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의 죽음을 망각한 일본 사회를 고발하고, 그 죽음을 기리는 취지의 작품입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여기 사진을 올리진 못했습니다. 링크로 들어가면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가 정연두도 한 장으로 다룹니다. 정연두는 미토 예술관 개인전 ‘정연두: 지상의 길처럼’ 준비를 하던 2014년 어느 날 전맹이면서 사진을 찍는 시라토리 이야기를 듣고 예술관 내 마사지숍을 찾아갑니다. 미토 예술관은 재개발 때문에 마사지숍이 철거된 시라토리에게 예술관 내 마사지숍 자리를 임시로 내줬지요. 시라토리는 이곳에서 이벤트 성격의 폐업 할인 영업도 했습니다.

정연두의 ‘와일드 구스 체이스(Wild Goose Chase)’는 시각장애인 미술 관람자 시라토리 겐지가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영상 작품이다. 정연두 제공

정연두의 ‘와일드 구스 체이스(Wild Goose Chase)’는 시각장애인 미술 관람자 시라토리 겐지가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영상 작품이다. 정연두 제공

시라토리가 찍어둔 사진을 본 정연두는 무척 좋아했고, 며칠 뒤 다시 방문해 디지털 일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선물합니다. 시라토리가 이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로 만든 작품이 ‘와일드 구스 체이스’입니다. 시라토리는 처음에 “뭔가 맹인답지 않은 걸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왜 사진을, 무엇을 위해 찍는 걸까요?

전에는 소리 나는 쪽으로 카메라를 대고 찍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아. 기분이 내키면 셔터를 누르지. 얼마 전에 한 사진가랑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은 다른 사진가가 촬영한 작품을 보면 무얼 향해서 작품을 만들었는지 그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럼 내 사진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고민해봤는데, ‘아, 나는 어디도 향하지 않는 사진을 찍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내 사진은 오로지 나를 향할 뿐이라고. 그럼 작품으로서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사진가가 될까, 하고 생각했어!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Lifetime’ 전시 이야기도 나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가와우치와 시라토리는 ‘죽음’을 화두로 대화를 나눕니다. 이 장 마지막엔 볼탕스키의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합니다.

“인간은 많은 것들과 싸울 수 있지만, 시간을 상대로는 싸울 수 없다.”

책은 일본 서점원들이 선정하는 2022 서점대상 논픽션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았습니다. 여러 수상과 호평이 과장과 과언, 주례사가 아니라는 건 책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 건진 문단]‘전맹의 미술관람자’ 시라토리···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