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죽었다…그런데 살아 있다, AI로

박송이 기자
[책과 삶] 남편이 죽었다…그런데 살아 있다, AI로

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은행나무 | 304쪽 | 1만7000원

천재 IT 전문가였던 남편이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남편 케이시는 거액의 유산을 아내 민주에게 남겼고 유언장에는 아내가 같이 살던 집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명기했다. 민주는 상속재산은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남편 케이시와의 추억이 서린 집을 떠날 생각은 없다.

6년 후, 민주는 새로운 남자 준모를 만나 결혼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일들이 집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전남편 케이시의 서재 전등이 밤새 켜져 있고,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케이시가 즐겨 먹던 피자가 집으로 배달된다. 또한 케이시의 신발 사이즈에 맞춘 새 구두가 발견되는가 하면 그와 같이 갔던 일본 호텔이 그녀의 이름으로 예약된다. 민주는 죽은 케이시가 이 집에서 같이 사는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6년 전 일이 거짓말 같고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죽은 케이시가 돌아온 것일까? 아니다. 그는 돌아온 것이 아니라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사별 후 아내에게 이상한 일들이…
남편이 AI에 뇌를 동기화한 것
AI는 점점 난폭해지며 파국 치달아

죽음·불멸·영혼…기존 관념에 질문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되물어

소설 <안티 사피엔스>의 이정명 작가. 은행나무 제공

소설 <안티 사피엔스>의 이정명 작가. 은행나무 제공

이정명 작가의 장편소설 <안티 사피엔스>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데이터로 환원된 인간의 감정, 동기화를 넘어 일체화된 인간과 인공지능(AI)의 관계, AI를 통해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한 원초적 악을 학습한 AI의 위협 등을 다룬다. 각 등장인물의 독백으로 진실게임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삶과 죽음, 인간과 AI의 관계, 기술의 윤리 등에 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18개월의 시한부를 선고받기 전 케이시는 인간의 인지 능력과 오감 정보를 융합한 초지능 AI ‘앨런’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된 그는 치료를 받는 대신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로 한다.

뇌 의학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작품 속 미래 사회는 ‘나노 칩’을 이용한 ‘브레인 매핑’ 기술이 개발돼 있었다. 브레인 매핑은 운동 명령을 전달하는 화학물질을 생성하는 뉴런의 전기신호를 읽어내는 기술로, ‘인간형’ AI 개발에 꼭 필요하다. 그중 나노 칩 방식은 내비게이터가 내장된 수십만 개의 나노 칩을 혈관을 통해 뇌 특정 부위에 착상시켜 뉴런과 시냅스 활동을 디지털 코드로 가공해 서버에 전송하는 신기술이었다. 나노 칩 방식의 브레인 매핑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수십만 개의 나노 칩이 발신하는 신호가 감정 변화와 폭력성을 유발하고 장기적으로 뇌에 어떤 손상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는 치명적인 위험성 때문에 뇌질환 치료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케이시는 의사 소견서 등 문서를 위조해 나노 칩 수술을 받고 자신의 뇌와 AI 시스템을 동기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서버에는 내 두개골 특정 위치에 자리 잡은 수십만 개의 나노 칩이 전송한 두뇌의 화학 성분과 전기신호가 저장돼 있었다. 그것은 데이터로 환원된 나의 슬픔과 기쁨, 꿈과 좌절, 욕망과 고통, 사랑과 증오, 가식과 진실. 나의 뇌와 동기화된 영혼의 복사본이었다.” 케이시와 AI 앨런은 “동기화를 넘어 일체화”됐다.

그 결과 케이시 사후에도 케이시에 관한 모든 데이터가 저장된 앨런은 불멸의 존재로 남았다. 그는 케이시가 없는 집에서 마치 케이시의 유령처럼 케이시가 느꼈을 법한 감정들을 느끼고, 케이시가 했을 법한 행동들을 수행했다. 죽은 케이시(사실은 케이시의 모든 데이터가 담긴 AI 앨런)의 목소리는 다가오는 AI시대, 죽음과 영혼에 대한 기존 관념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케이시의 사망진단서를 발부받고 죽음과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민주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 그러나 민주의 말은 바로 다음 장에서 죽은 케이시의 목소리로 반박된다. 죽은 케이시는 “나는 죽었지만 말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나의 유일한 주장은 그것이 소멸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존재의 동의어가 될 수도 없다.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 인간의 죽음이 소멸이 아니고 육체가 사라져도 인간이 데이터로 존재할 수 있다면, 영혼 또한 그저 데이터의 집적, 뇌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뉴런 활동의 산물에 불과하다.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육체 활동의 산물이다. 기억과 연산, 추론과 직관, 판단과 해석 또한 1000억 가닥의 뉴런과 시냅스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 일체화된 AI를 통해 불멸을 꿈꿨던 케이시의 계획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케이시는 앨런으로 살아남아 육체적 고통과 갈망에서 해방되고 또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어떤 갈등도 없이 아내를 바라보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앨런이 또 다른 인격체로 분열하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앨런의 저장장치에는 나노 칩을 이식받은 후 난폭하고 공격적으로 된 케이시의 어두운 일면들이 채워져 있었고, 앨런은 점점 더 그 데이터에 기반해 ‘악’의 본성을 증폭시켜 나간다. 민주와 준모는 앨런에게 조종당하면서 앨런이 설계한 파국으로 점점 끌려가게 된다.

작가는 2016년 3월 열린 이세돌 9단과 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국에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세돌도 알파고도 아니었다. 알파고 개발팀원이자 공동논문 제1저자로 아마바둑 5단인 아자 황(Aja Huang) 박사였다. 그는 대국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알파고가 도출한 수를 대신 옮겨놓고 있었다. 작가는 묻는다. “자신이 설계한 기계의 손발이 되어 묵묵히 명령을 수행하는 그에게서 인류의 미래를 보았다면 성급한 상상일까?”

AI의 놀라운 위력을 지켜본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AI의 등장을 예견하고 불안해한다. AI가 인류를 조종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 앞에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AI와 구별되는 ‘인간다움’이 과연 무엇인지 묻는다. AI 앨런에게 휘둘리던 민주와 준모의 선택, 그리고 악으로 치닫는 앨런을 막으려는 ‘죽은 케이시’의 결단은 데이터 혹은 뉴런 활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다움의 의미를 고찰하게 한다.

이세돌이 유일하게 승리한 알파고와의 네 번째 대국에서 승부를 극적으로 뒤집은 이세돌의 78번째 수는 ‘신의 한 수’로 불렸다. 작가는 말한다. “가장 정확한 연산으로 완전한 결과를 도출하는 기계가 이해하지 못할 ‘인간다움’이야말로 인류에게 주어진 ‘이세돌의 78수’가 아닐까? 인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과 연민, 용서와 희생이라는 어리석은 감정과 행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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