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 SF로 들춰낸 야만적 사회의 현실

박송이 기자

정보라 작가 글 10편 묶은 단편선

트랜스휴먼 등 장르적 상상력 더해

잔혹한 현실 더 극적으로 그려내

정보라 작가 ⓒ 혜영

정보라 작가 ⓒ 혜영

작은 종말 |

정보라 지음 |퍼플레인 |372쪽 |1만8000원

완은 불면에 시달린다. 해마다 봄이 되면 증상은 더 심해졌다. 겨우 얕은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는 일이 밤새 계속됐다. 무엇 때문에 놀랐을까.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깨고 나면 꿈은 기억 너머로 사라졌고 공포와 불면의 밤은 점점 더 심해졌다. 완은 손녀 민의 제안으로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치료를 받기로 한다. 영상으로 기록된 꿈을 인공지능이 분석한 뒤 꿈 시나리오를 조금씩 변경하는 방식의 치료다. 쉽게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꿈을 기록한 다음 환자의 꿈에 점점 더 무난한 꿈 시나리오를 삽입해 덜 무섭거나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다른 꿈으로 ‘덮어쓰기’를 하는 것이다. 완의 악몽은 그렇게 재구성될 수 있을까.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작은 종말>이 출간됐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발표한 단편 10편을 묶었다. 2022년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 작가는 당시 심사위원들로부터 “마술적 사실주의, 호러, 공상과학(SF)의 경계를 초월했다”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표제작 ‘작은 종말’을 비롯해 ‘지향’ ‘도서관 물귀신’ ‘통역’ ‘행진’ ‘증언’ 등이 수록된 이번 작품집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공포, 야만적인 국가와 사회의 모습을 장르적 상상력을 통해 그려냄으로써 오늘날 현실의 잔혹함을 더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증언’은 반복되는 국가폭력과 피해자들의 증언의 역사를 ‘인공지능이 꿈을 재구성한다’라는 장르적 상상력을 가미해 풀어낸 작품이다. 하반신 마비가 있는 완은 시뮬레이션 치료를 받으며 매번 조금씩 다른 꿈을 꾼다. 첫 치료에서 마주한 꿈은 도시가 탱크에 둘러싸이고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뒤덮고 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리고 놀란 완은 모르는 아이와 손을 잡고 뛰어간다. 완은 겁에 질린 아이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다 갑자기 완의 허리에서 불꽃이 터진다. 등 전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완은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된다. 다음 시뮬레이션 치료에서 완은 꿈속에서 사람들 무리에 섞인 채, 엄마와 동생과 함께 보따리를 들고 어디론가 간다. 미군들이 있었고 갑자기 총알이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총알을 피해 굴다리로 달려갔지만, 총알을 피할 수 없었다. 완도 동생의 손을 잡고 굴다리로 뛰어가다가 갑자기 허리가 뜨거워짐을 느끼고 쓰러진다. 죽은 사람들 틈에서 정신을 차린 완은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향해 기어가지만, 동생은 커다랗게 눈을 뜬 채 더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치료를 받을 때마다 꿈은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완이 허리에 폭탄이나 총을 맞는 것, 겁에 질린 커다란 눈을 뜬 채 쓰러져간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은 똑같이 반복됐다. 꿈들은 제주 4·3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광주민주화항쟁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국가폭력 사건과 관련돼 있었다. 완 또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중학생이던 완은 하굣길에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다 총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됐다. ‘시뮬레이션 치료’는 그의 악몽을 재구성했지만, 공포의 핵심인 학살의 장면은 바꾸지 못했다. 완은 “세상에 재구성할 수 있는 악몽, 완화할 수 없는 트라우마,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삭일 수 없는 분노가 존재한다”라고 생각한다.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작은 종말>. 퍼플레인 제공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작은 종말>. 퍼플레인 제공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왜 완의 꿈에 이런 시나리오를 삽입했을까. 완을 치료하는 의사는 인공지능에는 어떤 의도도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만약을 가정해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인공지능은 선생님과 같은 일을 많은 사람이 겪었고 많은 사람이 증언했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폭력 피해를 겪고 생존하셨지요? 오래된 일이라고 해서 역사를 잊어도 되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시간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잊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해야 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완’이라는 한 인물이 꿈에서 겪는 동일한 고통들은 국가폭력이 반복됐음을 강조하면서 폭력의 주체로서 국가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각인시킨다. 독자들은 잔인한 악몽의 반복이 그치기를, 꿈에 갇힌 채 사는 완이 조금이나마 악몽에서 풀려나기를 바라게 된다. 이 밖에도 소설집은 성 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의 이야기를 ‘호러’와 ‘SF’가 뒤섞인 환상적인 설정으로 풀어냄으로써 ‘호러’보다 더 무섭고 미래사회보다 더 디스토피아적인 한국사회의 현실을 환기한다.

표제작 ‘작은 종말’은 잠을 안 자도 되고 피로도 못 느끼는 기계 인간 ‘트랜스휴먼’이 되기를 선택한 미래사회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상’은 동생이 트랜스휴먼 수술을 받기로 선택하자 이를 말린다. 비혼모로 시간제 일자리로 돈을 벌며 육아를 하는 동생은 효율성을 이유로 수술을 받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결국 트랜스휴먼이 된 동생은 인간의 모습을 잃은 기괴한 회색 형체가 되어버린다. 회색 형체들은 “노력해라. 존재의 방식을 바꾸어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건설하고 처음부터 다시 지어 올려라. 내가 했듯이, 우리 모두가 했듯이 자신을 변화시켜라. 너와 생명과 노력으로 새로운 삶을 얻어내라”라며 다른 인간들에게도 트랜스휴먼이 될 것을 촉구한다. ‘트랜스휴먼’의 등장은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나 그들의 외침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안과 피로에 잠식된 채,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자 생산성과 효율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목소리와 닮았다. ‘상’의 선언은 여기에 대비된다. ‘상’은 “(트랜스휴먼은) 인간으로 살아갈 방법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지금의 세계화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지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이고 현명한 계산이라는 미명하에 살기 위해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존재가 되라는 압박에 동의하거나 굴복했을 뿐”이라며 “외롭고 고유하고 존엄한 존재인 인간으로 끝까지 남겠다”라고 선언한다. ‘상’은 ‘비수술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등장하는데, 그의 선언은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끝까지 고민했던 소수자의 경험과 연결되면서 설득력을 더한다.

정보라 작가는 <아무튼, 데모>라는 책을 쓸 정도로 시위 현장을 맹렬히 누벼왔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의 지향과 맞닿으면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오늘날 ‘거리’와 ‘광장’의 동력이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한다. 책 첫 장을 넘기면 “자본주의 타파하고 지구를 지킵시다 투쟁”이라는 작가의 서명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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