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계몽’은 없다…얽히고설키며 풍성해지는 지혜

이영경 기자
[그림책]‘일방적 계몽’은 없다…얽히고설키며 풍성해지는 지혜

아마존을 수놓은 책 물결
이레네 바스코 글·후안 팔로미노 그림
김정하 옮김 | 봄볕 | 40쪽 | 1만6000원

한 젊은 선생님이 첫 발령을 받는다. 부임지는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 있는 라스 델리시아스 마을. 가는 길은 험하고 멀다. 그래도 신임 선생님은 열의가 넘친다. 책을 잔뜩 챙겨 버스를 서른두 시간, 배를 일곱 시간 타고 마을에 도착한다. 멀쩡한 벽도 없는 작은 학교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의 수업과 책을 좋아한다. 마을 어른들도 책에 호기심을 갖는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훈훈한 이야기’에 가깝다. 하지만 이내 책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들은 “커다란 뱀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며 수업을 중단하고 높은 곳으로 피신한다. 선생님은 지리 수업을 해야 한다고, 커다란 뱀 같은 건 전설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학생들은 사라지고 없다. 천둥 번개 소리에 덜컥 겁이 난 선생님도 언덕 위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정말 ‘커다란 뱀’을 만난다. 무섭게 불어나 집도 논밭도, 학교도 모조리 쓸어버리는 강물이 바로 ‘커다란 진흙 뱀’이었다. 선생님이 ‘전설’이라고 치부했던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중요한 지리 지식이었다.

[그림책]‘일방적 계몽’은 없다…얽히고설키며 풍성해지는 지혜

선생님이 책들이 강물에 휩쓸려 사라져 슬퍼하자, 마을 여자들은 모여서 네모난 하얀 천에 그림을 수놓기 시작한다. 실로 수놓아진 그림들은 아마존에 전해오는 전설과 이야기들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수업이 시작된다. 새로운 학교가 지어지고, 여자들은 수를 놓아 헝겊으로 책을 만들고, 선생님은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마을의 역사와 원주민의 말, 수놓는 법을 배운다.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러 온 선생님은 이제 아마존의 지식과 문화를 배우고 함께 나눈다.

이야기 전체를 이어주는 것은 실이다. 마을로 향하기 전 선생님의 머리맡엔 파란색 실뭉치가 있었다. 선생님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짐 틈새로 삐져나온 파란 실이 아이들에게 이어진다. 파란 실은 강물에 휩쓸려 사라지지만 마을 여자들이 헝겊으로 책을 만들면서 알록달록한 실들이 다시 나타나고, 이야기와 함께 풍성하게 얽힌다. 실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지식과 지혜를 의미한다. 처음에 하나만 존재했던 파란 실이 서구·근대적 지식을 의미한다면, 이후에 나타나는 다채로운 색깔의 실은 원주민의 고유한 지식과 문화를 의미한다. 활자로 적힌 지식만큼이나, 아마존 사람들에게도 그곳의 생존과 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가 존재했다는 것을, 파란색 실뿐 아니라 초록, 주황, 노란색 실도 중요하며 실들이 함께 얽힐 때 더 튼튼하고 풍요로워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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