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문학사 속 ‘여성문학’ 계보를 잇다

박송이 기자

‘한국 여성문학 선집’ 총 7권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 등

여성의 관점으로 작품 발굴

한국 문학 이끈 여성 작가들에

출간 전부터 독자 관심 이어져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한국 여성문학 선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깨끗이 도배된 벽지처럼 무늬 맞춰 발라진/ 한국문학사 앞에서/ 나 오늘 한 마리 쥐벼룩/ 여류 쥐벼룩.” 1989년 발표된 김승희 시인의 ‘내가 없는 한국문학사’는 여성문학을 배제해온 한국문학사를 비판하며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1930년대 이후 한동안 널리 쓰였던 ‘여류 문학’은 여성 작가를 ‘여류’라는 집단으로 묶으며 여성문학을 특정 장르로 주변화한 용어였다.

오랜 전통을 이어왔음에도 그간 문학사에서 역사적 계보와 문학적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던 한국 여성문학을 여성의 기준과 관점으로 집대성한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민음사)이 12년의 연구 끝에 출간됐다. 국문학 연구자 김양선(한림대), 김은하(경희대), 이선옥(숙명여대), 영문학 연구자 이명호(경희대), 이희원(서울과학기술대), 시 연구자 이경수(중앙대) 교수는 ‘왜 우리에게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전복적인 여성문학사, <노튼 여성문학 앤솔러지> 같은 여성 문학 선집이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을 품고 2012년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을 결성했다.

선집은 근대 초기부터 1990년대까지 100년의 시간을 아우른다. 개화기 양반 여성인 이 소사, 김 소사가 신문에 투고한 ‘여학교설시통문(1898)’부터 1990년대 최승자, 은희경, 한강 작가의 작품까지 포함됐다. 9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김양선 한림대 교수는 “기존에도 여성문학 선집은 있었으나 특정 시기나 장르에 한정돼 있었다”면서 “주류문학의 보충이나 대비물이 아닌, 독자적인 여성문학사이자 여성문학선집”이라고 출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근대 초기부터 이미 여성들은 공론장에서 글쓰는 주체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글쓰기는 매 시대마다 특성을 지니며 때론 변화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지속성을 가지며 이어져 내려왔지요. 그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산물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선집은 시, 소설, 희곡 등 제도화된 문학 장르를 넘어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독자 투고, 노동 수기 등 다양한 글쓰기를 총망라했다. 그러다보니 근대여성문학의 기원도 기존보다 20년 앞당겨진 1898년에서 출발한다. 기존 문학사에서는 주로 나혜석의 단편소설 ‘경희(1918)’를 여성문학의 원류로 꼽는다. 이번 선집에서는 여성을 위한 학교 설립을 주장하는 독자투고 ‘여학교설시통문(1898)’이 그 원류다. 김양선 교수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로 공론장에 글을 발표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라며 “영미권의 여성문학사나 여성문학선집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권리장전’이나 여성 작가들의 편지에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민음사 제공

한국 여성문학 선집. 민음사 제공

기존에 거론되던 대표작이 아닌 여성의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한 작품을 싣기도 했다. 예컨대 박화성(1904~1988) 작가의 경우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경향파 소설로 ‘하수도공사(1932)’가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집에는 여성 노동자가 겪는 차별을 밀도 있게 그린 ‘추석 전야(1925)’를 수록했다.

기존의 문학사에서 거의 조명받지 못했던 작품들도 새롭게 발굴됐다. 이정호(1930~2016)의 ‘잔양’과 박순녀 작가(1928~)의 ‘아이 러브 유’가 대표적이다. 김은하 교수는 “이정호 작가는 전쟁이 남성적 카니발리즘이며 여성이 교환되고 희생되는 전쟁의 구조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하고, 박순녀 작가는 1960년대 이방인의 시선으로 한국사를 짚어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다”라고 강조했다. 문학사에서 주변부로 배제돼 왔던 여성문학은 1990년대 한국문학의 중심부로 진입하며 문학장을 재편하기에 이른다. 100년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결과 이뤄낸 성취다. 이명호 교수는 “1990년대에 등장한 많은 여성 작가들은 단순히 수적으로 증가했을 뿐 아니라 이 시대 문학의 핵심을 견인했다”면서 “영미권에서는 1970년대에 여성문학이 소수자 위치에서 벗어났다는 선언이 있었다면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1990년대였다”라고 진단했다.

출간을 앞두고 진행한 북펀딩에는 많은 독자들의 관심이 모였다. 한 세트의 가격이 10만4000원으로 고가임에도 295명이 북펀딩에 참여했다. 박혜진 민음사 한국문학팀장은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의 성과였다”며 “1990년대 여성문학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2000년대 이후 여성문학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면서 이런 작업들이 성과를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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