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30여년, ‘최초의 당신’은 얼마나 남아있나

박송이 기자

관계가 단절된 형식적 중년 부부

사정 어려워지자 방치된 반려동물

누적된 시간 속 마모된 감정·관계

공허함 속 미묘한 심리 그린 단편

이경란 작가는 최근 소설집 <사막과 럭비>를 출간했다. 홍하얀 제공

이경란 작가는 최근 소설집 <사막과 럭비>를 출간했다. 홍하얀 제공

사막과 럭비 |

이경란 지음 |도서출판 강|264쪽 |1만4000원

다정은 교토의 오래된 장어초밥집을 떠올렸다. 그 집은 개업 이래 수십 년째 매일 기존 소스에 새 재료를 조금씩 추가해 장어 소스를 끓인다고 했다. 요리사는 수십 년이 지나도 소스에는 최초의 소스가 미량 남아 있다며 자랑스레 설명했다. “최초의 소스라고? 1퍼센트? 0.1퍼센트? 0.001퍼센트? 그러고도 최초의 맛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지 다정은 의아했다.”

이경란 작가의 소설집 <사막과 럭비>에 수록된 ‘다정 모를 세계’는 무관심과 회피, 침묵과 관계단절 속에서 형식적 부부 사이를 이어가는 중년 부부, ‘다정’과 ‘준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은 더는 상대로 인해 감정적 동요를 겪지 않는, 체념이 만든 공허한 평화 속에서 피상적으로 지속되는 관계의 양상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생활을 공유하며 오랜 시간 누적된 부부관계라는 특성상, 피상적인 태도만으로는 결코 처리되지 않는 인물의 복잡한 심리까지 그려낸다.

매일 조금씩 새 재료를 넣어 끓이고 또 끓인다는 장어 소스 일화는 시간 속에 변화한 이들의 관계를 넌지시 시사한다. 다정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밥을 먹는 준우를 보며 생각한다. “저 남자에게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남자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어떤 재료를 얼마나 넣어 끓이면 그 남자가 저 남자가 되는 걸까.” 해사하고 담백했던 젊은 날 준우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듯, 30여 년이 넘는 시간을 통과하며 준우에 대한 다정의 ‘최초의 감정’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때 다정에게도 “준우의 모습만으로도 애정과 원망으로 가슴이 뻐근해지던 시절”이 있었지만, 결혼 초 준우는 줄곧 다정을 외면하고 무시한 채 부부로서의 약속과 의무를 방기했다. 준우가 그럴 때마다 다정에게서도 “모래시계의 알갱이가 몇 개씩 일정한 속도로 흘러내리듯” 무언가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갔다.

다정은 “야속함, 분노, 슬픔, 체념의 순서를 수없이 반복해서 지나온 지금 마침내 무관심이라는 좌절에 도달했고, 적응했다.” 다정은 집을 나서고 들어올 때,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라는 수신자가 불분명한 인사를 남길 뿐 준우와 마주치는 상황을 피한다. 준우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걱정되거나 궁금하지가 않다. 그보다는 남편의 부재에 안도감을 느끼고, “동일인을 자식으로 공유한 사람에 대한 예의”로써 준우에게 부재중으로 찍힐 통화기록과 짧은 메시지를 남길 뿐이다. 불륜마저 예의상 들키지 않으려고 할 뿐, 다정에게는 준우를 속이기 위한 어떤 긴장감도 없다. 다정은 가끔 “자신이 왜, 어떻게,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 아무래도 이상”하고, “준우의 시작점은 어디”였을지 “준우는 왜 그런 준우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그러면서 다정은 그토록 불쾌해하던 준우의 음식 씹는 소리를 몰래 녹음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사막과 럭비>. 강 제공

<사막과 럭비>. 강 제공

‘다정 모를 세계’처럼 <사막과 럭비>에 수록된 단편들은 개별 작품의 주제 의식과는 별도로 시간의 누적 속에서 마모된 정서나 달라진 상황 속에서 변화된 관계 등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못 한 일’은 옷 수선집을 하며 겨우 살아가는 ‘선아 씨’의 고통스러운 현재와 13살 때 의류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경아언니’의 죽음을 포개놓으며 편리하게 버려지는 삶에 관해 이야기한 작품이다. 40년 가까이 미싱 일을 하는 ‘선아 씨’의 지쳐버린 마음은 요구사항이 많은 손님을 대할 때 마주치는 작은 귀찮음을 어느덧 삶 자체에 대한 거대한 피로감으로 바꾼다. “이런 반응을 일일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선아 씨는 귀찮다. 귀찮지만 한다. 안 할 도리가 없다.” “사실은 다 귀찮다. 모든 것이다. 사는 것도.” 이 같은 피로감은 새의 사체를 털실 장갑으로 일부러 오해할 만큼 중요한 것들을 외면하게 한다. “사람들은 그런 이치에 순응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아닐지도 모른다. 납작하게 반복해서 짓이겨진 새의 사체보다는 춥지도 않은 날씨의 털실 장갑 쪽이 한결 편안할 테니까. 보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자신이 덜 상처받는 쪽으로.”

한편 ‘다섯 개의 예각’은 돌봄과 배려의 정서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거북이 ‘별’은 주인공 가족이 여유가 있을 때는 지극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상황이 달라지자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 별을 위해 일부러 멀리 있는 마트에 가서 유기농 애호박까지 샀던 가족은 이제는 별의 끼니조차 챙기지 않고 각자의 핑계 속에 별을 방치한다. “경주는 이제 느긋하게 부엌을 정리하면서 별에게 말을 붙이거나 하지 않았다…동물들의 사료나 간식이 계산대에 올라올 때면 별의 배설물이 떠올라 오늘은 꼭 밥을 줘야겠다고 별렀으나…허둥지둥 출근하느라 별을 잊었다.”

작품들은 특정한 시간적, 공간적 맥락에 처해 있는 인물들의 심리를 자의식의 과잉처럼 느껴지지 않게 담백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피로·권태·체념·우울 등 작품이 보여주는 주된 정서는 어둡지만 그런 정서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소설은 묘한 위로와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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