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Eerie·해발 183m)고지 제3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라모스 중위는 적병이 모두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벙커 입구 4m까지 다가왔다.그 때였다. 별안간 중공군 2명이 소총을 난사하며 뛰쳐나왔다. 라모스 중위가 칼빈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중공군 3명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한국전쟁사 제11권-유엔군 참전사>,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0년)
1952년 5월 21일 새벽 4시 임진강 지류인 연천 역곡천 지류에 인접한 에리고지(Eerie·해발 183m)에서 필리핀 제20대대 수색중대 2소대의 작전이 펼쳐졌다. 에리고지는 아스널·요크·엉클과 함께 티본고지(T-bone·290m)의 전초기지였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래의 필리핀 대통령
작전을 이끈 제2소대장은 바로 피델 라모스 중위였다. 라모스는 1950년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전에 참전했다. 라모스는 ‘중국군이 고지 정상에 설치한 8곳의 벙커를 폭파,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가능하면 적병을 생포하라’는 임무를 받고 돌격대 44명을 이끌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라모스 소대는 철수작전을 펼친다.
“라모스 돌격대는 30분의 격전 끝에 임무를 완수한 뒤 뒹굴다시피 철수했다. 작전에 임한 장교 3명과 사병 41명은 단 1명의 손실도 없이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반면 5~6명이 활동할 수 있는 벙커 7개를 완파했고, 중공군 70여 명을 살상했다. 부대는 훗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결사대를 이끈 라모스는 1992~96년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바로 그 피델 라모스’를 지칭한다. 라모스는 대통령이 된 이후 한국전 참전의 경험을 입버릇처럼 자랑했다. 전사가 인정하듯 라모스 대통령의 무용담은 절대 허풍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단 라모스 뿐이 아니다. 필리핀 민주화의 영웅인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1932~1983)도 한국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오죽하면 필리핀 지폐(500페소)에도 등장했다. 즉 지폐뒷면에 18살에 불과한 아키노가 <마닐라타임스>의 종군기자로 활약한 모습이 담겨있다.
군복을 입고 펜과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젊은 아키노가 송고한 기사가 보인다. ‘필리핀 기갑부대가 38선을 넘어 진격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선명하다. 기사내용에는 ‘Korea’, ‘Seoul’, ‘Kaesong’ 등의 낯익은 단어가 보인다.
필리핀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3번째로 지상군을 파견한 나라였다. 선뜻 한국전쟁에 파병할 입장이 아니었다.
필리핀은 1946년 독립했으나 공산게릴라인 ‘후크단(Huks)’의 반란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엔의 한국전 참전결정이 내려지자 후크단 토벌작전에 투입된 10개대대 가운데 정예부대인 1개대대를 차출했다. 1950년 9월2일 제10대대 전투단 장병이 리잘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출정식을 열었다. 6만 시민의 열렬한 격려와 함께 필리핀은 사상 처음으로 해외파병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필리핀과 한국과의 끈질긴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500페소 지폐의 주인공인 베니그노 아키노를 보자. 그는 마르코스 독재 반대운동을 벌이다 1983년 암살되고 만다. 하지만 그와의 인연은 500폐소 지폐와 함께 60년 넘게 연결된다.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에 이어 셋째아들인 아키노 3세는 2010년 필리핀 15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에티오피아 사전엔 포로란 없다!’
아프리카 대륙의 에디오피아가 참전한 것도 의외라 할 수 있다.
왜 이역만리에서 벌어진 전쟁에 발벗고 나섰을까. 이유가 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즉각 국제연맹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그런 아픈 기억을 간직한 에티오피아였기에 한국전 발발 직후 참전을 결정했다. 사실 군대는 보잘 것 없었다. 이탈리아에게 무장해제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200명을 선발했다. 충성심 덕분에 엄청난 병사들이 앞다퉈 지원하는 바람에 경쟁률이 높았다. 결국 각 부대에서 골고루 선발하는 고육책을 썼다.
병사들은 아디스아바바 인근 한국 지형과 닮은 곳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황제는 파병부대에‘가그뉴(Kagnew)’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티오피아어로 ‘관통하기 어려운 물체’ 혹은‘상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거나 그를 괴멸시키는 것’을 뜻한다. 셀라시에 황제의 아버지인 무스 메넬렉 1
세의 애마 이름이 바로 ‘가그뉴’였다. 메넬렉 황제가 이 말을 타고 1886년 이탈리아 침략군의 진지를 분쇄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에디오피아 군은 참전기간 동안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포로는 단 한 명도 집계되지 않았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포로가 되는 것을 가장 불명예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설령 실종되어 복귀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상황에 봉착하면 아예 목숨을 끊는 것을 명예로 삼았다. 따라서 부대가 포위당했을 때는 전멸할 때까지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에디오피아 파병군은 집과 땅을 하사받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다.
1968년 춘천 호반에 에디오피아 참전기념비를 건립됐으며, 그 제막식에 셀라시에 황제도 참석했다. 하지만 1974년 쿠데타로 황제가 피살된 이후 참전용사들의 입지도 급전직하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배신자로 낙인찍혔다고 한다. 지금도 참전병사들은 아디스아바바에서 20분 거리인 ‘코리아 빌리지’에서 살고 있다.
■갖가지 참전의 사연들
태국군의 별명은 ‘리틀 타이거’였다. 1952년 11월1일부터 벌어진 역곡천(연천) 북쪽의 포크찹 고지전에서 세운 혁혁한 공 덕분이었다.
포크찹 고지는 해발 234m에 불과했지만 인근 불모고지와 티본고지 등과 한 묶음이어서 전략적 가치가 컸다. 태국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태국군은 1952년 11월1일부터 벌어진 이 포크찹 고지전투에서
세 번에 걸친 중국군의 공격을 백병전과 역습으로 물리치고 끝까지 고지를 지켜냈다. 11일까지 벌어진 이 전투결과 중국군 300명이 사살되었으며, 태국군 전사자는 25명에 불과했다. 포크찹 전투는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8일까지 이어졌다. 1959년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Pork chop hill’)가 개봉되기도 했다.
영국은 호주·캐나다·뉴질랜드·벨기에·룩셈부르크 등과 함께 영연방 제1사단을 구성했다. 연인원 1만7000명이 참전해서 4500명에 이르는 인명피해를 당했다.
특히 1951년 4월 예하 글로스터 대대가 임진강 캐슬고지에서 궤멸당하는 패전을 기록했다. 하지만 3일간이나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한 덕분에 서울의 재점령을 막아낼 수 있었다. 호주는 영유리, 박천, 가평, 마량산 전투에서, 뉴질랜드 포병부대는 가평전투에서, 네덜란드는 원주와 횡성에서, 벨기에는 금굴산 작전에서 크게 활약했다.
벨기에 파병군 가운데는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이던 모레안 드 멜론이 소령으로 출전, 연락장교를 맡기도 했다. 인구가 20여 만 명에 불과했던 룩셈부르크는 맥아더가 제시한 ‘최소한 1000명’ 가이드라인에서 유일하게 예외가 된 나라였다. 룩셈부르크는 소대급인 48명을 파병했고, 17명의 사상자(전사 2명)를 냈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군 장군이었던 몽클라르의 일화도 흥미롭다. 몽클라르는 2차 대전 당시 외인부대 출신의 중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전이 결정되자 몽클라르는 강등을 자처, 임시 중령으로 현역에 복귀해 대대장이 됐다. 프랑스가 대대급을 파견했으므로 강등은 불가피했다.
여단급인 5090명이나 참전한 터키군은 언어소통 문제로 피아(한국군과 북한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악조건에서도 전투에 임했다. 제대로 된 실탄훈련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터키군은 1950년 11월, 중국군의 맹공에 초반 군우리 전투에서 여단의 전력이 사실상 와해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51년 1월 금량장 전투에서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착검한 채 돌격하는 용맹성을 발휘하면서 명예를 되찾았다.
남미의 콜롬비아도 1948년 적색분자들에 의한 최악의 폭력사태를 겪었음에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유일하게 대대급 규모의 파병군을 보냈다. 콜롬비아군은 금성지구와 불모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천 부근 381고지 방어전투 등에서 활약한 그리스군과 공군부대를 파견한 남아프리카 군도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유엔 16개국에 속해있다.
■세계대전급의 미군 피해
미국군의 피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미국은 연인원 18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했다. 이것은 1812년의 미ㆍ영 전쟁(28만명)과 1898년의 미ㆍ스페인 전쟁(30만6000명)을 훨씬 능가하는 병력투입이었다. 비록 1861년의 남북전쟁(221만명)과 1917년 1차대전(473만명),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1611만명)보다는 적은 규모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한국전쟁이 초반 1년을 빼면 나머지 3분의 2 기간이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제한전쟁을 벌였던 점을 감안하면 세계대전 규모의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년의 전쟁기간 동안 미군의 인명피해가 14만 명(전사 3만4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는 전체 참전병력의 8%에 해당하는 수치로, 제1·2차 세계대전(7%)보다도 높은 인명피해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2차대전의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육군 소령을 비롯해 미군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 그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했다.
미8군 사령관 월터 워커 육군중장의 아들 샘 육군대위, 유엔군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육군대장의 아들 마크 빌 육군대위,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육군중장의 아들 지미 공군중위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 가운데 밴플리트 아들인 지미는 전
투기 조종사로 활약하다가 야간폭격임무 중 실종됐다. 클라크 대장의 아들 마크 빌 대위는 미 제9연대 G연대장으로 참전하여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귀국했다.
이 뿐이 아니다.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제독의 순직, 워커 미8군사령관의 교통사고 사망, 브라이언트 무어 제9단장의 헬리콥터 사망 등 미국의 군ㆍ사단장과 연대장급 지휘관들이 숨져갔다. 유엔군을 지휘하고 작전을 통제한 미군의 주도로 한국전쟁 기간동안 수행된 크고 작은 작전은 무려 200개를 넘는다.
■순망치한의 고사를 걸고 출전한 중국군
비록 적이지만 중국의 젊은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신생국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아래 연인원 300만명의 병사를 한반도에 보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은 ‘순망치한(脣亡齒寒) 호파당위(戶破堂危)’의 고사를 인용했다. ‘입술(북한)이 없어지면 이(중국)이 시리고 현관문(북한)이 깨지면 집 안채(중국)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등 어렵고 힘겨운 싸움 끝에 1949년 탄생한 중국으로서는 9개월 만에 벌어진 한국전쟁에 참전할 여력이 없었다. 내전과 항일전을 치른 신생국으로서 경제 살리기에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국민총생산은 미국의 1/5수준이었고, 철강생산량은 1/144라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중국은 “미국이 북한을 무너뜨리면 중국의 동북부도 안전할 수 없다”는 저우언라이의 언급처럼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중국군은 전쟁기간 동안 97만명이 넘는 인명피해(전사 14만8000여명 포함)를 냈다.
■200만명의 젊은이가 희생된 세계대전급 전쟁
물론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전쟁당사자인 남북한이었다. 한국군 32만명, 북한군 60~80만명의 인명피해가 났으니까. 모든 통계를 합하면 한국전쟁에서 사상자와 포로 및 실종자를 합하면 피아간 모두 200만명이 희생됐다.
이렇듯 한국전쟁은 직접 참전국 20개국(소련 포함) 젊은이들의 추억을, 넋을 전장에 뿌려놓았다. 간접지원국을 합하면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을 포함해 전 세계 45개국이 치른 국제전이었다. 한국전쟁을 ‘제3차 대전의 대체전’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회원국은 59개국이었다. 이 가운데 1950년 6월27일 53개국이 한국에 군사원조를 권고하는 결의문에 찬성표를 던진다. 미국은 미국의 한국전 개입에 집단 안보적 성격을 강조했다. 당시 에치슨 국무장관은 “미래의 전쟁은 미국 대 소련이 아니라 자유세계 대 공산세계의 대결”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미국 내 지지와 국제사회의 동맹을 이끌어 냈다.
■고지전으로 일관한 제한전쟁
1950년 7월7일 유엔 안보리는 미국의 지휘아래 통일된 명령체계의 수립을 결의했다.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더글라스 맥아더는 “지원국의 최소 파병수를 적절한 전투와 병력지원을 할 수 있는 1000여 명 정도의 1개 보병대대”라는 아우트라인을 설정했다. 파병을 원한다 해도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태국과 필리핀은 이 전쟁에 서방세계 뿐 아니라 아시아인도 동참한다는 명분아래 참여할 수 있었다.
전세계에서 모인 젊은이들의 피와 넋을 묻은 한국전쟁은 매우 특이한 전쟁이었다.
전 기간(1127일) 가운데 2/3나 되는 764일 간을 지금의 비무장지대 부근인 판문점~연천~철원~남강을 중심으로 지루한 교착전을 펼쳤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군과 북한군, 중국군, 그리고 유엔의 기치아래 전쟁에 직접 참전한 16개국 병사들이 이 지긋지긋한 고지쟁탈전에서 희생되었다.
전쟁초기 희생자 8만 명에 비해서는 적은 숫자였지만 고지전ㆍ진지전을 중심으로 벌인 이 제한된 전투
에서 해마다 3만 명의 전상자가 발생했다. 문산~철의 삼각지대~간성을 확보하면 큰 병력손실은 없을 것이라던 유엔군 측의 당초 예상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터치다운, 쇼다운…향수병 탓에 붙인 작전명
지루한 전투 속에서 전투의 성격이나 특징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작전명이나 고지의 이름이 쏟아졌다.
특히 미군 주도로 펼친 작전이 200여 개나 되었으므로 작전이름 또한 블루 하트(Blue Heart), 크로마이트(Chromite), 코만도(Commando), 킬러(Killer), 파일 드라이버(Pile Driver), 래트 킬러(Rat Killer), 리퍼(Ripper), 라운드업(Roundup), 러기드(Rugged), 쇼다운(Showdown), 테일 보드(Tail Board), 선더볼트(Thunderbolt), 울프 하운드(Wolf hound) 등 영어로 표기되었다.
이 가운데 ‘쇼다운(Show Down)’은 휴전회담의 와중에 중국군의 전력이 유엔군에 육박하는 수준에 도달한 1952년 10월, 유엔군도 공격작전을 벌일 능력이 있음을 과시한다는 측면에서 전개됐다. 이것이 바로 저격능선 전투(중국은 이 전투를 삼각고지 전투와 묶어 상감령 전역이라 한다)이다. 하지만 과시용 치고는 전력손실이 너무 컸다. 저격능선+삼각고지전투에서 쌍방 2만(한국군 자료)~3만7000명(중국군 자료)의 사상자를 냈으니 말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작전이름은 1951년 9월 ‘단장의 능선’에서 벌인 ‘터치다운(Touch Down)’이다.
미군은 미식축구 작전을 본 따 3대 연대가 동시에 공격하여 적의 방어력 분쇄하고 측ㆍ후방으로 전차부대를 진출시켜 북한군을 배후에서 치는 작전을 펼쳤다.
미국의 주나 도시 이름을 딴 작전통제선이 등장했는데, 와이오밍선, 미주리선, 애리조나선, 올버니선, 유타선, 네바다선 등이 단적인 예다. 터키군의 분전으로 유명한 네바다 전초군의 경우 초소이름을 카슨, 엘코, 베이거스 등 네바다 주에 있는 도시 명을 따서 장병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제인러셀 고지, 티본고지, 포크찹고지, 아이스크림고지…
또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고지의 이름들은 종군기자들이 쓴 기사로 전 세계로 타전되었는데, 이 자체가 역사성과 상징성을 담고 있다.
예컨대 ‘티본고지(T-boneㆍ연천)’, ‘포크찹 고지(Porkchopㆍ연천)’, ‘백마고지(White Horseㆍ철원)’, ‘저격능선(Sniper Ridgeㆍ김화)’, ‘애로우헤드(Arrow headㆍ철원)’, ‘벙커고지(Bunkerㆍ홍천)’, ‘불모고지(Old Baldyㆍ연천)’, ‘지형(指形)능선(Finger Ridgeㆍ금성)’,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ㆍ양구 북방)’,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ㆍ양구 북방)’, ‘리틀 지브롤터(Little Gibralterㆍ연천 고왕산)’, ‘제인러셀 고지(Jane Russellㆍ김화 오성산 기슭)’, ‘크리스마스 고지(양구 북방)’, ‘아이스크림 고지(삽슬봉ㆍ철원)’ 등 고지의 형태를 빗댔거나 전투의 상황을 비유한 이름들이 양산되었다.
티본스테이크처럼 생겼다는 ‘티본 고지’와 갈빗살이 붙은 돼지 갈비뼈를 닮았다는 ‘포크찹 고지’,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 해서 이름 붙은 ‘제인러셀 고지’ 등의 이름은 유머러스하다. 고지 전투의 고단함과 어려움, 비참함을 이렇게 유머로 승화시킨 것이다.
반면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와,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不毛)고지’, 1951년 크리스마스 때인 데도 중국군의 대공세를 받았다는 ‘크리스마스 고지’, 저격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 그리고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등은 전쟁의 참화를 웅변해주는 명칭들이다.
이렇듯 비무장 지대 일원은 이역만리에 파견된 5대양6대주 젊은이들의 피와 넋이 담긴 곳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헛된 피를 뿌린 것일까. 물론 지루한 교착전의 양상으로 펼쳐진 희한한 전쟁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피를 흘리고 스러져 간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세계는 어떻든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머나먼 곳에까지 와서 싸우다 숨져간 이들의 넋은 고귀한 것이다.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6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라모스 중위의 심정으로 연천 역곡천에서 겪었던 ‘전쟁의 추억’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 그 뿐이랴. 당시 참전했던, 지금은 늙고 병들어 버린 노병들도 저 한반도 최전방 무명고지에서 스러져간 전우들을 떠올리며 ‘젊은 날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