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를 감상하는 데는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 같아야 그 진가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150여 년 전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절친 권돈인(1783~1859)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술 감상법이다.
서화를 감상할 때는 사찰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눈처럼 무섭게, 그리고 세금을 거두는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처럼 치밀해야 한다는 뜻이다.
■0.01%의 부족도 불허했던 추사
하기야 추사는 “70평생에 벼루 10개의 밑창이 뚫리도록 먹을 갈았고, 붓 1000자루가 몽땅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고 자부할만큼 평생 수련했던 이였다. 그러니 글 좀 쓰네, 그림 좀 그리네 하고 뻐기는 자들의 작품을 가차없이 평가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추사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난초 그림을 평한 내용을 보라.
추사는 일단 “이 늙은이(추사)도 의당 손을 오므려야겠다. 압록강 이동(조선)에 이만한 작품은 없다”고 한 상 말아주었다. 왕족인 이하응에게 일단은 황공할 정도의 칭찬을 해준 것이다, 그러나 말미에 단 사족은 징글징글하다.
“아무리 9999분까지 이르러도 나머지 1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지막 1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이 무슨 소리인가. 요즘 말로 ‘2% 부족’이 아니라 ‘0.01퍼센트의 부족도 불허’한 추사였던 것이다.
■“노인장은 이 동네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1840년(헌종 6년) 추사는 제주도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고 전주를 지날 때 전설같은 일화를 남겼다.
추사는 전주 지역에서 제법 이름이 난 서예가 이삼만(1770-1847)을 만난다. 당시 70살이 된 이삼만은 이광사의 필첩을 보고 공부한, 이른바 지방작가였다. 중앙무대에서 알려진 서예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남에서는 알아주는 명필이었다. 지리산 천은사의 ‘보제루’ 현판도, 곡성 태안사의 ‘배알문’ 글씨도 썼던 인물이었다.
그런 이삼만은 당대 불세출의 서예가인 추사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비록 추사보다 16살이나 많은 노인이었지만 추사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이 자리에는 이삼만의 제자들도 줄지어 배석했다. 그런데 이삼만이 써내려간 글씨를 보던 추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의 정적을 깨고 추사가 내뱉은 한마디….
“노인장께서 이 고장에서는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일순 좌중에 침묵에 휩싸였다. 이런 수모가 어디 있는가. 숨죽이며 추사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던 이삼만의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뭐 저런….”
제자들이 추사를 두들겨 팰 요량으로 들썩이자 이삼만이 “그만 두라”고 만류하면서 서둘러 떠나는 추사의 뒷통수를 향해 한마디 던졌다.
“저 사람, 글씨는 잘 쓰는 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먹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구나.”
■“저런 말도 안되는 현판을? 당장 떼게.”
또하나의 전설처럼 떠도는 일화가 있다.
전주를 탈출한 추사가 초의선사를 만나러 해남 대둔사에 도착했다. 그때 추사의 빈정을 상하게 한 것이 ‘대웅보전’ 네 글자였다. 평소 추사가 맹렬하게 비판했던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였다. 추사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뭐하는건가. 원교(이광사)의 현판을 떼어내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째 저런 것을 걸고 있단 말인가.”
그런 다음 추사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서 멋진 예서체로 ‘대웅보전’ 네 글자를 쓴 뒤 “이걸로 걸라”고 했다. 추사는 이외에도 차를 마시는 선방에 ‘무량수각’의 네 글자를 덤으로 써주었다. 솔직히 말해 추사의 글씨와 원교(이광사)의 글씨를 보면 서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등수를 가릴 입장은 아니다.
이렇게 “내가 제일 잘 나가”를 외치며 잘난척했던 추사는 ‘비호감’ 그 자체였다.
걸핏하면 “세상 사람들은 뭐 이렇게들 알고 있지만 아니야. 내가 북경에 진본을 봤거든”, 뭐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갰다. ‘알지도 못하면 가만 있으라’는 것이었다.
1830년(순조 30년) 부사과 김우명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추사 김정희가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김노경(추사의 부친)의 요사스런 자식은 항상 반론을 가지고 교활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륜이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뭇 인사들이 거만하고 독선적이며 사사건건 독설을 내뱉는 추사를 얼마나 꼴보기 싫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희룡 같은 무리는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
추사 때문에 별볼 일 없는 화가로 폄훼된 대표적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우봉 조희룡(1789-1866)이다.
추사는 서자인 이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봉을 이렇게 ‘디스’ 한다.
“난초 치는 법은 예서 쓰는 법과 비슷해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券氣)가 있어야 한다.…조희룡 같은 무리(輩)는 나에게 난치는 법을 배웠지만 그림 그리는 법식의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는 까닭이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특정인을 ‘뒷담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편지가 훗날 <완당선생문집>에 실려 만천하게 공개된 게 문제였다. 추사의 한마디 평가 때문에 우봉은 ‘문자향 서권기’ 없는 화가로 폄훼됐다.
추사가 입버릇처럼 언급한 ‘문자향 서권기’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손재주로 글씨나 그림을 쓰거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가 밴’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추사의 ‘문자향 서권기’ 타령에는 사실 문인사대부의 오만함이 배어있다. 시서화는 책을 많이 읽은 문인사대부만이 그 가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림의 기술로만 보면 중인층 전문화가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나 “너희는 절대 문자향 서권기를 작품 속에 표현할 수 없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문자향 서권기는 무슨…. 손재주가 최고지”
우봉 조희룡은 중인층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따라서 ‘문자향 서권기’를 강조하기에는 신분의 한계가 뚜렷했다.
원래 우봉은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1346-1405)의 15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증조부 때부터 갑자기 무반벼슬로 갈아타더니 언젠가부터 중서인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우봉은 절대 허투루 볼 수 없는 인물이다.
1848년(헌종 14년) “금강산을 다녀와 시를 지어 올리라”는 헌종 임금의 명을 받들었다. 또 헌종의 지시에 따라 중희당에 부속된 ‘문향실’의 편액을 썼다. 그 뿐이 아니다. 헌종은 회갑을 맞은 우봉에게 특별히 벼루를 하사하기도 했다.
우봉의 예술적 지향점은 추사와 완전히 달랐다.
아무리 ‘문자향 서권기’를 갖고 있어도 손재주, 즉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면 아무리 배워도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손재주다. 재주가 없으면 총명한 사람이라도 종신토록 배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은 아니다.”(<석우망년록>)
이 말은 ‘서화에는 재능이나 재주가 아니라 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만 배어나오면 그 뿐’이라는 추사의 예술론을 향한 통렬한 반박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봉은 추사의 제자인가
우봉에 대한 평가를 흐리게 만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봉이 추사의 제자’라는 고정관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봉 조희룡의 글씨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또 사용하는 언어와 문제 삼는 대상 또한 흡사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스승 제자 사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19세기는 ‘추사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중인을 자처한 조희룡이 당대 문화계의 거목인 추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뿐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봉은 추사의 제자가 맞는가.
1860년 청나라의 저명한 서예가인 정공수가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절인 신석우(1805-1865)에게 조희룡의 부채그림을 보여주며 “조희룡은 어떤 화가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때 신석우는 “조희룡은 김정희의 고족(高足·으뜸 가는 제자)이며, 김정희 사후에는 오직 이 사람만 있을 것”이라 했다.
또 1851년(철종 2년) 김정희가 탄핵을 받았을 때는 김정희의 복심(심복)으로 지목되어 3년간(19개월)이나 절도(전남 신안 임자도)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조희룡 부자가) 김정희의 심복이 되어 삼엄한 곳을 출입하고 어두운 밤에 왕래하여….”(<철종실록>)
이 두가지 기록을 보면 우봉 조희룡은 김정희의 일거수일투족을 뒤따르는 수제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추사를 스승이라 칭한 적 없다
그렇지만 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우봉은 유배를 다녀온 후 김정희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輓詞)를 남겼는데 그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완당학사(김정희)는 수를 누리기를 71세이니 500년 만에 온 분이라네… 조희룡이 재배하고 만장을 올린다.”
만사를 유심히 뜯어보면 선생이나, 스승(師)이나, 문생(門生)이나, 제(弟)나, 뭐 스승 제자를 의미하는 표현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우봉은 평소 존경하는 추사의 자장(磁場) 아래서 영향을 받았지만 스스로 제자를 자처하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우봉과 추사의 나이차는 불과 3살이다. 아무래도 스승 제자를 칭할 나이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우봉이 추사의 심복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갔는데도 유배중에 쓴 수많은 글에 추사를 거론하지 않았다.
우봉은 심지어 “스승을 따로 둔 적이 없다”는 식의 강한 자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판교(청나라 중기의 화가)는 ‘나는 대나무를 그리지만 스승에게 배운바 없고, 햇빛과 달그림자 속에서 배웠다’고 했다. 나 또한 그렇게 말한다.”(<화구암난묵>)
우봉은 특히 매화의 경우 청나라 화가들의 작품이 뛰어나지만 “나는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유가의 비판(추사), 노장의 여유(우봉)
그렇다면 1849년(헌종 15년) 6월부터 우봉이 한 무리의 소장파 작가들을 이끌고 63살의 추사를 찾아가 작품평을 받은 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모두 7차례에 걸친 품평회에는 서예가 8명, 화가 8명 등 16명이 참여했다.
이때 추사는 각각의 작품에 특유의 ‘금강안 혹리수’ 촌평을 달아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착안점이 있다. 우봉 조희룡 또한 이들 작가들의 작품에 나름대로의 화제시를 써주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작품을 두고 추사의 평과 우봉의 평이 사뭇 달랐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유재소의 ‘추수계정도’를 본 두 사람의 평을 비교해보라.
“원나라 문인의 화풍은 따르는구나. 그러나 문인화의 법도는 따르지 못하고 형식만 취했다.”(추사)
“가을국화인양 아담한 사람이구나. 먹은 또 천연스럽구나. …언덕과 골짜기에 시로써 다니는구나.”(우봉)
김수철의 ‘매우행인도’는 어떤가.
“구도가 능숙하다. 그런데 색칠이 세밀하지 못하고 우산 쓴 사람을 그린 것도 그림쟁이 수법이 됐다.”(추사)
“사람들 모두 실제의 산을 사랑하지만 나는 홀로 그림 속 산에 들어간다오.”(우봉)
품평을 받는 소장 작가들의 입장이라면 과연 누구의 평을 더 좋아했을까. 아무래도 ‘형식만 취했다’느니, ‘그림쟁이 수법’이라느니 하고 싫은 소리를 해대는 추사의 ‘금강안 혹리수’ 비평보다는 애정을 듬뿍담은 우봉의 자상한 평가를 좋아
했을 것이다. 한영규 성균관대 교수(국문학)는 두사람의 감상법을 두고, “추사가 한치의 틈도 없는 완벽을 추구하는 유가의 면모를 추구한 반면 우봉은 온건하면서 자족지향적인 노장(老莊)에 가깝다”고 보았다.
■우봉은 묵장의 영수다
무엇보다 당시 우봉은 60살, 추사는 63살이었다. 단 3살 차이인데 스승 제자 사이라니 좀 어색하지 않은가..
우봉이 당대 조선의 예술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문인사대부였던 추사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젊은 서화가들을 이끌고 김정희의 품평을 받는 행사를 주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봉 자신은 추사의 품평을 받지 않고 오히려 이들 서화가들의 작품에 오언절구의 시를 써서 격려했다. 추사와 우봉이 어느덧 쌍벽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저명한 서예가이자 언론인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은 품평회에 출품한 작품들을 모은 <예림갑을록>의 유재소 그림 위에 쓴 글에서 우봉을 두고 ‘묵장(墨場)의 영수’라 칭했다. ‘묵장의 영수’란 ‘먹을 다루는 세계’(묵장)의 ‘우두머리’(영수)라는 뜻이다. 함부로 우봉 조희룡을 추사 김정희의 제자라느니, 문자향 서권기가 없는 그저그런 화가라느니 하
면서 폄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매화 덕후’였던 우봉
우봉은 특히 ‘매화 덕후’였다. “장수할 상이 아닌데 매화를 사랑하는 바람에 백발이 되도록 살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송의 서예가인) 미불(1051-1107)은 돌(石)을 어르신(丈人)이라 불렀는데, 나는 매화를 선생이라 한다.”(<제화>)고까지 했다. 우봉의 매화그림 중 백미는 ‘매화서옥도’이다.
가파른 산기슭 절벽 아래 나지막한 서옥(書屋·글방)이 있고 주변은 온통 만발한 매화로 둘러씨인 모습이다. 조희룡은 매화 그림을 두고 향설해(香雪海), 즉 ‘향기로운 눈바다’라는 멋들어진 표현을 썼다. 매화서옥도를 보면 그야말로 향기로운 눈바다에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사실 ‘문자향 서권기’를 강조했던 김정희의 눈으로 보면이 조희룡의 ‘매화서옥도’는 ‘불합격 작품’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절제된 김정희의 ‘세한도’와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림의 품격은 솜씨가 아닌 그 뜻에 있다”는 김정희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겠는가.
■매화서옥도와 세한도의 감상법
하지만 추사는 추사이고, 우봉은 우봉이다.
우봉의 ‘매화서옥도’는 과장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대단히 소란스럽고, 보는 이의 시각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한다. 결국 우봉 조희룡의 작품을 ‘문자향 서권기’가 없어서 수준이 낮다고 폄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와 우봉 조희룡의 작품세계가 달랐을 뿐이다.
추사가 응축되고 절제된 학문을 바탕으로 고원한 경지의 글씨와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면 우봉은 한바탕 떠들썩한 광도난말(狂途亂抹·마구 바르고 어지러이 칠함)의 잔치로 대중에게 다가서는 그림을 추구했다.
추사가 이지적이라면 우봉은 감성적이었다.
두 거목의 작품세계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삼국시대 위나라 인물들인 관녕(158-214)와 화흠(157-213)의 일화가 있다, 절친인 두 사람이 어느날 함께 공부하고 있는데, 밖에서 고관대작의 수레가 지나갔다. 이때 화흠은 책을 덮고 창문 밖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녕은 “화흠이 부귀영화에 마음을 두었구나!”라 한탄하면서 같이 쓰던 방석을 잘라 절교해버렸다. 이것이 관녕할석(管寧割席)의 고사다.
추사가 창밖에 소란스런 행렬이 지나가는데도 미동도 않고 글을 읽는 관녕이라면, 우봉은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화흠이었다는 것이다.
■150년전의 뒷담화가 일으킨 파문
추사의 ‘세한도’와 우봉의 ‘매화서옥도’는 바로 작품세계가 완전히 상반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감상자인 필자의 눈으로는 조희룡의 ‘매화서옥도’가 더 좋다. 보는 이가 더 좋다는 데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또 하나 소곤거릴 대목이 있다. 어느 누구를 향한 뒷담화도 조심해서 해야 할 것 같다.
추사가 아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 ‘조희룡 무리의 작품은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고 ‘디스’한 것이 이렇게 150년이 넘도록 인구에 회자되고, ‘묵장의 영수’ 소리를 듣던 우봉 조희룡에게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추사 김정희 선생도 지하에서 엄청 미안해 할 것 같다.
<참고자료>
한영규, <조희룡과 추사파 중인의 시대>, 학자원, 2012
‘조희룡의 예술정신과 문예성향’,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1
이선옥, <우봉 조희룡-19세기 묵장의 영수>, 2017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 한길아트, 2005
유홍준, <김정희-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학고재, 2006
고연희, ‘문자향 서권기, 그 함의와 형상화 문제’, <미술사학> 237권 237호, 한국미술사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