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잊지 못하는 당신에게 김광석의 ‘그날들’이 건네는 위로

올댓아트 이민지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03.15 15:52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3.15 15:56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가수 김광석의 노래가 왜 유명한지 묻는 어느 네티즌의 질문에 달린 답변이다. 익명의 사람이 쓴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했고, 자신의 삶 속에서 김광석의 노래가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봤다고 고백했다.

김광석의 노래, 이 여섯 글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그만큼 김광석은 시대의 상징이었고, 그의 노래는 인생 한 자락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뮤지컬 <그날들>의 연출을 맡은 장유정 연출가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고비마다 그의 노래에 위로를 받았지만 정작 그가 위로를 필요로 할 때 힘을 보태어 지켜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썼고, 누군가를 지키는 것을 업으로 삼은 경호관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청와대 신입 경호관인 정학(왼쪽)과 무영.|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무대는 2012년 어느 날에서 시작한다. 청와대 경호팀장 정학은 한중 수교 2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풍선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체크하던 그에게 뜻밖의 변수가 발생한다. 바로 대통령의 딸과 그의 경호관이 사라진 것. 이 사건을 좇던 정학은 이상하게도 닮아있는 20년 전 ‘그날’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정학은 이제 막 훈련을 마치고 임명장을 받은 청와대 신입 경호관이다. 세상 풍파에 지친 2012년의 그와 달리 1992년의 그는, 사회에 첫걸음을 뗀 초년생답게 의욕이 넘치는, 그러나 엉성함이 묻어있는 청년으로 묘사됐다. 청와대 경호관 동기들과 장난을 치고, 정체 모를 그녀가 갖고 있는 지적인 면모와 쓸쓸한 분위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등 딱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매사에 여유롭고 장난스러운 정학의 친구 무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학은 안경을 통해 현재(왼쪽)와 과거를 구분할 수 있다.|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그러나 ‘1992년’이라는 시대는 이들을 그저 평범한 젊은이로만 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친구인 무영과 그녀는 갑작스럽게 사라졌고, 정학은 이들의 부재로 인해 국가로부터 협박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시련은 한순간에 사라진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이었다. 그렇게 정학은 시간과 상황 앞에 변해갔다. 마치 이들이 처음 부른 ‘변해가네’의 가사처럼.

행방불명된 대통령의 딸과 그의 경호관을 찾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정학은 20년 전 무영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묘비에나 쓰일 법한 ‘무영 왔다 감’이라는 낙서와 암호 같은 편지를 발견한 정학은 20년간 상실감과 배신감 아래 자리했던 자신의 젊은 날, 소중했던 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날들>에 없었지만 그려지는 ‘김광석’”

‘김광석의 노래’는 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 있어 양날의 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제작진의 고심의 흔적들은 무대 곳곳에서 느껴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넘버다. 뮤지컬 <그날들>은 총 24곡의 넘버들이 3시간 가까이를 채운다. 통기타와 목소리만으로 이뤄졌던 원곡과는 달리 대다수의 넘버들은 주조연과 23명의 앙상블, 15인조 오케스트라의 향연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덕분에 <그날들>은 재해석한 김광석의 노래를 음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또 이 작품을 통해 ‘김광석 세대’에게는 추억을, 그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는 낭만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장소영 음악감독의 바람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비록 그와 함께 부를 수는 없지만, 모두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그날들> 속 인물들과 이들이 처한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기에 그의 노래에 한계란 없어 보인다.

<그날들>에서 정학을 위로하며 장난을 치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장면(왼쪽)과 김광석 앨범의 커버 이미지.|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경향DB

‘그날들’이 지나간 시간과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하는 정학의 마음을 노래했다면, 무영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는 과거와 현재의 정학 모두에 위로를 건네는 곡이다. 이 곡은 처음에는 과거의 정학에게 아름다운 노래와 여인의 사진으로 웃어넘기자는 유쾌한 위로를, 극 말미 현재의 정학에게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과 떠난 자신에 얽매이지 말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밝은 곡 분위기와 슬픈 노랫말이 공존하는 이 곡은 원래부터 무영의 노래인 마냥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김광석의 노래가 청년부터 노년까지 세대를 아우르고, 폭넓은 감정을 표현하는 강점 또한 무대는 영리하게 활용한다. 경호관인 무영과 정학, 대식이 피경호인인 그녀와 하나를 보며 부르는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은 현재 상황이 과거와 함께 흘러가고 있음을 관객들에 암시한다. 또 ‘기다려줘’를 통해 정학과 그의 딸 수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 갈등을, ‘새장 속의 친구’를 통해 같은 반 친구이자 라이벌인 하나와 수지의 다툼과 고민을 표현한다. <그날들>에서 그의 노래는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상황 또한 놓치지 않고 스토리에 대한 설득력과 몰입감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

“운명에 휩쓸려 아련하게 남은 ‘그날’”

다양한 무대 효과 역시 제작진이 특별히 신경 쓴 대목이다. <그날들>의 도입 부분은 서늘하고 울창한 숲속을 지나가는 효과를 활용해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오프닝을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영상부터 청와대 경호관으로 분한 앙상블들의 화려한 군무와 액션 등도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2019 <그날들>의 무영과 정학이 경호관으로 임명되는 장면에서 사용되는 회전무대(왼쪽)와 실 커튼을 통해 아련하게 표현되는 무영의 마지막.|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그날들>(2013) 프레스콜 영상 갈무리

특히 회전 무대와 실 커튼은 장유정 연출이 중요한 포인트로 꼽는 무대 장치다. 그녀는 무영과 정학이 사실 본인들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길을 걸었다는 걸 상징하기 위해 회전 무대를 활용했다고 한다. 무영과 정학이 어쩔 수 없이 밀려나가는 장면을 연출하고자 한 것. 여기에 실 커튼을 통해 명확하지 않고 아련하게 남아있는 결정적인 기억들을 겹겹이 쌓여져 있는 분위기를 의도했다. 이 실 커튼은 영상과 함께 비가 오는 날씨나 시간 등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정학과 무영은 동시에 그녀에 반했지만, 무영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그녀.|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사실 정학은 전형적인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주변인에 가깝다. 과거에서는 무영의 친구로, 현재에서는 사라진 하나와 대식을 찾는 경호관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들>의 제작진은 주인공으로 정학을 택했다. 작품 기저에 ‘지켜주지 못한 이에 대한 부채감, 미안함’과 그들에게 해주는 ‘위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무영도, 하나도 아닌,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정학을 통해 ‘지켜내지 못한 것’을 돌이켜 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항상 누군가를 지켜왔지만, 정작 가장 소중했던 친구와 사랑, 그리고 자신마저 지키지 못했던 정학에게, 혹은 관객석에 앉아 있을 또 다른 정학이었던 이들에게, <그날들>은 말한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스쳐가는 의미 없는 나날에 두 손 가득히 움켜쥘 수 없잖아.

뮤지컬 <그날들>
2019.02.22 ~ 2019.05.06
서울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기본가 6만 ~ 13만 원
공연 시간 165분 (중간 휴식 20분)
8세 이상 관람 가능
출연
유준상, 이필모, 엄기준, 최재웅, 오종혁, 온주완, 남우현, 윤지성, 최서연, 제이민, 서현철, 이정열, 최지호, 김산호, 박정표, 강영석 등

<올댓아트 이민지 인턴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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