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연, 특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다보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단원들이 지휘자를 별로 안쳐다보는 것 같은데.. 지휘자는 혼자 뭐하는거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최종적인 모습으로’ 관객 앞에 서게 됩니다. 관객인 우리는 무대 위에 선 그들의 단 한 번뿐인 연주를 듣게 되죠. 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 몇 차례의 리허설을 가지면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약속’ 같은 것을 하게 됩니다. 이 리허설 기간 동안 단원들과 지휘자는 서로 소통하여 ‘이 부분에서는 조금 더 느리게’라던지, ‘저 부분에서는 더 기괴한 음색으로’와 같은 음악적 약속을 하는 것이죠. 따라서 실제 공연에서는 정돈된 연주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지휘자는 그 모든 ‘약속’들을 오케스트라에 상기시키면서도, 순간순간의 감정을 즉흥적으로 가미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클래식, 왜 나는 다 똑같이 들리는 것인가…”
‘어느 지휘자가 연주하는 건 이렇고 다른 지휘자가 연주하는 건 저렇다’ 하는 이야기들이 사실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겠습니다. 무대에 오른 단원들과 지휘자의 모습만으로는 소리의 차이를 실감하기 어렵고 음색, 템포 등의 세세한 차이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 연주를 여러 번 집중해서 들어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휘자가 같은 곡을 지휘하면 정말 차이가 있는 걸까요? 물론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곡들에는 작곡가가 특정 빠르기말을 표기하여 어느 정도의 속도로 연주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라고 적혀 있어도, 얼마나 빠르게 할 것인지에 관해 각양각색의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죠. 한 음악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는 지휘자라면, 연주되는 소리도 다소 비슷해 구분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여느 지휘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포스트에서는 지휘자마다 다른 매력을 불어넣은 클래식 명곡 연주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베토벤’을 다뤄보고자 하는데요.
2019/2020 시즌에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다수 포진해있습니다. 지난 3월 29일 개막한 <통영국제음악제>도 베토벤의 ‘운명’으로 그 막을 열었죠. 살면서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으로, [클래식, 달라? 달라!] 시리즈의 첫 포스트!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808년 작곡된 교향곡 제5번 C단조 ‘운명’은 제1악장 첫머리의 운명의 동기(따다다단-)로 유명합니다. 사실 ‘운명’이라는 부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별칭은 베토벤이 이 동기에 대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표현한 것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지휘 : 존 엘리엇 가디너 경 (Sir John Eliot Gardiner)
연주 : 혁명적이고 낭만적인 오케스트라 (Orchestre Revolutionnaire et Romantique)
영국 출신의 존 엘리엇 가디너는 고(古)음악 연주에 특별한 관심을 둔 지휘자로 유명합니다. 중세시대 음악가이자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는 몬테베르디의 이름을 딴 ‘몬테베르디 관현악단’을 결성하기도 했고, 고악기로만 구성한 앙상블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트’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고음악을 연주해온 것으로 명성을 얻었죠. 가디너는 1980~83년도 캐나다 밴쿠버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독일의 도시 괴팅겐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핸델 음악제의 음악감독으로 영입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리옹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여 콘서트, 오페라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습니다.
연주는 존 엘리엇 가디너 경이 직접 창설한 오케스트라인 ‘혁명적이고 낭만적인 오케스트라’(이름이 굉장히 직관적..)가 맡았습니다. 가디너의 음악관에 따라 이 오케스트라는 작곡가가 특정 곡을 만든 당시, 실제로 사용되었던 악기로 연주하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오케스트라는 낭만 시대 음악을 주로 연주했고, 베토벤을 연주한 것은 그가 낭만주의의 포문을 연 작곡가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디너는 ‘운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영상의 연주를 들어보면, 굉장히 빠른 템포로 내달리고 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는데요. ‘따다다단- ’하는 운명의 동기는 그렇다 치고, 연이어 나오는 짧은 음들은 여타의 연주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쏜살같이 몰려드는 음들은 듣는 이로 하여금 굉장한 압도감을 느끼게 하죠. 동시에 다른 연주들에 비해 다소 ‘날카로운’ 음색이 괜히 더 움츠러들게 만드는 듯 합니다.(약간 무서움..) 이런 연주를 선호하는 누리꾼들은 ‘이렇게 빠른 템포가 곡을 열정적이고 용감하며, 생기 있게 느껴지도록 만든다’고 호감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연주에서 가디너의 특징이 돋보이는 또 다른 부분은 바로 고악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고음악을 과거 그대로 재현하고자 노력했던 그는 오늘날의 연주에서는 보기 어려운 ‘내추럴 호른’(밸브가 달린 호른이 발명되기 전, 바로크 음악에서 주로 사용됨)을 비롯한 여러 고악기를 사용하여, 더욱 향수를 자극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한편 가디너의 연주는 다른 연주들과 음이 조금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이는 베토벤 시대의 기준 음고가 현대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준 음고는 점차 조금씩 높아졌습니다. 예를 들면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헨델은 피아노 건반 네 번째 ‘라’음을 422.5Hz(헤르츠)를 기준으로 작곡했는데, 오늘날 표준음고는 440Hz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이를 반영하여 가디너는 베토벤 시대의 표준음고를 기준으로 연주했고, 오늘날 흔히 들을 수 있는 선율보다 살짝 낮게 들리는 것입니다.
■지휘 :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연주 : 빈 필하모닉 (Wiener Philharmoniker)
이번에는 비교적 느린 템포로 ‘운명’을 해석하고 있는 번스타인과 빈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어볼까요? 레너드 번스타인은 한 번 쯤 들어보았을 법한 이름의 세계적인 지휘자죠. 미국 출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레니’라는 애칭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20세기 후반의 클래식 음악 업계를 이끌었던 스타였습니다. 1943년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되며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했고, 1969년 뉴욕 필의 음악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는 빈 필, 이스라엘 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런던 심포니, 프랑스국립관현악단 등을 객원 지휘하면서 명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빈 필하모닉 또한 오랜 전통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은 오케스트라 중 한 곳입니다. 2006년, 영국 ‘그라머폰’, 독일 ‘포노포룸’ 등 유럽을 대표하는 10개 음악전문지가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선정했는데, 그 중 1위가 바로 빈 필하모닉이었죠. 한편으로 빈 필은 유서 깊은 전통을 지키기 위해 다소 보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빈 필 고유의 소리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각 단원들이 연주법 전통을 따르게 하기도 했고, 외국인과 여성 단원을 채용한 시기도 다른 악단에 비해 늦었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개방적인 면모를 갖추어 가면서, 매년 신년음악회를 개최하고 해외 공연도 활발히 진행하며 더욱 많은 대중에게 클래식의 매력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그 어느 작곡가보다도 자신이 생각했던 테마를 가장 정확한 ‘음’들로 이어가는 방법을 알았던 것 같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능을 환기한다. 형식은 단순히 음들을 부어넣기 위한 틀이 아니다. 형식의 진짜 기능은 듣는 이를 음악의 복잡한 여정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작곡가는 ‘로드맵’에 상응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음에 어떤 목적지가 있는지, 즉 이어 나오는 음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레너드 번스타인, 베토벤 교향곡 제5번에 관하여
번스타인과 빈 필하모닉은 다른 연주들보다 눈에 띄게 느린 속도로 ‘운명’을 풀어냅니다. 운명의 동기는 마치 한 음 한 음을 저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끌어올리는 듯한 느낌으로 연주되고 있죠. 여유 있는 템포로 연주되는 것을 선호하는 관객은 오히려 이런 속도에서 곡의 웅장함이 배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곡이 조금 더 진행되고 나서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느린 템포로 만들어진 웅장함이 극대화되는 것을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지휘 : 사이먼 래틀 경 (Sir Simon Rattle)
연주 : 빈 필하모닉 (Wiener Philharmoniker)
같은 오케스트라가 다른 지휘자를 만나면 어떨까요? 물론 번스타인과 사이먼 래틀이 지휘했던 시기는 달라서, 오케스트라 단원 구성은 변화가 있을테지만, 다른 악단들에 비해 연주법이나 음색을 고수하는 특징을 보이는 빈 필이라면 지휘자의 특색을 좀 더 분명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활발히 지휘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이먼 래틀. 영국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1975년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함으로써 음악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하고 로열 리버풀 필하모니, BBC 스코티시 교향악단 등을 거쳐 1999년 세계적 명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및 수석지휘자로서 무려 16년간 활동합니다. 작년이죠, 2018년 베를린 필과의 계약이 만료되고, 현재 영국의 대표적인 악단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알렸습니다.
곡은 ‘따다다단-’ 하는 리듬이 두 번 반복되면서 시작되죠. 그런데 래틀이 지휘하는 연주에서는 두 번의 리듬 사이, 그 간격이 굉장히 좁게 느껴질 정도로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템포감이 굉장히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데, 유독 이 부분만을 ‘갑작스러운’ 느낌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이 연주를 들은 어느 관객은 이런 부분에서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번스타인의 지휘로 연주된 것과는 다른 것을 느끼셨나요? 한 오케스트라도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이렇게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답니다.
■지휘 : 게르하르트 슈바르츠 (Gerard Schwarz)
연주 : 올스타 오케스트라 (All-Star Orchestra)
이번엔 게르하르트 슈바르츠와 올스타 오케스트라를 들어볼까요? 이들의 연주만이 가지는 매력은 무엇일까요?
게르하르트 슈바르츠는 지휘자이자 트럼페터로 1985년부터 2011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을 시애틀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했습니다. 미국 링컨 센터에서 개최되는 모차르트 페스티벌에서도 오랫동안 음악감독을 역임하였고, 이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로스앤젤레스 챔버 오케스트라, 뉴욕 챔버 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하였죠. 올스타 오케스트라는 게르하르트 슈바르츠가 창설한 프로젝트 관현악단입니다. 슈바르츠는 미국 내 명 오케스트라에 속한 유능 연주자들을 모집해 텔레비전 방송용, DVD 제작용 연주를 녹화하여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꾀했습니다.
도입 부분에서는 크게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듯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연주만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바로 느린 템포로 살려내는 목가적인 분위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위 영상 약 47초 ~ 1분 15초) 다른 연주들에서는 느껴보기 힘들었던 것이기도 하죠. 호른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시작되는 이 부분은 강렬한 운명의 동기 사이,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 고요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듯 들립니다.
같은 곡을 해석하는 방식은 이렇게나 다양합니다. 정해진 답은 물론 없습니다. 각자의 취향에 맞게 좋아하는 지휘자나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들으면 되는 것이죠.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일텐데요. 지휘자와 연주자 모두 정확히 박자를 세는 메트로놈이나 기계가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내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합니다. 각각의 시도가 어느 한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면, 그로써 가치 있는 것이 되겠지요. 오늘 들어본 ‘운명’ 중 가장 여러분의 마음에 다가온 연주는 어떤 것이었나요? 이번 기회로 ‘운명’과 조금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총 4악장으로 구성되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전곡을 감상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올댓아트 박찬미 인턴 allthat_ar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