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연극 ‘887’로 내한한 ‘르빠주’

올댓아트 이참슬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05.29 11:17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5.29 11:20

머릿속으로 큰 궁전을 짓고 그 안에 방을 만들어라. 각각의 방 안에는 당신의 소중한 기억들을 넣어라. 다소 영적인 의식처럼 보이는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억법 ‘기억의 궁전’(Mind Palace, Memory Palace)이다. 가장 익숙한 장소나 공간을 ‘궁전’으로 설정하고 곳곳에 외워야 할 사항을 배치해 놓았다가 기억이 필요할 때 그곳으로 들어가 기억을 꺼내 재조합시키는 것이 그 방법. 손안에 수 기가바이트의 용량과 빠른 데이터 처리 속도를 가진 저장 장치를 하나씩 들고 다니는 시대, 오늘날 ‘기억’은 과연 머릿속에 궁전까지 지어가면서 지켜야 할 가치일까.

연극 <887> 공연 장면 | Photo by Erick Labbe

태양의 서커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선택한 천재 연출가. 혁신적인 기술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현대 연극의 경계를 확장시킨 세계적인 거장. 화려한 수식어를 자랑하는 연출가 겸 배우 로베르 르빠주가 ‘기억’을 주제로 한 연극 <887>로 한국을 찾았다. 2019년 5월 27일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서 진행된 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로베르 르빠주 | LG아트센터 제공

한국에 온 소감은?
이전에도 <달의 저편> <안데르센 프로젝트> <바늘과 아편>을 통해 한국 관객에게 작품이 소개된 적 있다. 내가 소속된 엑스 마키나의 작품이 전 세계에서 공연을 하는데 한국 관객은 다른 곳보다 평균 나이가 어리다. 연극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연극 <887>은 어떤 작품인가?
<887>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일인극이다. 이번에는 작품 속 인물 뒤에 숨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겪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현상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는 작품이다. 기억의 모든 것을 탐구한다고 보면 된다. 우리의 뇌는 무엇을 기억하고, 왜 기억하는지를 담았다.

작품은 어떤 기억을 담고 있는가?
<887>은 특히 나의 어린 시절, 1960-70년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때는 내게 즐겁고 재밌으면서 동시에 아픈 기억이다. 작업을 통해 나는 기억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의 배경인 1960년대는 역사적으로도 격동적 시기였다. (내가 살던) 프랑스 문화권의 캐나다 퀘벡은 이때 정치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887>에는 나의 역사와 1960년대 캐나다가 겪었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커다란 서사에 연결한 것이다. 작품 속 사건과 인물은 모두 실제 있었던 것으로 픽션을 가미해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소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탐구함으로써 대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제목 ‘887’은 내가 실제 살았던 캐나다 퀘벡 머레이가 887번지 아파트 주소를 의미한다.

한국 관객은 퀘벡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간단히 설명해준다면?
캐나다 퀘벡은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에 따라 프랑스 문화와 영국 문화 간 내부적인 투쟁과 마찰로 이중 민족적인 문화를 갖게 되었다.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계급, 계층 간 갈등으로 인해 60년대에는 관리자 계층은 영어를, 노동자 계층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릴 적 우리 아버지도 택시 운전사로 일을 했는데 이런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나의 제1언어는 프랑스어지만 영어도 구사할 수 있다. 연극을 안에서 이런 역사, 언어와 문화의 마찰이 캐나다와 퀘벡을 한 나라로 연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연극 <887> 공연 장면 | Photo by Erick Labbe

르빠주의 작품은 시청각적 이미지가 강하다. 이번 작품에서 특히 초점을 맞춘 부분은 무엇인가?
작품을 만들 때 새로운 기술이나 이미지에 늘 열려있다. 초반에는 기술 사용에 서툴렀고, 기술적인 측면이 서사나 연기보다 전면에 나서 이야기를 잠식시키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기술의 사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887>에서는 미니 테크놀로지를 사용했다. 기술을 간소화하고 시적인 형태로 연극에 접목시켰다. 따라서, 다양한 미니어처로 ‘기억의 궁전’을 표현해냈기 때문에 인형극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음악은 어떻게 사용했는가?
기존의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쇼팽, 60년대 팝 음악을 많이 사용했다. 음악은 기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 대사도 외우기 힘들어하는 내가 어린 시절 들었던 60년대 팝 음악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음악은 기억을 작동하게 하는 장치이다. 낸시 시나트라의 ‘뱅뱅’, 어릴 적 라디오를 통해 들은 해변 음악, 클래식 등이 주요 레퍼런스가 되었다.

Nancy Sinatra - Bang Bang (1966)

르빠주는 대본, 디자인, 배우, 연출 등 1인 다역을 해내는 멀티 플레이어로도 유명하다. 작품 속에서 자기 객관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1인극은 주로 외로움을 주제로 하는데 이를 만드는 과정은 사실 외롭지 않다. 다양한 협업자들이 모든 과정을 함께하면서 끊임없이 피드백을 준다. 집단적 창작 과정이 중요하다.

연극에 여러 기술을 접목시키는 이유가 있는가?
연극은 일종의 모태 예술(Mother Art)이다. 연극은 무용,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의 형태를 품고 있다. 그러나 연극은 타장르에 비해 기술 수용이 더디다. 나는 연극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기술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만 예술가로서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 8년 전에 MIT 미디어 랩에서 진행한 연극 제작한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3분의 2 정도가 한국인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기술과 스토리텔링을 연결하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콘텐츠 홍수의 시대이다. 연극은 어떤 가치로 다가가야 미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관객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무대 위 아티스트라는 공동체과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요즘에는 넷플릭스를 통해 편하게 수많은 콘텐츠를 볼 수 있다. 공연을 보려면 차를 끌고 나와 티켓을 예매하고 아이를 맡기고…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연극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경험을 선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영상을 보는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기억’을 주제로 한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르빠주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을 것 같다. 예술가로서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한마디로 정의해본다면?
흥미로운 코멘트를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연극, 서커스,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 다양한 작업을 했는데 영화를 만든 적도 있었다. 다섯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무대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웃음) 한 영국 기자가 “로베르 르빠주는 마치 실패한 영화감독처럼 무대를 연출한다”라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는 ‘언어에 관심이 많은 예술가’로 정의하고 싶다. 여기서 언어는 단순 텍스트를 넘어 소통하는 방식을 뜻한다. 대사나 텍스트뿐만 아니라, 사운드, 이미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모든 언어가 흥미롭다.

<887>은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결국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는 기억을 잃은 듯이 살아간다. 수많은 사회적 담론이 있었지만 그것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살고 있다. 50년 전, 100년 전만 하더라도 많은 이유들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같은 실수를 하고 같은 행보를 보인다. 나는 예술의 역할이 기억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짓을 했고,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끊임없이 되살리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방지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 연극 <887>
2019.05.29 ~ 2019.06.02
서울 LG아트센터
R석 8만 원/ S석 6만 원/ A석 4만 원
공연 시간 120분
8세 이상 관람 가능
로베르 르빠주 출연

<올댓아트 이참슬 인턴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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