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미술산책 : 북한의 국장과 국기를 도안한 월북 미술가 김주경

이무경
입력2019.07.02 11:07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7.02 11:09

타원형 프레임의 맨 윗부분 중앙에는 붉은 별이 찬란한 빛살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별의 좌우로 벼이삭이 장식되어 있고, 별의 아랫부분에는 댐과 송전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맨 아래 붉은 리본으로 감싸진 부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글씨가 없다면, 그저 예쁘게 그려진 배지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 이미지입니다. 이것은 북한의 국장으로서 인공기보다 더 많이 대내외 행사에 쓰이는 북한의 국가상징물입니다.

왼쪽부터 대한민국 국장, 북한 국장, 구 소련 국장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기만큼이나 국장을 많이 사용하는 편입니다. 북한기차의 외부에도 이것을 붙여놓았고, 집단체조와 같은 행사의 중앙 배경대 맨 윗쪽에도 국기 대신 국장을 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주의 국가 국장은 주로 구 소련의 국장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타원형의 프레임을 비롯해 장식문양이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는 구 소련의 국장과 북한 국장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의 경우에는 국기인 태극기는 대부분 알고 있지만, 국장이 무엇인지를 얼른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무궁화 꽃잎 다섯 개 안에 태극문양이 있는 우리나라 국장은 정부 문서나 재외공관 건물 명패, 훈장문양과 여권표지 정도에만 쓰는 편입니다.

평양행 기차에 붙은 북한 국장 |영국 채널5 ‘마이클 페일린 인 노스코리아’ 방송 캡쳐

람홍색 인공기라고 불리는 북한국기와 함께 이 국장을 도안한 미술가는 1946년 월북한 미술가 김주경(1902~1982)입니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몰락한 양반 출신 빈농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뛰어난 머리와 주변의 도움으로 당시 최고 명문이었던 제일고보(현 경기고)에 진학합니다. 제일고보 시절 미술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고려미술원이라는 사설미술교습소에 출입하게된 김주경은 오지호, 김용준, 길진섭, 구본웅과 같은 당대의 미술인들과 교유를 시작합니다. 특히 오지호와는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원색화보집인 ‘김주경 오지호 이인화집’을 낼 정도로 절친이 되었죠.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김주경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지 못하고 도화사범과, 즉 미술 교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선택이 훗날 북한 국장을 도안하는 일을 하는 데까지 연결되었던 걸로 보입니다.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는 교원을 길러내는 도화사범과에는 순수미술 뿐 아니라 도안과 같은 교육과정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김주경 |연합아카이브

1946년 월북하기 이전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북악을 등진 풍경’(192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입니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부 특선에 입상한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왕가(李王家)가 사들여 현재까지 전하게 된 작품입니다. 정동 성공회 성당 뒤로 북악산이 멀리 보이고 왼쪽으로 나무가 서있는 원근법적으로 표현된 풍경 속으로 양산을 쓴 모던걸이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인상주의적 화풍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왠지 모르게 북한 국장과 비슷한 구도로 보이기도 하네요. 국장의 백두산과 송전탑이 이 그림의 북악산과 나무의 위치와 비슷하게 보여 기시감을 주지 않나요?

김주경, 북악을 등진 풍경(1929)

1928년 도쿄에서 귀국한 김주경은 경성여자미술학교 교사(1929~1931)를 거쳐 송도(개성)의 송도고보 교사로 부임해 1935년 초까지 근무하다가 절친인 오지호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모교인 경성제일고보와 경기중학 교사로 해방 전까지 근무합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상을 받았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문화정책에 반발해 더 이상 작품을 내지 않았고, 젊은 미술인들끼리 ‘녹향회’를 조직해 새로운 양화운동을 펼치기도 합니다.

오지호와 더불어 1938년 자비로 펴낸 우리나라 근대미술계 최초의 컬러판 화집이었던 ‘이인화집’(1938, 한성도서)은 당대에도 큰 화제가 되었지만, 현재까지도 가장 주목할 만한 근대미술자료로 평가됩니다. 이 화집에 실린 작품 중에서 그가 그린 오지호의 사생하는 모습은 그들의 우정과 함께 널리 회자되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김주경 오지호의 ‘이인화집’(1938, 한성도서)

월북한 김주경은 평양미술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이어 초대교장으로 근무하는 한편, 헌법을 제정하는 제정위원회 위원으로 국장제작을 맡을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49년에는 평양미전이 평양미술대학으로 승격하면서 학장으로 재직하다가 1959년 퇴임했습니다. 이후 평양생활을 정리하고 평강국영농장에서 생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화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대신 조선화가 북한미술의 기본으로 자리 잡자 그의 위치도 흔들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야외사생 중인 오지호의 사진(왼쪽), 김주경이 그린 ‘오지호’(1937)(오른쪽)

그런데 1978년 공화국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국기와 국장을 도안한 김주경에게 시상을 하게 됩니다. 이때 김주경을 비롯해 상을 받았던 문화계 인사들의 글을 모아 ‘은혜로운 품속에서’(문예출판사, 1978)라는 책이 출판됩니다. 이때 김주경은 ‘우리나라 국장과 국기에 깃든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947년 11월 김일성의 명령으로 국장과 국기도안을 하게 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서술했습니다.

벼이삭의 낱알을 110개로 한 이유에 대해 당시 제일 잘 자란 벼이삭에 달리는 낱알 수가 110개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 김일성의 지도로 국기와 국장에 오각별과 수풍수력발전소를 이미지화하여 넣은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서술했습니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1948년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에서 국기와 국장이 첫선 보이던 날의 감격을 감탄사를 섞어 기록했습니다.

‘빛나는 조국’ 공연 배경대의 국장

월북 이전에는 다양한 미술평론을 쓰면서 날카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던 김주경이 김일성찬양 일색의 글을 쓴 것을 보면, 북한에서는 김씨 일가에 대한 찬양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 실감납니다.

글|이무경
경향신문에서 오랫동안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필자는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석사를 마치고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에서 강의 중이다.

<이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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