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의 불빛이 일제히 꺼진 이유...거장 해롤드 프린스를 기억하다

이수진 공연칼럼니스트
입력2019.08.08 18:08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8.08 18:10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는다, 연출가 해롤드 프린스

2019년 7월 31일 저녁 7시 45분, 브로드웨이 극장가가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5분 동안 브로드웨이는 그날 세상을 떠난 거장 해롤드 프린스(Harold Prince)를 애도하며 모든 전등을 껐다. 이내 브로드웨이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춤과 노래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시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해롤드 프린스, 뮤지컬 연출가이자 제작자이자 ‘할 프린스’란 별명으로 불렸던 그가 이제 없기에.

해롤드 프린스를 추모하며 브로드웨이의 모든 간판이 꺼진 모습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골든 에이지를 이끈 창작자들인 리차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콤비가 있기 이전에 브로드웨이에는 전설적인 제작자이자, 배우, 극작가였던 조지 아봇(George Abbott)이 있었다. 1887년생인 조지 아봇은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13년부터 브로드웨이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1995년에 107살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장장 82년 동안 현역에서 일했다.

해롤드 프린스|IBDB

해롤드 프린스는 8살 때 부모가 데리고 간 셰익스피어의 연극 <시저>에서 오손 웰스의 연기를 본 후 브로드웨이를 동경하며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 믿었다. 해롤드 프린스는 열아홉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가장 유명한 제작자인 조지 아봇의 사무실에 지원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에 체격도 왜소한데다 어린 나이까지, 채용될 희망이 없었던 그는 조지 아봇에게 “일을 못한다면 돈을 주지 않아도 좋다”고 제안했다. 조용하지만 당찼던 그의 이 말이 거장 조지 아봇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한 지 한 주가 지나자 해롤드 프린스는 당시의 주급 25달러를 받으며 조지 아봇의 사무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조지 아봇은 그가 2차 대전으로 징집되어 2년간 독일 전선에 파병됐다가 돌아왔을 때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돌아왔을 때도 두 말 않고 그에게 같은 자리, 같은 책상을 내주며 제작자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해롤드 프린스가 처음으로 제작했던 작품 <파자마 게임>은 투자자를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작품의 작곡, 작사를 맡았던 제리 로스는 아직 20대였고, 그와 콤비를 결성해서 함께 작곡, 작사를 했던 리차드 아들러를 비롯해서 배우는 물론 제작자인 해롤드 프린스까지 모두가 초짜였다. 이 작품에 공동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조지 아봇이 아니었다면 비운의 천재로 불렸던 제리 로스의 뮤지컬 <파자마 게임>과 <빌어먹을 양키스>는 브로드웨이에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1955년, 1956년에 연달아 올라와 뮤지컬 작품상과 최고 제작자상, 작곡상 등을 쓸어가면서 제작자로서 해롤드 프린스의 입지를 단단하게 다져 주었다.

스승인 조지 아봇과 해롤드 프린스는 각자의 세대에서 가장 앞서가는 제작자들이었다. 연출하고 작품을 직접 썼던 조지 아봇처럼, 해롤드 프린스도 연출가의 역할을 최초의 콘셉트를 잡는 사람이자 최종 책임자라고 여겼다. 그리고 확신이 들지 않을 때조차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고 여겼다. 유명하지 않은 신인 배우들을 오디션을 통해 주연 배역에 서슴없이 기용하는 것도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수많은 배우들이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제왕적인 연출가가 아니었고 동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지만,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든 결정권자로서의 책임을 졌기에 그의 주변에는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작품에 지원했던 배우들은 오디션에서 탈락하더라도 그의 사인이 새겨진 짧은 편지를 받았다. 이 작품에 당신에게 맞는 배역이 없을 뿐, 당신의 재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1972년 영화로도 제작된 뮤지컬 <카바레>|네이버 영화

제작자로서는 첫 작품부터 토니상 작품상을 거머쥐었던 해롤드 프린스지만 연출가로서의 성공은 지난했다. 연극 (1962)부터 네 작품을 연거푸 실패하면서 그는 자신이 연출가에 맞는 사람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싱글맨>을 쓴 소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단편 <베를린 이야기>를 통해 당시 미국의 민권운동을 돌아보고 싶었던 그는 <카바레>(1966)도 흥행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뮤지컬이란 자고로 꿈과 희망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장르였다. <카바레>는 달랐다. 어둡고 진지했고 유머감각마저도 냉소적이었다. 1931년,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 있는 킷캇클럽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희망도 해피엔딩도 없이 그린 이 작품은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획기적인 작품이었고, 해롤드 프린스에게 ‘콘셉트 뮤지컬’ 연출가라는 명칭을 안겨주었다. 극장 밖에서는 흑인들과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삶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는데, 극장 안에서 그저 사랑 노래만 부르고 있을 수는 없다는 해롤드 프린스의 생각은 시대를 관통하며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냈고, 연출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작자로서는 이미 7개의 토니상을 거머쥐었던 그는 <카바레>로 최초의 토니상 연출상을 수상했다. 두 개의 공로상까지 포함해 총 21개의 토니상을 수집한 그의 기록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해롤드 프린스는 뮤지컬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곡가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라고 알려진 스티븐 손드하임과 모두 작업한 유일한 연출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둘 다 그와 함께 했을 때 창작자로서의 전성기를 맞았다. 스티븐 손드하임은 해롤드 프린스와 오랜 친구였다. 손드하임은 프린스가 제작자로 참여했고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사가로 브로드웨이에 처음 발을 디뎠다. 손드하임과 프린스는 처음 만난 날부터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극장 근처 식당에서 새벽이 오도록 그들이 만들고 싶은 뮤지컬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접점은 손드하임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였다.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1959)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작사가인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는 뮤지컬계에서는 굉장히 드문 사람이었는데, 기질적으로는 자신의 유일한 제자였던 손드하임보다 프린스와 더 비슷했다. 예민하고 감정 기복 심한 예술가들이 넘쳐나는 브로드웨이에서 해머스타인 2세와 프린스는 차분함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해롤드 프린스는 신사이면서 천재라는 양립 불가능한 기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라 칭하기도 했다.

해롤드 프린스가 연출하고 스티븐 손드하임이 곡과 가사를, 조지 퍼스가 대본을 쓴 뮤지컬 <컴퍼니>(1970)는 이전의 어떤 뮤지컬과도 달랐다. 비평가들은 새로운 뮤지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며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너무나 현대적이었던 이 작품은 사실 간신히 흑자를 낸 정도의 흥행이었고 런던 공연은 적자였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결혼하라는 종용을 받으면서 겪는 스트레스와 딜레마를 통해 현대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주인공 바비는 오지랖 넘치는 친구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으면서도 그들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이 작품은 바비를 흑인으로, 동성애자로 변주하며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운 연출가들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롤드 프린스와 스티븐 손드하임이 함께 작업한 뮤지컬 <스위니 토드>(1979)|Martha Swope

이후 이들은 잔인한 살인마의 복수극 <스위니 토드>(1979)를 올렸다. 런던의 도시전설이었던 스위니 토드에게 복수를 위한 애달픈 전사(前史)를 부여하고 살인하는 장면을 웃으면서 보게끔 만든 유머 넘치는 이 이야기는 해롤드 프린스가 연출했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이 죽어나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스티븐 손드하임과 함께 하는 동안 해롤드 프린스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모든 편견을 하나씩 격파해 나가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듯 돌진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마지막 브로드웨이 작품은 단 16회의 공연으로 막을 내린 (1981)이었다. 이후 해롤드 프린스와 스티븐 손드하임은 각자 새로운 파트너와의 항해를 시작한다. 프린스의 새로운 파트너는 <에비타>(1979)를 연출하며 연이 닿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였다.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에비타>를 쓰기 전,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던 뮤지컬 (1975)의 실패로 풀이 죽어 있었다. 해롤드 프린스는 그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고, 웨버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 상담을 시작했다. 에비타에 관한 내용이라는 얘기를 듣자 프린스는 작품을 완성하면 자신에게 가장 먼저 가져오라고 말했다. 프린스가 합류하면서 <에비타>는 웨버와 작사가 팀 라이스의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성장해 갔다. 프린스는 <에비타>를 미디어가 만들어낸 거대한 이미지의 허상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사실 그는 에비타의 실제 인생에 관객들이 관심을 돌리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이 작품 역시 성공했다. 시대를 잘 탔기 때문이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에비타>에서 해롤드 프린스가 보여주고자 했던 미디어의 폐해라는 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페라의 유령> 초연 캐스트와 해롤드 프린스, 앤드루 로이드 웨버|<오페라의 유령> 공식 트위터(@phantombway)

하지만 웨버와 프린스의 가장 놀라운 작업은 역시 <오페라의 유령>(1986)이다. 한국에서 뮤지컬의 장기 공연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했던 작품도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서는 1988년에 개막해 연극과 뮤지컬을 통틀어 가장 오래 공연된 작품으로, 2019년 올해로 31년째 공연 중이다. 해롤드 프린스는 <오페라의 유령> 30주년에 “이 작품은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는 말을 남겼다. 파리의 거대한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한 신비한 이야기에 관객들은 끝도 없이 빠져들었다. 드라마와 서스펜스, 춤과 노래, 웃음과 로맨스까지 빼곡하게 다 갖춘 이 작품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이후 아류작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해롤드 프린스는 자신의 지난 작품과 인생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한 일을 분석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연출가로서 내린 모든 결정은 본능을 따른 결정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롤드 프린스는 디테일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연출가였으며 어떤 길도 쉽게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각도와 방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에게 따져 묻는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 대답을 듣고 나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에게 있어서 극장이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공간이었다.

운의 기준을 관객들의 인정과 흥행이라고 한다면 해롤드 프린스도 항상 운이 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신의 기준대로라면 그는 운이 좋았다. 작품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침내 작품이 올라가게 되었다면 그다음은 운이다. 원하는 작업이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을 것, 언제나 감정적으로 굶주려 있을 것, 그리고 작업 초반의 어려움이 오히려 좋은 작품을 만든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그가 있었기에 브로드웨이도 운이 좋았다. 언제까지나 ‘꽃밭’에서 살다가 비평가 브룩스 앳킨슨의 말처럼 리바이벌 작품만 올리다 사라져버리는 장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롤드 프린스는 가장 보수적이고 시대와 상관없는 듯했던 무대 장르인 뮤지컬을 시대와 같은 보폭으로 걷게 했던 연출가였다.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고, 이유 없는 노래는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연출가였다. 그가 활동했던 지난 50년 만큼이나 앞으로의 50년 동안도 그가 남긴 작품들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수진 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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