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고 폰테인 탄생 100주년, 루돌프 누레예프 관련 영화 2편 개봉과 맞물려 더욱 주목
제네 국제 발레 콩쿠르는 ‘RAD’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영국 로열 댄스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Dance)가 매년 8월이나 9월 무렵 15~19세 무용수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콩쿠르다. RAD의 초대 회장이었던 덴마크 출신의 영국 발레리나 아델라인 제네(1878~1970)의 이름을 따서 1931년 설립됐다. 2000년까지는 영국 런던에서 열렸지만 2001년부터 세계 여러 도시에서 번갈아 가며 열리고 있다.
2019년 8월 20~29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올해 대회를 끝으로 콩쿠르는 내년부터 이름을 바꾼다. 바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영국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1919~1991)의 이름을 딴 ‘마고 폰테인 국제 발레 콩쿠르’. 폰테인은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이자 로열발레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RAD는 러시아의 바가노바 메소드, 이탈리아의 체케티 메소드와 함께 3대 발레 교수법으로 꼽히는 영국 RAD 메소드의 뿌리와 같은 곳이다. 2020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는 RAD에서 폰테인은 제네에 이어 2대 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폰테인이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RAD가 국제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폰테인의 이름으로 2020년 9월 처음 열리는 콩쿠르는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다.
올해 폰테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영국에서는, 제네 국제 발레 콩쿠르의 이름 변경 외에 다채로운 기념행사와 기념 공연이 펼쳐졌다. 지난 5월 케빈 오헤어 로열발레단 예술감독 등 로열발레단 관계자들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폰테인의 비석에 헌화한 것과 6월 폰테인 탄생 100주년 기념 갈라 공연에서 후배 무용수들이 폰테인의 대표작들을 다시 한번 춘 것은 대표적이다.
영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는 기념 공연까지 열리진 않더라도 폰테인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폰테인과 함께 ‘발레 역사상 최고의 콤비’를 이뤘던 루돌프 누레예프(1938~1993)에 대한 다큐멘터리 <누레예프>와 극영화 <화이트 크로우>가 최근 잇따라 개봉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발레 팬층이 두텁지 않은 한국은 해외 발레계의 흐름에 느린 데다 발레 소재 영화가 영화제가 아닌 일반 개봉으로는 보기가 어려운 탓에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참고로 그동안 누레예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많이 나왔지만, 재키 모리스-데이비스 모리스 남매가 만든 <누레예프>는 빈틈없이 만든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냉전 시대 구소련에서 서방으로의 드라마틱 한 망명, 무용수로서 전례 없는 성공과 문화적 현상이라고 부를 정도의 인기, AIDS 합병증으로 인한 이른 죽음까지 누레예프의 삶을 효과적으로 압축해서 담았다. 특히 누레예프의 삶에서 중요한 두 사람, 에릭 브룬 및 폰테인과의 관계에 초점을 뒀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러셀 말리판트가 안무한 현대적 춤이 작품 중간중간 삽입돼 독특한 매력을 더한다.
배우로도 유명한 랄프 파인즈가 감독을 맡은 <화이트 크로우>는 누레예프의 파란만장한 삶 가운데 망명을 중심으로 풀어냈다. 누레예프는 1961년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 발레단의 유럽 투어 일환으로 프랑스 파리 무대에 섰다. 관객을 매료시켰지만, 당국의 규칙을 어기고 현지인들과 어울린 그는 귀국을 명령받았다. 키로프 발레단이 런던 이동을 위해 파리의 르 부르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경찰에게 뛰어들며 영어로 “나는 여기 있고 싶어요. 자유롭고 싶어요”라며 외쳤다. 1시간도 채 안 돼 벌어진 누레예프의 망명은 냉전 시대에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해외에서 나온 기사들의 상당수는 ‘발레 역사상 최고의 콤비’로 불린 폰테인과 누레예프의 드라마틱한 삶과 특별한 관계에 대해 주목한 기사가 많았다. 다큐멘터리 <누레예프>의 경우 폰테인과 함께 누레예프를 이해하는 핵심 인물인 브룬을 다뤘지만, 폰테인 탄생 100주년과 맞물리다 보니 뒤로 밀린 모습이다. 덴마크 출신의 브룬은 누레예프가 망명할 때 서구 최고의 발레리노였으며 나중에 캐나다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누레예프의 방탕한 사생활 때문에 헤어진 뒤에도 브룬이 먼저 세상을 뜰 때까지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다.
폰테인은 ‘영국 발레의 어머니’ 니네트 드 발루아가 설립한 빅-웰스 발레단(로열 발레단의 전신)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돼 간판스타가 됐다. 발레뤼스 출신의 세라피나 아스타피에바에게 발레를 배우던 그는 1933년 발루아의 제안으로 빅-웰스 발레학교(로열 발레학교의 전신) 학생 겸 발레단 단원으로 들어왔다. 발루아는 체격조건이나 테크닉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브라질 혈통이 섞인 데서 나오는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청순함이 배어나는 폰테인을 특별히 마음에 들어 했다. 발레뤼스 출신으로 빅-웰스 발레단의 첫 번째 간판스타였던 알리시아 마르코바가 1935년 퇴단한 이후 폰테인이 발레단을 대표하게 됐다. 그리고 로열발레단 상임 안무가 프레데릭 애슈턴의 영원한 뮤즈가 됐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와 <신데렐라>의 신데렐라 등 순수하고 귀여운 여주인공은 그의 장기로 꼽혔다.
1960년 40살이 된 폰테인은 은퇴를 고려하게 됐다. 체력이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발레리나로서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파트너가 나타났다. 바로 1961년 6월 러시아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발레단의 프랑스 파리 공연 중 망명한 23살의 루돌프 누레예프(1938~1993)다. 당시 냉전 상황에서 누레예프의 망명은 지구촌을 흔든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누레예프는 망명자라는 화제성을 떠나 서구의 어떤 발레리노보다 뛰어난 재능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폰테인은 1961년 11월 자신의 자선 갈라 공연에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누레예프를 초청했다. 야심만만한 누레예프는 폰테인과 듀엣을 추길 원했다. 하지만 이미 다른 무용수가 결정돼 있어서 듀엣이 안 되자 로열발레단에서 자신만을 위한 솔로 작품을 만드는 조건으로 초청을 받아들였다. 일각에서는 폰테인이 “엄마처럼 보이는 것 아니냐”며 19살 차이 나는 누레예프와의 듀엣을 부담스러워해서 듀엣을 거절했다고도 한다. 로열발레단의 상임 안무가 프레데릭 애슈턴은 어쩔 수 없이 누레예프가 선택한 스크랴빈의 <비극적인 시>로 10분짜리 작품을 만들었다. 애슈턴으로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용수를 위해 자신이 친숙하지 않은 음악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고역이었겠지만 관객들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누레예프에 열광했다.
로열발레단 예술감독인 발루아 역시 누레예프의 재능에 매료돼 바로 이듬해 2월 <지젤>의 알브레히트 역으로 초청했다. 당시 3일간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박수가 15분이나 이어지고 20번의 커튼콜이 나올 정도로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세계 발레사에서 유명한 폰테인-누레예프 콤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폰테인은 혈기왕성한 누레예프를 만나 자신도 다시 한번 발레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됐고, 누레예프 역시 폰테인 덕분에 거칠던 동작이 다듬어지고 세련미를 갖추면서 세기의 발레리노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듬해 두 사람은 애슈턴의 신작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1961년 비비안 리가 출연한 동명 연극을 보고 감동한 애쉬튼이 폰테인을 위한 발레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데서 시작됐다. 애슈턴은 원래 누레예프를 탐탁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발루아와 폰테인이 아끼는 누레예프를 결국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은 로열발레단에서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이몬다>, <로미오와 줄리엣>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함께 췄다. 폰테인은 나이를 먹으면서 32회 푸에테를 부담스러워했었지만 누레예프와 콤비가 된 이후엔 전성기 못지않게 잘 췄다고 한다. 두 사람은 또한 전 세계에서 초청받아 갈라 공연을 다녔는데, 누레예프는 당시 서구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적>과 <라 바야데르>의 파드되를 폰테인에게 가르쳐 선보였다. 관객을 몰고 다닌 두 사람은 1960~70년대 전 세계에 발레 붐을 일으킨 일등 공신이다.
폰테인과 누레예프의 관계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파트너 이상이었다. 즉 플라토닉한 관계가 아니라 한때 사랑을 나누기도 했던 관계라는 것이다. 폰테인은 부인했지만, 누레예프는 생전에 폰테인과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누레예프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폰테인과의 관계가 성적으로 부각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누레예프도 젊은 시절엔 여러 차례 이성과 사랑을 나눴고, 폰테인과도 초반엔 연인에 가까웠다는 게 주변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폰테인이 누레예프의 아이를 유산시켰다는 로열발레단 동료들의 증언도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폰테인에게 누레예프는 의지가 되는 아들 같은 존재였다. 누레예프에게도 폰테인은 누나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사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폰테인은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상으로 꼽혔다. 그가 첫사랑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나 결혼했으며, 남편을 병간호하며 말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의 첫사랑은 파나마의 유력 정치가 집안 출신으로 변호사 겸 외교관인 티토 아리아스. 1999년 BBC의 <세기의 연인들> 시리즈는 폰테인과 아리아스의 사랑을 그리기도 했다. 폰테인은 1937년 빅-웰스 발레단의 간판 발레리나로 정부 측 인사가 주최한 파티에 갔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 왔던 아리아스에게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바람둥이였던 아리아스는 그를 스쳐 가는 상대로 여겼고, 어떤 약속도 없이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쓰라린 첫사랑을 겪은 후 그는 여러 남자를 사귀었다. 2004년 영국 작가 메레디스 데인맨이 쓴 평전 『마고 폰테인』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폰테인의 남성 편력을 드러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요조숙녀 같은 이미지와 달리 폰테인은 19살 때부터 수년간 작곡가 콘스탄트 램버트와 불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로서 인기가 높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했다. 발레단 파트너였던 로버트 헬프만, 영국의 유명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 등 여러 남자와 사귀면서 임신중절 수술을 2번이나 하기도 했다. 프랑스 안무가 롤랑 프티와는 결혼을 꿈꿀 정도로 깊은 관계였지만, 프티의 선택은 폰테인이 아닌 프랑스 무용수 지지 장메르였다.
데인맨은 폰테인의 이런 방황에 티토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티토는 폰테인과 사귀다 떠난 뒤 몇 년에 한 번씩 갑자기 나타났다가 금세 떠나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데 35살의 폰테인 앞에 티토가 다시 나타나 청혼했다.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아내와 이혼하겠다며 결혼을 밀어붙였다. 폰테인 역시 줄곧 잊지 못하던 첫사랑인 데다 대통령을 꿈꾸는 티토와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며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폰테인의 기대와 너무 달랐다. 티토는 발레를 좋아하지 않아서 아내의 공연을 보러 오지 않은 것은 물론, 끊임없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티토가 총을 맞은 것도 실상은 정적의 아내와 바람피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게다가 티토는 대통령 선거에 4번이나 나갔다가 떨어지는가 하면 성공 가능성이 없는 쿠데타를 꾀하는 등 정치적으로 늘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폰테인을 힘들게 했다.
1964년 아리아스가 피격당한 것은 부부의 삶에 있어서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폰테인은 척추가 손상돼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된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폰테인에게는 남편을 돌보는 것이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기쁨이었다. 데인맨은 평전에서 폰테인이 아리아스와의 불완전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누레예프 덕분이라고 지적했다. BBC가 2009년 데인맨의 『마고 폰테인』을 바탕으로 만든 TV 영화는 바로 폰테인과 누레예프 그리고 남편 티토 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편의 간호와 재활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것이 폰테인을 그토록 오랫동안 무대에 서게 만든 이유다. 폰테인은 1960년대 누레예프와 콤비를 이뤄 로열발레단 외에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무대에 섰다. 누레예프와 공연하는 횟수가 준 뒤에는 이반 나지와 주로 파트너를 이뤄 무대에 섰다. 그런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춤은 눈에 띄게 망가졌다. 하지만 그가 계속 무대에 서는 이유를 알고 있던 평단과 관객은 그를 비판하기보다 불쌍하게 여겼다. 누레예프는 폰테인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 적지 않은 돈을 꾸준히 보냈다.
폰테인은 정식으로 은퇴를 밝히지 않았지만 1979년 로열발레단이 주최한 탄생 60세 기념 공연이 사실상 은퇴 공연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 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프리마 발레리나 앗솔루타 최고 영예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돈이 필요했던 그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누레예프의 초청을 받아 <목신의 오후>의 님프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레이디 캐플릿 같은 조연을 연기하거나 TV의 발레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해 춤을 췄다.
파나마에서 보낸 그의 말년 역시 행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암의 일종인 골육종으로 3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서 암세포 전이를 막기 위해 다리 절단을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극소수 지인들 외엔 자신의 투병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남편이 죽고 2년 뒤인 1991년 그도 파나마에서 눈을 감았다. 영국 발레에 남긴 그의 업적 때문에 그의 유해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파나마에 있는 남편의 묘 옆에 묻히는 것을 선택했다.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