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과 독서
기나긴 연휴가 계속될 것만 같았던 한가위도 지나고, 본격적으로 높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의 유쾌함을 즐길 수 있는 계절이 됐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은 몸과 마음을 살찌우기에도 더없이 좋은 날들이 이어진다. 깜깜한 극장을 오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책 한권을 손에 들고 탁 트인 한강 공원에 앉아 읽어보면 어떨까.
공연은 장르의 특성상 월정액 같은 건 있을 수 없지만, 책은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는 월정액 서비스도 많아지고 있으니 더욱 손쉽고 부담 없이 독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늘고 있다. 물론 제일 좋은 건 푸르른 날의 도서관 나들이지만 말이다. 뮤지컬과 관련된 책이라고 하면 대개 뮤지컬의 역사나, 뮤지컬 작품들을 설명해주는 도서들이 흔하게 생각난다. 물론 이런 출판물도 좋지만, 오늘은 공연을 색다르게 만날 수 있는 책을 찾아봤다.
“국내 미발표 작품을 미리 만나볼 수 있는 책”
최근 SNS에는 뮤지컬 창작·제작진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일반 회사원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줄줄이 인증샷으로 올라오고 있다. 바로 ‘디어 에번 핸슨(Dear Evan Hansen)’이 그 것. 뮤지컬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책은 뮤지컬로 먼저 세상에 선보인 작품이다. 2017년 토니어워즈 베스트뮤지컬상, 대본상, 음악상을 포함한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 <라라랜드>와 <위대한 쇼맨>의 작사·작곡가로도 유명한 벤지 파섹과 저스틴 폴이 만든 뮤지컬이다.
벤지 파섹이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저스틴 폴과 함께 2014년 5월 리딩 공연을 시작해 이듬해 워싱턴 공연, 2016년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을 거쳐 브로드웨이에 올랐다. 전미투어, 토론토 공연을 거쳐 올 겨울에는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을 앞두고 있다.
여기에 더해 유니버설 픽쳐스에서 영화화를 계획하고 있는데, 작가 스티븐 리벤슨과 영화 <원더>의 감독이자, <미녀와 야수>의 각색에 참여했던 스티븐 크보스키가 함께 영화 시나리오를 디벨롭하며 디렉팅 방향을 조율 중에 있다. 대부분의 뮤지컬들이 책이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디어 에번 핸슨>은 뮤지컬을 원작으로 소설과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작품은 사회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아웃사이더 고등학생 에번 핸슨이 동급생이자 문제아 코너의 죽음에 우연히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에서는 말풍선 안에 대화를 넣어 마치 대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며, 시·공간의 제약이 있던 뮤지컬에서 다루지 못했던 사건과 비하인드가 펼쳐져 캐릭터들을 보다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디어 에번 핸슨’보다 2년 먼저 토니어워즈 베스트 뮤지컬상을 수상한 또 하나의 작품은 바로 <펀 홈>이다. 이 작품은 앨리슨 벡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로 먼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작가 앨리슨 벡델은 ‘펀 홈’의 이야기를 쓰고, 삽화를 그리기 위해 장장 7년의 시간을 바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는데, 2006년 ‘펀 홈’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그 결실을 보여줬다. ‘만화와 회고록의 두 장르를 새로운 방향으로 보여준 선구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각 종 영미 문학과 국제 만화 페스티벌 등 학술 출판 회의의 주제가 되기도 한 실험적인 책이다.
이처럼 초판 발간 당시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만큼, 국내에도 ‘재미난 집-어느 가족의 기묘한 이야기’라는 번역본으로 출간됐다. 그러나 소재와 주제의 이질성 때문이었을까 국내에서는 베스트셀러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차츰 잊혀 진다. 그러던 중 2015년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펀 홈>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토니어워즈를 수상하게 되자 다시금 주목받게 된다.
뮤지컬 <펀 홈>은 2009년부터 여러 극장에서 리딩 공연과 워크샵을 올리며, 2013년 퍼블릭시어터에서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을 가진다.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이 오비어워즈 등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2015년에는 브로드웨이 버전으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리사 크론의 대본과 제닌 테소리의 음악은 엘리슨 벡델의 원작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브로드웨이의 여성 파워를 보여줬다. 샘 골드의 영민한 무대 연출과 아역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도 작품의 재미를 더했지만, 2016년 9월 브로드웨이에서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미국 각 지역극장과 캐나다, 일본, 싱가폴, 스페인 등 전 세계 각지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2020년에는 호주에서도 공연될 예정.
국내에서 아직 뮤지컬로는 만나지 못했지만, 페미니즘, 젠더 이슈들이 대두되었던 2017년에 새롭게 한국어 책으로 발간되어 독립서점들을 중심으로 화제가 됐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앨리슨을 주인공으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의 인생을 추적하며 발견하는 특별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퀴어적인 소재이지만, 그 안의 담긴 부녀의 모습에서 시대와 자아에 대한 공감을 느낀다.
“고전을 즐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
뮤지컬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독서를 할 수도 있다. 독서앱 밀리의 서재는 뮤지컬 <호프>와 <안나 카레니나> 두 작품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 리딩북을 선보인 바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다룬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 <호프>의 주인공 차지연과 조형균은 카프카의 ‘변신’과 ‘소송’을 읽어준다.
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의 출연한 배우 민우혁과 유지의 목소리로 ‘안나 까레니나’를 들을 수 있다. 또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인공 김소현과 <맨오브 라만차>, <오케피>의 배우 정상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디즈니의 악당들’시리즈에 두 사람이 각각 참여했다. 작품을 통해 원작자와 교감해서일까, 배우들이 들려주는 낭독은 보다 실감을 더한다.
배우들의 목소리로 고전을 들었다면, 이번에는 뮤지컬 작곡가가 들려주는 클래식 작곡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어떨까. 뮤지컬 <뱀파이어 아더>, <붉은 정원>, <줄리 앤 폴>의 작곡가 김드리는 두 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첫 저서인 <친절한 음악책>은 음악을 즐기는 재밌는 방법들이 부담 없이 기술되어 있다. 두 번째 책 <왠지 클래식한 사람>에서는 흥부자 거슈윈, 악플에 상처받는 파가니니, 쎈 언니를 창조한 비제, 정신상담을 받은 라흐마니노프 등 클래식 작곡가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저자의 따뜻한 시선으로 만날 수 있다.
보름달이 높은 하늘을 밝히는 가을 밤, 뮤지컬 O.S.T나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다양한 방법으로 독서를 한다면 어느새 눈앞에는 나만을 위한 또 하나의 무대가 펼쳐질 것이다.
<김효정 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