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1711년(숙종 37년) 겸재 정선(1676~1759)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떠난 것 같다. 계절의 변화 속에 구룡폭포, 장안사, 삼불암 등 금강산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뿐이 아니다. 관람객들은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의 화성행차를 마치 그 시대 수행원이 된양 따라가거나 백성이 된양 구경할 수 있다. 또 1200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18세기 ‘태평성시도’ 속 특정 인물과 교감하면서 퀴즈를 맞출 수도 있다. 화려한 외벽영상(미디어파사드) 기술을 통해 경천사 10층석탑의 각 면에 담긴 갖가지 이야기들을 감상할 수도 있다. 중국과 북한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 벽화분도 마치 지금 답사하는 것처럼 둘러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함께 준비해서 20일부터 일반에 공개한 ‘디지털실감영상관’의 모습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김영준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이번에 새롭게 문을 연 디지털실감영상관은 박물관 전시공간에 실감콘텐츠 체험 공간을 본격적으로 조성한 국내 첫 번째 사례”라고 밝혔다. ‘실감콘텐츠’는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여 몰입도를 향상시키는 기술에 기반한 융합 콘텐츠를 일컫는다. 예컨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고해상도영상, 홀로그램, 외벽영상(미디어파사드) 등이다. 지난해 5세대 이동통신(5G)이 상용화한 이후 이런 ‘실감콘텐츠’는 소비자가 가장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핵심서비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지금부터 관람객들은 중앙박물관의 4곳 상설전시공간에서 실감콘텐츠를 만나볼 수 있다.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보물 제1875호) 등을 소재로 한 네 종류의 고화질 첨단영상을 폭 60m, 높이 5m의 3면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다. 또 중국과 북한에 있는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강서대묘 등 고구려 벽화무덤을 무덤 속에 실제로 들어간 것 처럼 체험할 수도 있다.
또 폭 8.5m 크기에 8K 고해상도로 구현된 ‘태평성시도’(작자미상) 작품을 보면 17~18세기로 돌아간 기분을 절로 만끽하게 된다. 그림 속 등장인물만 1200명이 넘고 수백장의 풍속화를 이은 듯 도시속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각 폭 마다 목화솜 타기, 장원급제, 화분 운반 등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평소에는 ‘접근불허’여서 더 궁금했던 박물관 수장고와 소장품을 보존 처리하는 보존과학실도 가상현실(VR) 기술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수장고를 거닐며 전시되지 않은 보물들을 볼 수 있고 유물을 직접 수리해 보는 등 몰입감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번 실감콘텐츠 체험관의 백미는 ‘경천사 10층석탑’이다. 경천사탑은 원나라 간섭기인 1348년(총목왕 4년) 원나라 황실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린 강융과 고용보 등이 세웠다. 탑의 조성에 원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동원했다. 기단부(3층)과 탑신부 1~3층 등의 ‘아(亞)자형’은 당대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라마교 형식이다. 탑의 기단부에는 사자 같은 동물과 꽃,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의 내용, 그리고 나한상이 조각돼있다.
이번에 마련된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는 낮에는 개인 휴대전화를 통해 탑 각 면에 있는 이야기, 탑을 쌓는 과정 등을 증강현실로 즐길 수 있다. 일몰 후에는 외벽영상(미디어파사드)를 통해 손오공의 모험, 석가모니불의 열반 등 석탑에 새겨진 부조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빛으로 수놓는다.
또 삼국 및 가야 시대 무덤 내부를 돌아다니고, 감은사터 동·서삼층석탑 장엄사리를 살펴보거나 청자 문양의 세계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디지털 실감 영상관’은 국립청주박물관(20일), 국립광주박물관(21일), 국립대구박물관(6월 중)에서도 순차적으로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