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예능 프로그램의 유행으로 생긴 신조어 ‘딸 바보’,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국립국어원이 개통한 국민 참여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에 따르면(그리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딸 바보’는 ‘딸 앞에서 바보가 될 정도로 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엄마나 아빠를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딸 바보’를 종종 찾아볼 수 있죠. 사실 이 표현이 2000년대 후반부터 자주 쓰여서 그렇지, 과거에도 ‘딸 바보’는 있었습니다. 음악계에도요. 특히 19세기 프랑스 클래식계에 아주 소문난 ‘딸 바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달빛’,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으로 유명한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입니다.
드뷔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상주의 작곡가입니다. 인상주의라는 표현은 미술사에서 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인상주의는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인상’에 따라 그리는 화풍을 뜻하는데요. 한때 화가를 꿈꾸기도 했던 드뷔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자신의 음악에도 이러한 인상주의 화풍을 반영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니, 그 느낌을 정형화된 틀 밖의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죠.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인 작곡 기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조성 음계, 대위법의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박자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등의 시도들을 통해서요. 드뷔시는 다분히 몽상가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 그의 작품 전반에 묻어나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자유로움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드뷔시의 상상력이 어린이의 시선으로 향한 것은 그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슈슈’가 태어나면서부터였습니다. ‘슈슈’는 그의 딸인 클로드 엠마의 애칭입니다. 슈슈는 드뷔시와 엠마 바르닥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드뷔시는 첫 아이였던 슈슈를 끔찍이도 아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수많은 여성과의 불륜으로 주변인 사이에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던 드뷔시는 이미 기혼 상태였던 엠마와의 사랑으로 다시 한번 구설수에 올랐으나,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드뷔시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드뷔시는 슈슈가 5살 되던 해, 3년에 걸쳐 작곡한 <어린이 세계(Children‘s corner, 어린이 차지라고도 함)>를 발표하며 “이 모음곡을 슈슈에게 헌정한다”고 밝혔는데요. 이 작품은 시대 흐름을 타며 출판과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린이 세계>가 출판된 19세기는 중산층 가정에 피아노를 두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소품곡들이 많이 작곡되었는데요. 슈만의 <어린이 정경>, 무소륵스키의 <어린이의 방> 등 다른 음악가의 작품이 어른의 시선에서 어린이를 묘사하거나 어린이의 피아노 교습용으로 작곡된데 반해, 드뷔시의 <어린이 세계>는 어린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을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 여타 작품과 차별적입니다. <어린이 세계>에서도 드뷔시 특유의 상상력은 빛을 발하는데요. ‘딸 바보’ 드뷔시가 음악으로 그린, 어린이가 본 세계는 어떤 느낌일까요? 6개의 곡을 영상으로 감상해보겠습니다.
■‘어린이 세계’ 감상하기
◇1곡 : 그라두스 애드 파르나수스 박사
피아노 연주를 배운 적이 있는 분이라면 ‘클레멘티’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의 소나티네 교본으로 열심히 피아노를 연습한 기억이 날 수도 있겠죠.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무치오 클레멘티는 특히 음악 교육가로도 이름을 날렸는데요. 드뷔시의 <어린이 세계> 첫 곡은 단조롭고 지겨운 클레멘티의 교본을 풍자한 ‘그라두스 애드 파르나수스 박사’입니다. 음계 구성은 단순하지만 빠른 속도로 연주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 피아노 연주를 배워본 사람들이라면 드뷔시의 이 ‘장난’에 공감하실 겁니다. 선생님이 “느리게 천천히 연주해라”라고 하시면, 혼자 연습할 때 괜히 빨리 쳐보곤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작품이죠.
◇2곡 : 짐보의 자장가
‘짐보’는 슈슈의 애착 코끼리 인형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 곡은 슈슈가 코끼리 인형을 가지고 노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인데요. 낮은 음 위주로 진행해 코끼리라는 동물의 무거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 때의 장난스러움을 곳곳의 높은 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장가’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밝거나 가볍지 않은, 꿈같은 분위기가 절로 느껴집니다.
◇3곡 : 인형을 위한 세레나데
세 번째 곡은 ‘인형을 위한 세레나데’입니다. 가볍게 춤을 추는 인형을 그리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통통 튀는, ‘예쁜’ 음감이 듣기 좋은 곡이죠. 여러 피아니스트의 <어린이 세계> 연주 중에서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것이 특히 명연으로 꼽히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인형을 위한 세레나데’ 연주의 맑은 소리와 섬세한 감정 표현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듭니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슈슈의 모습을 피아노로 재현한다면 딱 호로비츠의 연주 그 자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담으로 이 곡이 세 번째 곡이라고는 하지만 시간 상으로는 가장 먼저 쓰였다고 하네요.
◇4곡 : 눈은 춤춘다
곡의 제목을 생각하며 음악을 감상하면, 아득한 한겨울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어린이의 눈에 비친 눈발 날리는 겨울을 생각하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어린이의 눈에는 펑펑 쏟아지는 눈이 바람에 휘날려 춤추는 듯 보였겠지요. 한편 너무 많이 쏟아지는 눈은 압도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고요. 눈앞이 자욱해지는 듯한, 무언가 흐려지는 듯한 분위기는 페달링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드뷔시 못지않은 자유분방함으로 매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소개합니다.
◇5곡 : 작은 양치기
‘작은 양치기’는 <어린이 세계> 중 가장 적은 음표로 자연의 모습을 그린 곡입니다. 요즘 말로 ‘미니멀리즘’이랄까요. 화려하게 악상을 꾸미지 않고도, 악법에 얽매이지 않고도, 자유롭게, 적은 표현으로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자연’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10살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천재 음악가답죠. <어린이 세계>를 연주하는 호로비츠를 한 번만 만나기는 아쉬울 정도여서 그의 연주를 한 번 더 감상해보겠습니다. 이 곡 역시 호로비츠의 섬세한 악상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곡이니까요.
◇6곡 :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
마지막 곡인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는 다른 곡들에 비해 조금 더 잘 알려진 곡입니다. 여러 프로 피아니스트들이 사랑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고요. 제목의 ‘골리워그’는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흑인을 묘사한 어릿광대 인형입니다. 얼굴 전체가 털로 덮여 있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그려져, 훗날 흑인을 인종차별적으로 묘사했다는 비난을 받았죠. 영국의 작가 플로렌스 업튼이 <두 네덜란드 인형과 골리워그의 모험>이라는 책을 낸 후 이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그 책에 그려진 삽화의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 것이 골리워그 인형이라고 합니다.
이 곡은 드뷔시가 재즈 풍으로는 처음 작곡한 곡입니다. ‘래그타임’ 형식을 취했다고 표현하죠. ‘래그타임’이란 19세기 후반 미국 남부 재즈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시작된 반주 음악을 뜻합니다. 이 곡의 제목에 쓰인 ‘케이크워크’라는 춤의 반주 음악이 바로 ‘래그타임’인데요. 왼손은 2박자의 규칙적인 리듬을 연주하고, 오른손으로는 당김음이 있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케이크워크’라는 춤은 으쓱거리는 걸음걸이가 특징이고요. 6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이어서 제목에 얽힌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았는데요. 이제 아래 두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감상해볼까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 영상은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연주여서, 미켈란젤리의 골리워그는 조성진의 연주와 사뭇 다른 매력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는 연주자에 따라 그 느낌이 전혀 다른 대표적인 곡 중 하나인데요. 조성진의 골리워그는 슈슈 몰래 살금살금 집안을 돌아다니는 느낌이라면, 미켈란젤리의 골리워그는 당당하게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장난스러운 인형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네요.
인상주의 음악의 거장 드뷔시가 그린 <어린이 세계>,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서, 어린이의 눈으로 그린 세상을 어렴풋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는 곡들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스스로가 보는 세상에 더 큰 상상력을 더해주는 곡들이지요. 그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혹은 지금의 어린이들이 보는 ‘어린이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드뷔시처럼 상상에 빠져보면서 그의 음악을 다시 한번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사회성 제로, 여성 편력까지...나쁜 남자 ‘드뷔시’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 (정혜원 피아니스트, 올댓아트)
<올댓아트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