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우리는 새로운 세대로서 기독민주당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분명히 한 번은 헬무트 콜에게 조언을 구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현역 정치인으로서의 헬무트 콜의 시간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새 시대의 정치는 새로운 세대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1995년 8월, 40대의 앙겔라 메르켈은 베를린 근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갑자기 사냥개 한 마리가 메르켈에게 달려들어 그의 무릎을 물어뜯었다. 그날 이후로, 메르켈은 개를 피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그 기억을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KGB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푸틴의 정보력은 남달랐지만, 그는 수집한 정보를 포악하게 활용했다. 2006년 1월, 푸틴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독일 총리인 메르켈에게 개 인형을 건넸다. 그쯤에서 멈추어야 했지만, 러시아에는 푸틴에게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메르켈과 푸틴에게는 공통의 화제(話題)가 많았다. 푸틴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메르켈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70년, 동독에서 열린 러시아어 경시대회에 참가해 입상한 적이 있고, 부상으로 모스크바 여행도 다녀왔다.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러시아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 푸틴은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KGB 주재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독일어와 독일 문화에 대해 잘 알았다. 그러나 푸틴은 메르켈에게 완전히 엇박자를 내고야 만다. 2007년 1월, 러시아 흑해 연안의 대통령 별장에서 푸틴과 메르켈은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회의실 안으로 푸틴의 반려견이 뛰어 들어왔다. 큰 개 한 마리가 메르켈 주위를 돌다가 그의 발을 핥았다. 메르켈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푸틴은 “난 그저 내 개를 보여주면서 그녀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반대로 메르켈은 꼭 필요한 말만 정확하게 했다. 베를린 회담 장소에 늦게 도착한 푸틴에게 앞으로는 지각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정치적 판단을 내릴 때에도 개인적인 감정을 섞지 않았다. 2008년 4월, 미국은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메르켈은 힐러리 클린턴과 콘돌리자 라이스, 버락 오바마와 조지 W 부시와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독일이 미국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역시 메르켈은 남달랐다. 그는 미국에 저항했다. 국제질서의 균형을 잡으며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는 독일이 누구의 위에도 누구의 아래에도 있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딱 맞는 위치를 찾고 다른 나라들의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제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조지아의 힘을 키워 러시아 남쪽 국경의 보루로 삼고, 중앙아시아로 가는 관문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저의를 메르켈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푸틴은 메르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지만, 푸틴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메르켈의 외교 정치는 국제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메르켈은 조용하고 우아한 방식으로 푸틴을 이긴 것이다.
메르켈은 정치를 시작한 이래 싸움을 회피한 적이 없다. “치고받는 정치 싸움이 재미있었고 상대의 묘책을 눈치 챘을 때 기분이 좋았다.” 정치 행위의 목표도 분명했다. 메르켈은 단 한 번도 권력의 기능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나는 마치 권력이 본래 가질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싫습니다. 권력의 반대는 힘이 없는 것, 바로 무기력입니다. 실천에 옮길 수 없다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메르켈은 이기기 위해 항상 오래 생각했다. 발달장애를 겪었던 어린 시절에 이미 정치인으로서의 훈련을 혹독하게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뛰거나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었던 메르켈은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후에야 움직였다. “위험을 재볼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는 절대 출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돌이킬 수 없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수록, “올바른” 해법을 찾고자 했다. 1999년 메르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1999년 11월4일, 기독민주연합당(CDU) 재정국장 발터 라이슬러 키프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수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91년 발터 라이슬러 키프가 군수업체 티센의 무기 중개상에게서 100만마르크 상당의 기부금을 받아 비밀계좌에 입금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기독민주연합당의 불법 정치자금 모금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독일 통일을 이끌었던 헬무트 콜 전 총리도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콜은 1990년대에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금품 제공자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기독민주연합당의 추락은 가속화되고 있었지만, 누구도 사태 수습을 위해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결국, 메르켈이 해법을 내놓았다. “당은 이제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콜 총리를 위시한 기독민주연합당의 주류 세력들이 정치권에서 완전히 물러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쉽게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메르켈과 콜 총리의 인연은 특별했다. 시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독에서 물리학자로 근무하다
통일 후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
콜 총리에 의해 장관으로 발탁
발군의 정책 추진 실력을 펼쳐
1989년, 메르켈은 동독의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물리화학연구소에서 양자역학 연구원으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거짓말 같은 소식을 듣고 메르켈은 역사적인 현장으로 향했다. 그는 서베를린의 중심가를 한참 걷다가 동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다. 장벽이 무너진 베를린 시내를 걸으면서 메르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는 얼마 후 물리학자의 삶을 정리하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다. 36세의 정치 신인 메르켈은 1990년 정치단체인 ‘민주주의의 출발’(DA)의 대변인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기독민주연합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메르켈은 콜 총리를 만난다. 그의 제안으로 1990년 12월2일 실시된 통일독일 연방의회 선거에 기독민주연합당 소속으로 출마한 메르켈은 48.5%의 지지율을 얻어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메르켈의 의정 활동을 눈여겨본 콜 총리는 1991년 메르켈을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동독 출신의 37세 최연소 여성 장관은 환영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을 ‘구색 맞추기’라고 이미 멋대로 단정지었더군요. 굉장히 화가 났죠.” 메르켈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배타적이었던 공무원들조차 결국엔 “그에게는 집중력과 지성, 핵심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발군의 실력을 펼친 메르켈은 1994년에는 환경부 장관으로 취임해 1998년까지 국정 전반에 걸친 현안을 익혔다. 8년 동안 장관으로 재임하며 메르켈은 콜 총리의 “정치적 양녀(養女)”로 불렸다. 1991년 저질러진 정치 비자금 사건에 메르켈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지만, 여전히 메르켈과 콜 총리를 묶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뒤늦게 사건이 불거진 1999년 메르켈은 기독민주연합당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새천년이 시작되기 전에 메르켈은 입장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기민련의 비자금 사건 불거지자
배신자라는 비난 감수하고
콜 총리 비판하며 기득권 해체
당 대표 선출되며 인지도 높여
메르켈은 1999년 12월22일 실명으로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콜 총리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기부금 제공자를 밝힐 수 없다는 콜 총리의 말은 법에 위배되는 사건의 경우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메르켈이 콜에게 “공개 결별서”를 보낸 것에 불과하다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배신자라는 비난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독일 보수정당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내놓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썼다. 기득권 세력을 해체하고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한다면 당의 존재 자체가 위태롭다는 메르켈의 주장이 점차 당 안팎에서 설득력을 얻어나갔다.
2000년 4월 열린 기독민주연합당 전당대회에서 메르켈은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정치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메르켈은 하원의원, 장관, 당 사무총장을 거쳐 당 대표로 성장했다. 그러나 메르켈의 마음은 무거웠다.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사임하게 된 전직 당 대표가 메르켈이 당 대표에 취임하기 불과 두 달 전에 “기민련은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성공을 거두고 나면 어떤 두려움이 생기지요. 행운 뒤에는 불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많은 행운이 다가오고 좋은 시절을 누릴 때면 그 후에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요.” 메르켈은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절제를 익혀야만 했다.
총리 취임 이후 4연임에 성공
미국·러시아의 패권다툼 가운데
국제 질서의 균형 잡는 역할로
전 세계에 정치적 영향력 행사
동독 출신의 젊은 여성 정치인이 등장했을 때, 세상은 더없이 매몰찼다. “가련한 여자” “콜의 영원한 사춘기 소녀” “자식이 없어 책임감도 없는 여자” “차가운 여성 물리학자” “촌스러운 여성 정치인” 등과 같은 낙인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졌지만, 메르켈은 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신뢰를 쌓아갔다. 비결은 단순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 행운도 메르켈을 지켰다. 당 대표로 5년 동안 실력을 검증받으며 인지도를 높인 메르켈은 2005년 총리직에 도전한다.
메르켈의 경쟁자는 당시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그는 탁월한 연설 능력과 뛰어난 직관력으로 독일 사민당(SPD)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어렵게 대학에 입학해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어온 슈뢰더는 물리학 박사 출신의 메르켈을 무시했다. 2005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슈뢰더는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정부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선거 하루 전날에는 “사민당이 있는 한 메르켈이 근소한 표차라도 결코 총리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예언”했다. 메르켈은 슈뢰더의 말을 듣기만 했다. 선택은 독일 국민들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05년 11월22일,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 총리에 취임했다. 그리고 4연임에 성공해 2020년 현재까지 독일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그의 권력 의지는 세상을 안심시킨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 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