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나는 ‘혼명’하러 남산에 간다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6.26 11:11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6.26 11:20

■ <명상 Mindfulness>

혼밥, 혼술, …. 지난 몇 년간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진 트렌드 중 하나입니다. 말 그대로 ‘혼자 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행위죠. 최근에는 ‘혼자, 외로운’을 의미하는 형용사(alone)에 사람(er)을 붙여 파생된 말인 ‘얼로너’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습니다. 자발적으로 혼자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 봅니다. 혼자라고 자신했던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진짜 혼자였을까요? 물론 온 마음으로 그 시간을 누린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휴대전화에 의지하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혹은 잡념으로 채워진 시끄러운 머릿속을 탓하며 여유를 저당 잡힌 분들도 있을 겁니다.

<명상> 전시가 진행 중인 서울 남산에 위치한 피크닉. |올댓아트 김지윤

지금부터 소개해드리는 <명상>은 후자의 분들께 추천해드리는 전시입니다. ‘명상’이라는 단어에 특정 종교를 떠올리거나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선다면, 그 생각, 잠시 접어두어도 좋습니다.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아무런 왜곡 없는 순수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초월이라 하며 이를 실천하려는 것을 명상이라 한다, 라는 사전적 의미에 더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전시는 우울, 불안, 중독 등 현대인이 겪는 여러 심리적 장애들을 치유하게 하는 명상의 힘을 회화, 영상, 공간디자인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증명해 보입니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지, 수행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행복하고 유의미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여러 의문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미야지마 타츠오 ‘다섯 개의 마주하는 원’ |피크닉

가장 먼저 만나는 예술가는 차웨이 차이와 미야지마 타츠오입니다. 두 작가는 ‘죽음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주제로 각기 다른 공간을 채웠습니다. 가장 적극적인 삶의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삶 속으로 불러들일 때 이뤄집니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이 아닌 그 일부이며, 통과하는 과정이죠. 죽음의 불가피성과 불가역성은 여러 종교와 사상에서 영적 수행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불교의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은 두 작가는 현생과 사후세계, 그 사이의 중간계, 윤회와 공(空)에 관한 통찰을 표현했습니다.

이중 미야지마 타츠오의 ‘다섯 개의 마주하는 원’은 1천 개의 디지털 카운터로 구성된 다섯 개의 원을 통해 인간의 운명적 조건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원들이 여러 대륙으로 연결된 삶의 공간이라면 그 원을 이루는 숫자들은 규칙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서로 다른 속도로 달려가는 숫자판 유닛은 인종, 종교, 언어, 문화 등 인간의 삶이 다양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졌으나, 그 흐름만큼은 주관적이라는 ‘시간의 상대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모든 카운터는 숫자 0을 표시하지 않고 그 시간 동안 불빛이 꺼지도록 설정돼 있는데, 이는 죽음이 그저 삶의 순환고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박서보X원 오브 제로의 작품 ‘원 오브 제로’ | 피크닉

이어 1층에서는 거장 박서보 작가와 신인 원 오브 제로가 함께 한 작업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단색화 열풍을 일으킨 박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상미술의 대가입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묘법’은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실현하는 독창적인 작업 방식으로도 유명한데요. 물을 머금은 종이 위를 뾰족한 도구로 수없이 긁어내다가 종이의 물성과 긋는 행위가 합일하는 순간 마침내 묘법의 완전한 형태가 드러납니다. 반복된 노동으로 생긴 일련의 형태들은 멀리서 보면 줄무늬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잘 갈린 밭고랑을 떠오르게 합니다. 마치 ‘수행’의 과정처럼 말이죠.

희끄무레하거나 거무스레한 색을 고집하던 작가는 2000년 이후 색채를 과감하게 도입하게 됐는데, 이는 새빨간 단풍이 바람에 따라 색을 바꾸는 모습에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번에 소개된 작품들 역시 붉은빛을 띱니다.

또 박 작가는 작품의 한 부분에 남겨지는 작은 여백 공간을 ‘숨 쉬는 창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원 오브제로는 이런 작가의 뜻을 살려 그림에 다다르는 짧은 길이 보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산책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간으로 기획했습니다.

‘수행’의 시간은 2층에서 마주하는 자오싱 아서 리우의 ‘순례자의 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7년 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지내던 작가는 불교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는 것을 계기로 수년 뒤 티베트 서부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라사에서 출발해 티베트고원, 에베레스트를 지나는 대장정이었죠. 그리고 그 속에는 카일라시 주변을 걷는 순례가 포함됐는데, 작가는 이 4일을 영상으로 남겼습니다.

작품의 또 다른 제목이기도 한 ‘코라’는 순례 혹은 명상을 뜻하는 티베트 불교 용어로, 사원이나 탑, 높은 산봉우리 등 신성한 장소 주변을 돌면서 이뤄지는 수행을 일컫습니다. 영상 속 1인칭 시점의 카메라는 산소가 희박한 고도에서의 험난한 순례자의 발걸음과 시시각각 모습이 바뀌는 산야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작가는 비현실적인 풍경과 체력적인 한계 속에서 오히려 명료한 해답을 체험했으며 이를 통해 진정한 순례의 의미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마 스페이스 ‘느리게 걷기’| 피크닉

영상이 상영되는 벽을 등지고 돌아서면 문 하나가 있습니다. 이 문을 열면 ‘알아차린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설치된 오마 스페이스의 ‘느리게 걷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의 시선과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00제곱 미터 공간에 펼쳐진 원형의 설치물 ‘느리게 걷기’는 탑 주변을 느리게 도는 선불교 승려들의 걸음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습니다. 관람객들 역시 이중 나선형의 경로를 따라 중심부로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는데요.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앞 사람과 시간차를 두고 걷다 보면 마치 이 공간에 혼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와 걸음마다 달라지는 발바닥의 촉감 또한 생경한 경험입니다.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와 마르코 바로티 ‘숨 쉬는 공간’ | 피크닉

이어지는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와 마르코 바로티가 협업한 ‘숨 쉬는 공간’은 역동적인 구조와 몰입형 사운드 디자인을 결합한 움직이는 인스톨레이션입니다. 때때로 너무 익숙해져 의식하지 못하는 호흡의 양상을 신체 바깥에서 경험하도록 한 작품인데요. 네 대의 환풍기는 인간의 폐 활동 법칙에 맞춰 벽체의 움직임과 사운드 매트릭스의 역학을 조정합니다. 이 공간에서는 ‘숨 막히는’ 혹은 ‘속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데이비드 린치와 테트아테트의 ‘막이 오르다’ | 피크닉

2층 마지막 공간에서는 데이비드 린치와 테트아테트의 ‘막이 오르다’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컬트의 제왕’이라 불리는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는 1973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초월 명상을 실천해 왔다고 합니다. 의식을 무한히 확장하고 자기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통해 잠재돼 있던 상상력과 아이디어, 지혜와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패브리커 ‘공간’ | 피크닉

3층에서는 김동규, 김성조로 이뤄진 아티스트 그룹 패브리커의 ‘공간’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경험해 볼 수 있다’고 표현한 까닭은, 말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패브리커의 ‘공간’은 우리의 ‘의식 공간’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바꿔주는 작품입니다. 두 작가는 인간의 인식 체계는 고요한 침묵 상태로 접근해갈수록 증폭한다고 봤습니다. 일상의 잡념과 소음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다 보면 깊은 의식 세계로 향하게 되고, 자연히 초월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담아 말이죠. 이 공간에서는 인체에 무해한 스모그가 뿜어져 나오고 일정 시간 암흑 상태가 유지됩니다.

전시를 기획한 김범상 디렉터 역시 “명상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효과적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잠재된 창의성을 무한히 발휘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는 구글이나 애플 같은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오래전부터 직원들을 위한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에필로그 공간인 루프탑. 전시장 내부는 사진 및 영상 촬영이 금지돼 있다. |올댓아트 김지윤

명상의 마무리는 무위의 시간이다 |올댓아트 김지윤

끝으로 전시의 에필로그로 마련된 4층의 공간은 명상의 여운을 즐기는 휴식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주문한 따뜻한 차 한 잔을 음미하며, 벽 한 귀퉁이에 적혀있는 문구를 그대로 따라 실천해 봐도 좋을 듯싶습니다.

“발전과 성취가 중요한 현대인의 삶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시간은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잠시 멈춰서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보는 시간, 명상의 체험은 이후의 삶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온다. 하루의 아주 작은 부분, 단 몇 분이라도 모든 행위에 대한 가속을 잠시 멈추어 본다.”

한편, 이번 전시는 명상을 즐기고자 하는 전시 취지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관람객 간의 불필요한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100% 사전 예약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관람을 위해서는 예매 페이지를 통해 방문 날짜와 시간을 지정해야 합니다.

■ <명상 Mindfulness>
2020.4.24~2020.9.27
11:00 ~ 19:00
월요일 휴관
서울 중구 피크닉
(퇴계로6가길 30)
1만5천원
차웨이 차이, 미야지마 타츠오, 박서보, 원 오브 제로 , 자오싱 아서 리우 , 오마 스페이스 ,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 , 마르코 바로티 , 테트아테트, 데이비드 린치 ,패브리커, 서승모 참여

자료 및 사진 |피크닉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기자>

전시 기사 더보기

이런 기사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