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만 읽고 고통이 예정된 영화라고 생각했다. ‘29세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69세 여성 효정, 법도 세상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쓴 약을 삼킨다는 심정으로 시사회를 찾았다. 효정의 묵묵한 걸음과 함께 흘러간 100분의 러닝타임, 그 끝엔 뜻밖에 햇살이 있었다. 용기와 연대가, 봄볕 같은 희망이 있었다. 어둠에서 시작해 빛으로 끝나는 영화, <69세>의 임선애 감독(42)을 지난 1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영화를 준비하며 성폭력을 다룬 작품들을 찾아봤어요.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 중에서도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 불편한 장면들이 많았죠. 성폭력 사건을 리얼하게 재현한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2차 가해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는 장면은 만들지 말자. 영화를 만들며 세운 가장 큰 원칙입니다.”
임 감독의 말 대로 영화는 성폭력 사건을 재현하지 않는다. 영화는 암전된 화면으로 시작된다. 어둠 속에서 노인 여성 환자에게 추근대는 젊은 남성 치료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지는 불안한 침묵과 공백. 마침내 퇴원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온 효정(예수정)의 모습이 등장한다. 수영장에 가고 집안일을 한다. 동거인 동인(기주봉)과 장을 보고 식사를 한다. 그러다 문득 말한다. “신고를 해야겠어요.” 낯선 결심이 선다.
임 감독은 이같은 담담한 연출엔 효정 역을 연기한 배우 예수정(65)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효정은 이런 일을 겪었다고 울거나 축 쳐져 있지 않을 것 같다고요. 60년 넘게 살며 이보다 더한 시련도 견뎌왔음 직한 인물이기에, 감정을 누르는 데 익숙하죠.”
다른 영화였다면 응당 생략됐을 장면들이 이어진다. 동인과 경찰서 민원실을 찾은 효정은 번호표를 뽑고 한참 기다린다. 시답지 않은 잡담을 나눈다. 겨우 차례가 됐는데 서류를 써야 한단다. 서류 작성대로 돌아가 예시로 나붙은 강간죄 고소장을 본다. 조용히 빈칸을 채운다. 효정은 고소를 결심한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을 지독히도 일상적인 수순을 밟는다. 노인 여성을 ‘여성’으로도 ‘성폭력 피해자’로도 간주하지 않는 사회적 편견은 그렇게 비틀린다.
“2013년 우연히 노인 여성 대상 성범죄 관련 칼럼을 읽었어요. 그때만 해도 아주 드문 사건, 나와는 별개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죠.” 임 감독은 ‘노인 여성은 이들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가해자의 타깃이 된다’는 칼럼 내용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찾아보니 노인 대상 성폭력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더라고요. 제 또래를 비롯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이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에 노출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성으로 살며 피할 수 없는 문제라면, 도전하고 싶었어요. 아직까지 남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에 관심이 갔던 것도 있고요.”
임 감독은 그렇게 국·내외 통틀어 전례를 찾기 힘든 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장편 영화 <69세>는 그렇게 시작됐다. 2002년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 <왕의 남자>(2005),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4), <사바하>(2019) 등 상업영화 스토리보드 작가로 활동해 온 이력 끝에 그는 비로소 ‘영화 감독’이 됐다.
“피해자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고민했던 지점이에요.”
답을 찾아 헤매는 임 감독에게 길을 내어준 것은 이번에도 예수정이었다. 그는 임 감독에게 “60대 여성에게 성폭력 피해는 수치심 보다는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예수정과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시나리오를 5번 더 새로 고쳐 썼다. 이야기는 확장됐고 인물은 또렷해졌다. “두 노인, 효정과 동인이 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가라앉게 하지 않고 다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굉장히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야 했죠.”
“친절이 과했네.” 경찰은 20대 남성의 가해를 ‘친절’이라 비웃는다. “조심 좀 하시지.” 효정의 피해를 들은 지인은 이렇게 말한다. 노인 혐오와 여성 혐오 한복판에서 효정의 존엄은 끊임없이 훼손된다. 영화는 그 훼손을 그저 수용하지 않는다. 동인은 경찰에게 ‘2차 가해’를 언급하며 거칠게 항의하고, 효정은 지인에게 “뭘 어떻게 조심하냐”며 매섭게 일갈한다. 동인의 지지 속에서 효정의 걸음은 점차 단단해진다. 임 감독의 표현대로 “피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까지 기꺼이 나아간다. “효정은 자신과 피해를 입은 이들, 이 사회의 여성과 약자들의 피해가 더이상 묵인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렵게 용기를 낸 거죠.”
임 감독은 ‘실격당한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히 선호하는 이유가 있을까. “한 인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걸 좋아해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스테레오 타입으로만 등장하잖아요. 예를 들어 노인 여성은 억세고 거칠거나, 성적으로 희화화된 모습이 대부분이죠. 그 편견 너머, 온전한 한 사람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약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효정만의 고유한 69년 인생이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20일 개봉. 100분.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