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마산이었지만 지금은 경남 창원시 합포구로 행정지명이 바뀐 ‘월영대’를 얼마 전에 찾았다.
그곳에는 통일신라말 대문장가인 최치원(857~?)이 ‘월영대’라는 친필 글씨를 대자로 새긴 것으로 유명한 2m가 넘는 각석이 우뚝 서있다. 최치원이 가야산에 입산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머물러 ‘노닐며’ 대를 쌓아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서깊은 곳이다.
■고려·조선문인의 순례성지
‘아득히 푸른 물결 위에 우뚝 솟은 바위…달빛만 공연히 해문을 비치며 배회하네’.
‘…달 그림자는 몇 번이나 이지러졌다가 다시 찼던가. 구름 자취는 영구히 가고 다시 온 적 없어라’.
고려 중기 문인인 정지상(?~1135)과 김극기(생몰년 미상)의 시가 월영대의 운치를 한껏 높여준다. 그러나 솔직히 필자의 첫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월영대 각석과, 그를 위해 조성한 누각 한채가 주변의 빌딩숲과 도로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바위가 푸른 물결 위에 솟아있다는 거며, 또 무슨 달빛이 해문을 비춘다는 말인가. 이날 필자를 답사 지도한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월영대 앞 사거리를 가리키면서 “예전에는 저 앞까지 해변이었는데, 계속된 간척 사업으로 지금은 뭍으로 변했다”고 설명해준다.
필자는 ‘월영대’ 대자 글씨 옆에 작은 명문들이 새겨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지난 4년간 판독하느라 동분서주한 박관장의 귀한 연구결과를 들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 자흔만 희미한 글자를 읽어내는 연구자의 손길에서 열정, 그리고 그 열정 속에서 배어나는 희열을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월영대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재미있는 시사점을 찾았다. 지금은 빌딩 숲과 도로로 둘러싸인 이 월영대가 고려시대부터 문인·현사들이 순례성지였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정지상·김극기·안축(1282~1348) 등 고려는 물론이고 이황(1501~1570)·허목(1595~1682) 등 조선조 문인·학자들까지 모두 13명의 월영대 답사시가 <여지승람>과 <동문선> 등에 실려있다.
■그림에서 사라진 동자승
필자는 이 즈음 ‘최치원의 진영(초상화)’을 다룬 논문(‘비파괴 분석을 통한 최치원의 진영의 도상과 채색연구’)이 수록된 학술지(<박물관 보존과학> 24집, 국립중앙박물관, 2020)를 받아보았다.
논문에 실린 초상화는 경주 최씨 문중의 소유이고, 지금은 국립진주박물관이 위탁관리중인 ‘운암영당고운선생 진영’(경남 유형문화재 187호)이다. 의자에 앉아 화면 왼쪽을 응시하고 있는 전신상의 최치원을 그렸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는 서책을 쌓아놓고, 왼편에는 붓꽂이와 향로가 놓인 사방탁자를, 그 뒷 편에는 붓 받침을 표현했다.
그런데 2009년 국립진주박물관의 X선 촬영결과 이 영정의 제작시기·장소를 알리는 화기(畵記)와 함께 매우 흥미로운 ‘숨은 그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이 진영에서 ‘1793년(정조 17년) 경남 하동의 쌍계사에서 제작된 사실을 증거하는 명문(乾隆五十八年癸丑正月日·건륭 58년 계축 정월)’이 보인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최치원의 양 옆 덧칠된 부분에 각 1명씩의 동자승이 그려져 있었다. 왼쪽 동자승은 반신상이었고, 오른쪽 동자승은 손을 턱까지 들어올려 공양하는 동자의 전신상이었다.
곽홍인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에 2009년 밝혀진 내용을 토대로 덧칠부분의 채색재료를 살펴보았더니 덧칠 전의 동자승 및 화기 부분과, 원래 최치원 초상에 사용했던 채색안료가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1793년 이 초상화를 제작할 때는 분명히 존재했을 화기와 두 동자승 그림을 덧칠해서 없애버렸다는 뜻이다. 덧칠부분에는 책과 붓받침을 그려놓았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훼손한 것이 분명하다.
1793년 제작 당시의 최치원 진영은 동자들이 좌우에서 공양하는 신선과 같은 모습을 표현한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책을 베개로 삼고 풍월을 읊었으며, 급기야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했다”는 <삼국사기> ‘열전·최치원’ 기록과 “어느날 아침 갓과 신발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갔다”는 <고운집> 등의 내용을 토대로 신선이 된 최치원을 표현했을 것이다.
쌍계사에 봉안됐던 이 진영은 1825년(순조 25년) 조성된 화개 금천사(琴川祠)를 거쳐 1868년(고종 5년) 서원철폐 때 하동향교로 이동했고, 1924년 최씨 문중이 관리하는 운암 영당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누군가 동자승과 화기부분을 덧칠했을 것이다. 덧칠 부분에 책과 붓받침을 그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유불도 삼교 통합이 풍류
그렇다면 누가, 왜 최치원 진영을 훼손했을까. 조선시대 내내 불었던 억불숭유 정책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겠다. 많은 사찰들이 폐쇄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사찰도 종종 유생들의 습격을 받아 훼손되기도 했다. 게다가 최치원은 ‘동방의 문종(文宗·문장과 문학의 비조)’으로써 문묘(공자 사당)에 배향된 인물이었다.
그런 분이 사찰의 벽에, 그것도 동자승의 공양을 받는 신선으로 그려져 있었으니 유생들의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모르긴몰라도 최치원 진영이 곱게 쌍계사의 품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다. 최치원 진영을 옮겨서 사당(금천사)을 만들어 모시는 과정에서 화기를 비롯한 좌우 동자 위에 책과 붓 받침을 덧칠해서 그려 유학자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짙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유학자이면서, 엄연히 문묘(공자사당)에 배향까지 됐고, 숱한 문인·현사들이 그 발자취를 더듬으며 추모했던 최치원, 그의 영정이 왜 사찰 벽에 걸렸던 것일까. 불교라면 이를 갈았던 조선시대 풍토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한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이 있다. 최치원만큼 유·불·도 3교에서 두루 추앙받는 역대 인물은 없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진흥왕조에는 최치원이 지었다는 ‘난랑비서(화랑 난랑을 위해 세운 비석, 전하지는 않는다)’가 인용되어 있는데 거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이른다. 이는 삼교(유교·불교·도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예컨대 안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無爲)로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본뜻이며, 갖가지 악을 행하지 말고 갖가지 선을 받드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이다”.
이렇게 최치원은 유·불·선을 모두 섭렵한 인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고려·조선의 문인들은 “동방의 문장과 문사는 모두 최치원부터 시작됐다”고 칭송했다. 불가에서는 어떤가. 최치원이 찬술한 ‘사산비명’, 즉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국보 8호)과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명(국보 47호), 경주 숭복사비명,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명(국보 315호) 등을 읽었다. 도가에서도 최치원을 도맥의 수장으로 여겨왔다.
■최치원 정체성 논란
그래서일까. 최치원은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서 정체성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는 것이었다. 물론 최치원 자신이 ‘유문말학(儒門末學)’이나 ‘부유(腐儒)’으로 표현했으니 기본적인 입장은 유학인 것은 분명하다. 최치원은 1020년(현종 11년) 문묘(공자 사당)에 배향되고, 3년 뒤인 1023년(현종 14년) 문창후로 추증됨으로써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고려왕조가 최치원을 대접해준 이유는 뭘까. <삼국사기> ‘열전·최치원’조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나라를 일으킬 때 최치원이 ‘계림(신라)은 황엽(黃葉·누런잎)이고 곡령(鵠嶺·개경)은 청송(靑松·푸른 솔)’이라는 글을 보내고 고려의 건국을 몰래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림황엽, 곡령청송’ 기사는 대체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부정됐다. 고려 현종이 건국의 합리성을 부각시키고, 거란의 잇단 침입(993·1010·1018년)으로 발생한 사회혼란을 잠재우려고 죽은 최치원을 이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만큼 최치원의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먼저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특히 황소의 난(875~884) 때 토벌에 나선 도통사 고변 휘하의 종사관 신분으로 지은 ‘격황소서’는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오죽하면 격문을 읽던 황소가 “천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 속의 귀신까지도 가만히 베어 죽이려고 의론하리라(不惟天之人皆思顯戮 兼恐地中之鬼已議陰誅)”는 구절에서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을까(<삼국사기> ‘열전·최치원’).
885년(헌강왕 11년) 귀국할 때 중국 지인인 고운(?~894)은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다”고 극찬하면서 최치원을 ‘신선국에서 온 신선’이라고 치켜세웠다.(<동국이상국집>) 또 일본의 오에노 고레토키(大江維時·888~963)가 엮은 ‘천재가구(天載佳句)’에도 최치원의 연구가 9구나 수록됐다. 그만큼 최치원은 그 시대부터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이규보(1168∼1241)는 “최치원은 문학하는 선비로 “파천황의 공이 있어 학자들이 그를 종(宗)으로 삼는다”(<동국이상국집>)고 했다. 고려 현종 이후 문묘(공자사당)에 배향된 최치원은 문창후의 작위까지 받으며 설총(655~?·홍유후)과 함께 ‘유종(儒宗·유학의 비조)’으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문묘(공자사당)에서 최치원·설총은 공문 10철 70제자 등과 함께 배향됐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유학자로서의 업적을 국가가 공인해준다는 뜻이다. 성균관과 전국 330곳 고을의 문묘에서 일정한 절차에 따라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유학자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부처에 아첨한 영불지인
그러나 조선조들어 최치원 등의 문묘배향은 끊임없이 시비의 대상이 된다.
도학자들이 최치원을 두고 ‘영불지인(녕佛之人·불교에 아첨한 사람)이라는 평과 더불어 문묘배향의 부적격자로 몰아붙였다. 898~908년 사이 해인사에 머물며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같은 고승들의 전기 등 다수의 불교관련 저술활동을 벌였고, ‘사산비명’까지 썼으니 성리학자들의 시각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최치원 무리는 문장만 숭상하고 부처에게 몹시 아첨하였다. 그의 불교 관련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서 아주 끊어 버리고 싶었다. 그를 문묘에 두어 제사를 받게 하니 어찌 선성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않은가”(<퇴계전서>)
율곡 이이(1536~1584)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문묘에 종사한 사람 중 설총·최치원·안유(안향) 등은 도학과는 관계가 없다. 만약 의리대로 정한다면 이들은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되지 문묘에 배향해서는 안된다”(<율곡전서>)고 했다. 우암 송시열(1607~1689)도 “(최치원 등은) 미개했던 시절 문장으로 자취를 드러내 중국 학사들과 견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문묘에 종사된 것 같다”면서 “만약 본조(조선)에서 논의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송자대전>)이라고 저평가했다.
이황·이이·송시열 뿐 아니라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 또한 비슷했다. 정조는 “최치원 등은 동방 유학자로서 두드러진 자들이지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최치원의 경우는 좀 지나친 듯하다”(<정조실록> 1796년 9월 19일)고 언급했다.
■최치원은 군계일학
당대의 대학자들과, 정조 같은 군주가 최치원의 문묘종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어떨까.
그냥 빼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최치원의 문묘배향을 긍정하는 이들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서원(백운동서원)을 연 주세붕(1495∼1554)은 “최문창후(치원)의 문장, 식견, 소행은 참으로 백세의 스승이라 할 만하다”면서 “동방문장의 시조가 된 덕분에 문묘에 배향된 것”(<최문창후 전집>)이라고 언급했다.
사람파의 영수인 김종직(1431~1491)은 쌍계사를 방문한 뒤 지은 시에서 ‘최치원은 닭 떼에 끼어있던 학’(鶴在鷄群)으로 평가했다(<고운집>‘고운선생 사적’). 이수광(1563∼1629)은 <지봉유설>에서 동국문장의 시조가 된 점을 높이 평가했고, 허균(1569~1618) 또한 “최치원이 동방의 문장을 천하에 알렸다”(<허균전집>)고 평가했다. 김석주(1634~1684)는 최치원을 8자로 표현하기를 ‘천인절벽(千인絶壁) 만리홍도(萬里洪濤)’, 즉 ‘천길 되는 우뚝히 선 절벽이요 만리의 큰 파도’라고 극찬했다(<현호쇄담>).
또 ‘불교에 아첨했다’는 평가 역시 이미 정리된 바 있다. 즉 <세종실록> 1433년 2월9일조는 성균 사예 김반(생몰년 미상)의 상언을 인용하면서 “한유(성리학 선구자·당나라 문인)는 대전(당나라 시대 도승)과 친구로 지냈고, 성리학을 확립한 주문공(주희)는 운곡사에서, 최치원은 단속사(산청 지리산에 있는 사찰)에서 놀았는데 이것도 과연 부처에게 아첨한 것이냐”고 반문했다. 최치원이 한유(768~824) 및 주희(1130~1200)와 같은 유학자임을 분명히 해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최치원이 (당대에는 있지도 않았던) 도학 때문이 아니라 동방 문헌의 우두머리라는 점을 높이 사서 문묘에 됐다”는 김구(1488~1534)의 언급(<중종실록> 1514년 11월 12일)이 눈에 띈다. 또 숙종대(1674~1720) 지어진 <무성서원치제문>은 “오직 최치원의…문장·학술이 천년 동안 빛나서 성묘에 같이 제사지냄에…유교가 실로 공(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발 더 나아갔다.
■성리학의 잣대로 최치원을 평가?
가만보면 이황·이이와 정조 임금 등은 순전히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최치원의 문묘배향을 비판한 것이다. 즉 성리학에 공로가 있는 자만이 문묘에 배향되어야 한다는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하지만 유학은 그 시대와 학파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발달했다. 그중 도학은 송나라 시대에서 크게 일어난 정주성리학의 별칭이다. 정주성리학, 즉 도학은 북송의 주돈이(1017~1073)·장재(1020~1077)·소옹(1011~1077)·정호(1032~1085)·정이(1033~1107) 등 오군자가 열고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사상과 학문을 가리킨다. 따라서 선진(先秦)이나 한·당 시대의 유학은 도학이라 하지 않는다. 송대에 이르러 새롭게 재구성된 유학을 도학이라 한다. 그러니 이황·이이·정조 등의 비판은 성리학이 형성·발달하기 이전의 환경과 학풍을 무시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최치원 시대에는 성리학이니 도학이니 하는 개념이 없었으니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평가한 것이다.
■최치원도 문묘종사됐는데…
또한 조선시대 내내 유학자들은 최치원의 문묘배향을 한껏 이용한다. 즉 다른 사람의 문묘종사를 논할 때마다 최치원을 들먹거린 것이다. 예컨대 정몽주의 문묘배향 때(1517년·중종 12년)도 “최치원·설총·안유(안향) 같은 이도 문묘에 종사됐다”면서 정몽주의 배향을 촉구했다. ‘동방오현(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이황)’의 문묘종사 촉구 상소에도 그랬다.
‘최치원·설총 같은 무리까지 향사의 보답을 받고 있고’(1602년), ‘최치원 등의 인물은 중등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백세토록 제사를 받고 있다’(1604년)는 상소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의도적으로 최치원을 폄훼하면서 다른 이들의 문묘종사를 촉구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 한마디로 ‘저렇게 (자격이 부족한) 사람도 받는데, 이런 분들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곳곳에 남은 발자취
이와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최치원은 전국 각지에 그 흔적을 남겼다. 최치원의 발자취는 필자가 이번에 답사한 월영대를 포함한 경남이 28곳, 경북이 22곳, 전북과 충남이 각 11곳. 그리고 경기·광주·부산·대구 등도 각각 1~2곳에 남아있다. 그중 최치원을 모신 사상과 서원은 24곳이고, 영정을 봉안한 곳은 19곳에 이른다. 하기야 최치원을 두고 ‘영불지인(녕佛之人)’, 즉 ‘불교에 아첨한 인물’로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퇴계 이황마저 ‘월영대’를 찾아 답사시를 남겼다.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푸른 바닷가. 고운이 노닌 자취 모두 연기 되고 말아 이제 다만 높은 대에 달만이 머물러서 그 정신 담아내어 내게 전해 주는구나.”(<퇴계선쟁 문집>)
이황이 비록 도학자의 잣대로 최치원의 문묘종사를 비판했지만 “월영대를 찾아 최치원의 정신을 전해받았다”고 읊을만큼 그 학식과 문장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최치원이라면
만약 최치원이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길을 걸었을까.
이 대목에서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1464∼1498)이 쌍계사를 방문한 뒤 남긴 소감이 눈길을 끈다.
“고운이 지금 태어났다면 나라를 빛낼 문장실력으로 태평시대를 장식하고, 나도 문하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끼 낀 비석만 매만지고 있으니….”(<유두류록>)
최치원이 조선시대에 태어났어도 나라를 뒤흔들 문장가이자 유학자로 나라를 빛냈을 것이라는 평가이다.
영·정조 연간의 인물인 유일 스님(1720~1799)은 “선생은 동국 문장의 시조이며, 반드시 성리학에도 능했을 것이지만 때를 잘못 만나 보배를 품고 팔지 못한 것일뿐”(<연담대사림> ‘사산비명서’)이라고 평가했다.
유일 스님은 이어 “최치원 선생은 이미 유관을 썼고, 유복을 입었으니 반드시 유교로 길잡이를 삼고 글로써 공자와 맹자를 본받아 밝혔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한가지, 어떤 경우든 “풍류(나라의 현묘한 도)란 유·불·도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삼국사기>)이라고 언급했다는 최치원이라면 유교니 불교니 도교니 하면서 편가르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덧칠된 최치원의 진영을 다시 살펴보면서 서산대사(1520~1604)의 평가를 언급해본다.
“유교와 불교에 통달한 이들은…남의 근심을 자기 일로 걱정하고 남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니 어느 겨를에 유교가 그르다 불교가 그르다고 서로 원수처럼 다하겠느냐. 유학자인 최치원과 불승인 진감(774~850)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청허당집> ‘쌍계사중창기’)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백안시하기 일쑤인 필자의 심사에 일침을 놓고자 한다.
<참고자료>
이광우, ‘최치원 평가를 둘러싼 조선시기 유학자의 몇가지 고민’, <한국학논집> 73,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18
김창겸, ‘고운 최치원에 대한 후대의 평가’, <신라 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 한국사학회·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1
최현욱·곽홍인·신용비, ‘비파괴 분석을 통한 최치원 진영의 도상 및 채색재료 연구’, <박물관 보존과학> 24집, 국립중앙박물관, 2020
장일규, ‘최치원 관련 유적의 분포와 숭모’, <한국사학보> 63, 고려사학회, 2016
박동백, ‘최치원 유지 월영대 고’, <문화재> 23권, 국립문화재연구소, 1993
박홍국, ‘창원 월영대 각석면의 선대 명문’, <신라사학보> 50, 신라사학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