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그 이름은 또 하나의 장르다

백승찬·심윤지·김지혜 기자

‘오스카의 여인’ 윤여정의 빛나는 순간들

윤여정은 55년간 영화와 드라마와 예능을 넘나들었다. 상을 받기 위해 일하지 않았지만, 한국영화사 전대미문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이 그의 손에 쥐여졌다.윤여정은 “너무 최고가 되려고 그러지 말자. 그냥 다같이 최중만 되고 살면 안 되나”라고 묻는다. ‘최고’가 부담스럽다고 하니, 윤여정 ‘최중의 순간’을 꼽아보면 어떨까. 배우로서의 재능, 인간으로서의 개성이 드러난 세 가지 순간들이다.

윤여정, 그 이름은 또 하나의 장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소영

폭넓은 감정으로 극단적인 설정 소화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감독·2016)는 한국 영화사에서 보기 드물게 단호한 결말을 제시한다. 영화 속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 소영은 옛 ‘고객들’의 난감한 부탁을 받는다. 몸과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가는 노인들이 목숨을 앗아가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세상만사에 공감 능력이 강한 소영은 그들의 부탁을 들어준다.

소영이 그 대가로 호의호식하는 것도 아니다. 길고양이 밥주고, 코피노 아이 도와주고, 불전에 시주한다. 경찰이 찾아오니 “거기 가면 세 끼 밥은 먹여주는 거잖아요? 올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무연고 시신으로 화장된 소영의 유골함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극단적인 설정을 폭넓은 감정으로 소화해야 하는 역할인데, 윤여정의 연기는 그저 담담하다.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대하는 모든 상황을 저녁 늦게 들어온 딸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는 것처럼 연기한다.

윤여정, 그 이름은 또 하나의 장르다

아카데미 수상 소식에 장안이 떠들썩하다. 카퍼레이드라도 할 분위기다. 가장 침착한 사람은 윤여정 본인이다. “살던 대로 살아야지. 제가 오스카상을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는 거 아니잖아요.”(수상 직후 기자회견)

윤여정은 <계춘할망> 개봉 당시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김병익의 산문집 중 한 구절을 외워 들려줬다. “우리에게 괴로워하며 진지하게 정색하고 아프게 따지며 힘들여 셈할 일들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윤여정은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을 훈련한다고 했다.

개선하는 고대 로마 장군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속삭이는 하인을 뒤에 두었다고 한다. 소영은 빛과 어둠,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을 예사롭게 받아들여 더 넓은 세계를 보았다. 윤여정도 그런 것 같다.

윤여정, 그 이름은 또 하나의 장르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정유순

‘네멋 폐인’ 낳은 절제된 감정 연기

화투를 치고 프로레슬링을 보면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일까. 윤여정의 연기를 지켜봐 온 한국 관객들 눈엔, <미나리> 속 ‘순자’에 대한 상찬이 새삼스러울 수 있다. “전형적인 엄마상을 벗어나는 것이 필생의 목적이었다”는 말처럼, 윤여정이 연기한 엄마는 한번도 ‘그냥 엄마’이기만 했던 적이 없다. <네 멋대로 해라>(2002) 속 ‘정유순’도 그렇다.

일단 설정부터 파격이다. 유순은 알코올중독에 빠진 남편(신구)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들 복수(양동근)를 두고 집을 나간다. 10년 만에 아들이 찾아와도 미안한 기색이라곤 없다. 도리어 내가 필요한 건 용서가 아니라 돈이라고 말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꾸리느라 닳을 대로 닳아버린,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자존심 같은 건 사치가 되어버린 인물이 바로 유순이다.

“한눈에 봐도 구질구질한 걸 남자라고 불러들이냐? 제대로 된 놈을 만나란 말이야.” “제대로 된 게… 왜 날 만나니?” 자신의 밑바닥을 본 아들 앞에서 쓴 울음을 삼키며 말하는 유순을 ‘엄마’라는 틀에만 가둘 수 없다. 그는 평생 누구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자존을 잃지 않으려는 한 명의 인간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들에게 빌붙어 산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이는 경제적 자립도 물리적 안전도 확보하기 어려운 가난한 중년 여성의 등 떠밀린 선택이었음을 윤여정은 조금의 감정 과잉도 없이 설득해낸다.

돈이 궁한 자신 때문에 아들이 소매치기를 해왔음을 알게 된 순간, 늘 꼿꼿하던 유순은 결국 무너져내린다. 윤여정의 절제된 감정 연기가 빛나는 순간이자, ‘네멋 폐인’들이 꼽는 명장면 중 하나다. 윤여정은 연기 비결로 ‘절실함’을 자주 꼽는다. “이혼 후 두 아들과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연기했다”는 그의 삶이 없었다면, 유순이란 전에 없는 엄마 캐릭터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여정, 그 이름은 또 하나의 장르다
윤여정, 그 이름은 또 하나의 장르다
윤여정, 그 이름은 또 하나의 장르다

나영석 예능 속의 ‘여정’

인생 자체에서 묻어나는 재미와 의미

“만나서 반갑다. 나는 여정이라고 해.”

2013년 11월 tvN 예능 <꽃보다 누나> 첫 회, 윤여정의 인사말을 다시 본다. 작품도 배역도 없이, 그저 윤여정인 채로 카메라 앞에 서기로 한 그의 첫 번째 결심이 그곳에 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날 윤여정은 과감하게도 66년 인생을 통째로 들고 나타났다.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로 시작해 “그래서 내가 헛소리를 좋아해요”로 끝맺는, 농담과 잠언을 오가는 유머 감각도 물론 함께다. ‘배우’인 그가 ‘예능’이라는 낯선 장르에 도전하며 던진, 이 뜻밖의 승부수 덕분에 우리는 모두 ‘윤여정’을 안다. 배우도 탤런트도 아닌, 노인의 얼굴로 청년의 삶을 사는 흥미로운 한 인간의 삶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나영석 PD에게 윤여정은 그 자체로 재미와 의미를 겸비한 완성형 콘텐츠이자 하나의 장르였다. 윤여정은 <꽃보다 누나> 이후 tvN <윤식당1·2>(2017·2018), <윤스테이>(2021) 등 나 PD의 예능에 연달아 출연한 이유를 “나영석을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 PD가 누구보다 믿은 것은 윤여정이었을 것이다. 방송 초반 <윤스테이>를 띄운 것은 윤여정의 능숙한 영어 실력이었다. 마른 몸으로 진땀을 빼는 ‘윤 사장’의 위태로운 노력 속에 <윤식당> 시리즈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결혼 후 이어진 미국 생활 10년, “먹고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내던 생의 습관은 카메라를 거쳐 ‘윤여정’이라는 콘텐츠로 다시 태어났다.

여행길의 피로엔 “나 누나 아니고 할머니야” 투덜대고 식당을 내야 한다니 “김치볶음밥도 못한다” 짜증내더니, 결국 도전이란 도전은 다 해놓고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해. 재밌어 진짜”라고 말하는 사람. 그의 생이 ‘재밌다’면 74세의 나이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윤여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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