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냐 예술이냐...안규철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읽음

배문규 기자

전시장 구석에 두 개의 문이 있다. ‘인생(Leben)’이라고 쓰인 문에는 손잡이가 없고, ‘예술(Kunst)’이라고 쓰인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나 있다. 어디로 가야하나. 한 쪽 다리가 길게 화분에 박혀있는 의자는 예술의 문을 바라본다. ‘무명예술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이다. “미술계에 처음 발을 들인 1991년 독일에서 전시한 ‘자화상’ 같은 작품입니다. 예술과 인생 사이에서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죽은 나무로 만든 의자를 화분에 심어 키워내는 불가능한 도전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개막한 안규철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에선 오브제·회화·드로잉 등 40여 점의 작품으로 작가의 30여 년 동안 여정을 보여준다. 안규철은 소위 ‘개념미술’ 작가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오히려 사소한 일상과 사물을 섬세하게 관찰해 깊은 의미를 길어 올려왔다. “매일 보던 사람의 뒷모습에서 어느날 낯설고 새로운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잖아요. 일상 속 평범한 사물의 이면에서 보이지 않던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드러내려 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회고전 성격이다. 세상의 모순을 드러냈던 지난 작업들을 다듬어 선보인다. 이를테면 구두 세 켤레를 이어 붙인 ‘2/3 사회’(1991/2021)는 원형을 그리며 맞물리는 형태로 변형돼 모든 것이 상호관계 속에 묶여있는 사회를 떠올리게 했다. 세 벌의 코트 상표에 쓰인 단어들을 이어 ‘단결이 자유를 만든다’는 문장을 만들었던 ‘단결 권력 자유’(1992/2021)는 이번에 아홉 벌로 늘려 둥근 고리를 만들었다. 안과 밖,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사유를 확장한 것이다.

안규철의 ‘2/3 사회 II’(1991/2021) | 국제갤러리 제공

안규철의 ‘2/3 사회 II’(1991/2021) | 국제갤러리 제공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회화 ‘그들이 떠난 곳에서-바다-’(2012/2021)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당시 그는 200개의 캔버스에 그린 바다 그림을 광주 시내 곳곳에 내놓고, 지역신문에 분실 공고를 냈다. 작가에게 돌아온 그림은 20여 점 남짓이었고, 전시관에선 작품 대부분이 ‘실종’된 상태로 전시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실종자에 대한 은유다. ‘인생에 실패하는 법’(2021)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의 실패를 바라보며 떠올린 작업이다. 구글에서 검색한 ‘성공 지침’ 10개 문구를 반대로 뒤집어 포스터를 만들었던 것을 이번에 캔버스로 옮겼다. 가장 근작은 역대 대통령 선거의 69개 벽보를 모노크롬 회화로 변형한 ‘약속의 색’(2020)이다. 포스터 속 기호들을 제거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평균 색을 추출해 캔버스에 칠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등등이 눈에 띄지만, 그게 그거처럼 보인다. 공허한 약속의 잔해들이다. 막상 모아놓으면 알록달록 예쁜 그림이 된다는 게 또다른 아이러니다.

전시장 입구 ‘나는 칠판이 아니다’(1992/2001)는 폴란드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가 독자에게 받은 비판 편지를 옮겼다. ‘난해한 개념미술 작가’의 유쾌한 자기비판이다. “죽음에 대한, 그림자에 대한 내용이 너무 많아요. 삶에 대해 평범한 날들에 대해, 정돈된 일상을 향한 바람에 대해 써 보세요. … 사랑에 대해 써 보세요. 기나긴 저녁에 대해, 새벽에 대해, 나무들에 대해, 빛의 무한한 끈기에 대해.” 전시는 7월4일까지.

안규철 작가가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Ⅱ’ 앞에 서 있다.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안규철 작가가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Ⅱ’ 앞에 서 있다.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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