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드라마에 빠진 MZ세대 “무한경쟁 사회, 악역에 공감”

반기웅 기자

유튜브 등 다시보기 인기
“수단·방법 안 가려야 성공하더라”
도덕 잣대보다 비슷한 처지 감정이입

23년 전인 1998년 방영을 시작한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부터 1980년 첫 방송을 탄 <전원일기>까지. 1980~2000년대 ‘안방극장’이라 불렸던 TV 드라마가 옛 영화를 회복했다고 할 정도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향수에 젖은 50대 이상 연령층의 ‘복고풍 바람’만은 아니다. ‘그 시절 드라마’를 봤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렸거나 그 무렵 태어나지도 않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출생) 사이에서 복고 드라마 팬들이 늘고 있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1990~2000년대 드라마 다시보기 열풍이 한창이다.

옛 드라마가 다시 유행하는 데는 기술 발달과 미디어 소비 환경의 변화가 있다. 과거 흑백TV 시절 드라마는 제대로 된 녹화본도 남아 있지 않아 다시 보기 힘들다. 반면 1980년대 방송물부터는 방송국에 녹화본이 보존돼 있다. 이를 디지털 콘텐츠로 변환해 활발하게 유통하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IP)TV를 통해 회차별로 편하게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수용자 환경 변화도 한몫을 한다.

사랑을 갈아타고 출세길 택한 ‘배신남’

<b>1995, 젊은이의 양지</b>

1995, 젊은이의 양지

‘요즘 드라마’와 확연히 다른 스타일이라는 점도 청년층의 흥미를 끄는 요소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드라마의 속성상 지금 시대보다 ‘덜 치열했던’ 시절을 그리고 있고, 여전히 믿고 싶은 권선징악의 논리가 대체로 살아 있다. 팍팍한 현실에서 심리적 보상이나 위로를 받으려고 옛 드라마를 찾아 본다는 것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복고 드라마 열풍에 대해 13일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순수와 도덕, 인간미, 희망과 같은 가치를 동경한다”고 말했다.

드라마가 방영되던 당시에는 손가락질을 받던 대표적인 ‘악역’이 시대가 흐르고 세태가 바뀌면서 응원을 받는 풍경도 흔하다. 드라마 속 인물들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지는 셈이다. 최근 KBS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를 다시 본 이희원씨(41)는 극중 악역인 박인범(이종원)이 다시 보였다. 인범은 출세를 위해 배신과 기망을 서슴지 않는 캐릭터로, 1995년 본방 당시에는 이씨도 인범의 몰락을 기원했다. 그런데 요즘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는 오로지 성공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흙수저’ 인범에게 마음이 갔다. 드라마가 업로드된 유튜브 댓글창에는 ‘먹고사는 게 그렇다. 인범이 마음도 짠하다’는 글도 올라왔다. 이씨는 “살아보니 성공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더라. 없는 집에서 태어난 인범이 성공하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흙수저 극복하려 악행까지 일삼는 ‘독종’

<b>2000, 이브의 모든 것</b>

2000, 이브의 모든 것

2000년 방영된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허영미(김소연)는 주인공 진선미(채림)의 친구이자 라이벌이다. 두 사람은 방송사 앵커 자리와 남자를 놓고 경쟁한다. 부유한 집 외동딸인 진선미는 실력은 부족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인물이다. 반면 가난한 허영미가 가진 것은 실력뿐이다. 성공을 갈망하는 허영미는 자신의 모자란 배경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당시 허영미는 ‘국민 욕받이’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여론은 180도 뒤집혔다. 허영미를 향한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공감과 연민으로 바뀌었다. 전문가들은 무한경쟁이 심화된 사회적 배경을 원인으로 든다. ‘각자도생’ 사회가 도래하면서 성공을 위한 ‘몹쓸 짓’에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드라마 평론가로 활동 중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성공만 할 수 있다면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며 “결과만 중시하는 성과 우선주의가 통상적인 도덕과 윤리를 훼손시킨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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