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소송 붙었던 대하소설 '대망'의 뒷이야기

박은하 기자

쟁점이 된 것은 1975년 <대망 1권>과 2005년 <대망 1권>을 동일한 출판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대법원은 1·2심판단을 뒤집었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가 사망 3개월여 전에 명예를 회복한 셈이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가 지난 2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 대표의 삶은 ‘출판인생 외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비교문화학을 전공한 뒤 1965년 동서문화사를 세웠다. 세네카의 <지혜와 사랑>을 시작으로 도서 5000여종을 펴냈다. 그가 출판한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일본 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八, 1907~1978)의 대하역사소설 <대망(大望)>일 것이다.

1975년 동서문화사가 출판한 <대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인공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일본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1950년부터 1967년까지 집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번역서이다. 일본에서 단행본이 1억부 넘게 팔렸으며, 국내에서도 30년간 2000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법학자이자 야당 정치인이었던 유진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 정재계 인사들이 즐겨 읽는 소설로도 유명세를 탔다. 야망을 꿈꾸는 남자들의 소설이었던 것이다.

에도 시대 그려진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화. 교토대학박물관 소장

에도 시대 그려진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화. 교토대학박물관 소장

고 대표, 일본 작가에 출판 허락 받아

이 소설은 일본의 원작자와 정식 출판계약을 맺지 않았다. 당시 국내에서 문제되지 않았다. 당시의 국내 저작권법은 해외 출판물을 보호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이 약한 신생국가였던 한국은 적극적으로 해외 저작권을 무시하고 무단 출판물을 들여오며 지식을 흡수했다. <대망> 뿐 아니라 1970~1980년대에는 <캔디캔디>, <은하영웅전설>, <영웅문> 등 주로 일본, 홍콩 작품인 해외 만화·소설이 원작자 허락없이 출판되는 일이 흔했다. 다만 <대망>은 고 대표가 야마오카를 찾아가 출판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야마오카는 “번역에 잘 신경써 달라”며 흔쾌히 허락했다고 전해진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다. 지적재산권협정(TRIPS)이 발효되자 해외 저작물도 보호하도록 국내 저작권법이 개정됐다. 세계화의 흐름에 맞춰 국내법을 정비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에 휘말리며 동서문화사는 어려움을 겪었다. 야마오카의 원작은 1999년 솔 출판사가 정식계약을 맺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그런데 2005년 고씨가 야마오카나 솔 출판사와의 협의 없이 <대망> 개정판을 내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독자들에게 과거 베스트셀러로 친숙했던 이름을 다시 들고 나온 대망은 2016년까지 18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로써 벌어진 두 출판사 간의 분쟁이 12년 가량 이어졌고 솔 출판사는 고씨와 동서문화사를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발해 2017년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해외 저작물을 보호하지 않던 시절의 해적판의 개정판을 다시 낸 것은 저작권법 위반일까 아닐까. 3년여에 걸친 1·2·3심 판결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 만큼 법정에서도 논의가 치열했다는 의미다. 쟁점이 된 것은 1975년 <대망 1권>과 2005년 <대망 1권>을 동일한 출판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1996년 국내 저작권법을 개정하면서 과거 국내 무단 출판된 저작물의 원저작물은 ‘회복저작물’의 지위를 얻었다. 야마오카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회복저작물이다. 저작권에 관한 국제협약인 베른협약의 권고를 담아 과거 해외저작물도 변경내용을 소급적용해 보호의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다만 부칙으로 회복저작물을 원작물로 삼아 번역, 각색, 편집 등을 거친 결과물인 ‘2차적 저작물’에 대해선 기한 제한없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 출판물로 인한 법적 분쟁이 쏟아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1975년 출간된 <대망>의 재고를 법 개정 후에도 팔 수 있었던 이유다. 이 부칙에 근거해 2005년의 <대망>이 1975년의 <대망>과 동일한 출판물이라면 저작권법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가 생긴다.

그렇다면 동일하거나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판단할까. 핵심은 번역이다. 1심은 고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 출판사에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2심은 고씨와 출판사에게 각각 벌금 700만원으로 감형했다. 고씨와 출판사는 “재출간 과정에서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고 바뀐 외국어 표기법을 적용했다”며 동일성을 주장했으나 1심은 “2005년판은 새로 참여한 번역자가 1975년판에는 없었던 표현을 추가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번역해 과거본과 동일성을 상실했다”고 봤다. 두 문장이었던 것을 한 문장으로 잇거나 반대의 경우 등을 예로 들었다. “뜬 세상의 이합집산은 꿈 속의 꿈이라오. 두 남편을 섬기고 세 남편에게 종사하며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미래에 자손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랍니다.”(1975년판) “뜬 세상의 이합집산은 덧 없는 꿈이지요. 두 남편, 세 남편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미래에 자손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랍니다.”(2005년판)

<대망 1권> 표지. 동서문화사 제공

<대망 1권> 표지. 동서문화사 제공

동일 여부 판단의 핵심은 번역서 갈려

2심도 동일하게 판단했으나 고씨와 출판사가 솔 출판사와 협의해 책 출간을 중단한 점, 1996년 저작권법 개정으로 피해를 입은 측면이 있는 점, 고씨가 국내 출판계에 기여한 점 등을 감안해 감형했다. 대법원은 1,2심 판단을 뒤집었다. 지난해 12월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1975년판에 등장한 독창적인 표현이 2005년판에도 포함돼 있었는지가 관건”이라며 동일성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를 다르게 봤다. 대법원은 “1975년판의 어휘와 구문의 선택 및 배열, 문장의 장단, 문체, 등장인물의 어투, 어조 및 어감의 조절 등에서 창작적인 표현들이 2005년판 <대망 1권>에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다. 사회통념상 새로운 저작물로 볼 정도에 이르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고 대표가 출간 당시 야마오카의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 재판 도중 새롭게 밝혀진 것도 고 대표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야마오카의 조카가 편지로 증언해 준 것이다. 야마오카는 번역출간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대망>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단 사실도 알고 있었으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이전까지 <대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단 번역한 출간물로 알려져 있었다. 고 대표가 사망 3개월여 전에 명예를 회복한 셈이다.

‘대망 사건’과 같은 재판은 다시 벌어지기 힘들게 됐다. 한국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을 세계로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국내에서 해외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법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해외 무단복제판을 걱정하며 엄격한 저작권 준수를 요구하는 지위가 됐다.

야마오카는 왜 계약금 한 푼 받지 않고 <대망>의 출간을 허락해 준 것일까. 제국시대를 살았던 일본인으로서 옛 식민지 국가에 대한 시혜나 친근함이었을까. 자신의 작품을 알아본 사명감에 넘치는 젊은 출판인에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일까. 답은 알 수 없게 됐다. <대망>은 1960~1980년대 독특한 한일관계를 보여주는 출판물로 남을 것이다.

판결정보(사건번호)

1심 서울중앙지법 2017고단4808 박대산 판사, 2심 서울중앙지법 8-3형사부(재판장 김우정) 2019노442, 3심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 2020도6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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