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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태극낭자들의 꿈, 올림픽 9연패가 현실이 됩니다!” 지난 25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한국 대표팀이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를 제치고 금메달을 거머쥔 직후였다. 흥분한 MBC 중계진이 소리쳤다. 같은 시각 SBS, 서로 얼싸안으며 승리를 기뻐하는 선수들을 중계진은 이렇게 묘사했다. “얼음공주가 웃고, 여전사들 웃는 모습이 너무 좋네요.” 압도적 실력을 보여준 대표팀 선수들에게 중계진은 태극낭자, 얼음공주, 여전사라는 수식어로 열띤 ‘찬사’를 전했다. 태극도령 등이 쓰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을 차별적으로 대상화한 표현이다.

25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여자 양궁 국가대표 안산(왼쪽부터), 장민희, 강채영이 활시위를 당기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25일 일본 유메노시마 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여자 양궁 국가대표 안산(왼쪽부터), 장민희, 강채영이 활시위를 당기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MBC가 올림픽 중계에서 부적절한 사진과 문구를 사용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에도 지상파 중계진의 태도는 여전히 비판받고 있다. 시청자들은 스포츠를 전쟁에 비유하며 국가대표 선수들을 ‘전사’ 혹은 ‘영웅’으로 부르는 오랜 중계 관습이 성차별적 표현뿐 아니라 타국에 대한 조롱과 비하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와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는 세계인들의 우정과 연대’로 요약되는 올림픽정신에 걸맞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중계 태도가 ‘MBC 중계 사고’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 25일, 양궁 여자 대표팀이 금메달을 거머쥔 직후 MBC 중계진은 “태극낭자들의 꿈, 올림픽 9연패가 현실이 됩니다!”라고 환호했다. MBC 캡처

지난 25일, 양궁 여자 대표팀이 금메달을 거머쥔 직후 MBC 중계진은 “태극낭자들의 꿈, 올림픽 9연패가 현실이 됩니다!”라고 환호했다. MBC 캡처

같은 시간 SBS 중계진은 “얼음공주가 웃고, 여전사들 웃는 모습이 너무 좋네요”라고 선수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SBS 캡처

같은 시간 SBS 중계진은 “얼음공주가 웃고, 여전사들 웃는 모습이 너무 좋네요”라고 선수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SBS 캡처

낭자·여전사 등 성차별적 수식어
대회 때마다 지적 이어져도 불변



과거 처녀를 높여 이르던 말 ‘낭자’, 도도한 성격의 여성을 비유적으로 이른 표현 ‘얼음공주’, 전사라는 성별 중립적인 단어 대신 선택한 단어 ‘여전사’ 모두 양궁 실력과 직접적 관련이 없음에도 지상파 중계진은 선수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표현을 택했다. 과거 올림픽에서 남성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을 때 이들을 ‘태극전사’라 부르며 국가 간 전쟁에 출전한 군인에 비유했던 스포츠 중계의 관습이 부른 차별적 표현이다. 스포츠에서 오랫동안 배제됐던 여성들을 ‘전사’로 칭할 수 없다는 성별 고정관념이 낭자와 공주 그리고 여전사라는 기이한 대체어를 택하게 한 것이다.

각국의 대표 선수들이 모여 운동 실력을 겨루는 세계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올림픽은 명백한 ‘국가 대항전’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더 이상 ‘국가 대항전’으로만 올림픽을 소비하지 않는다. 시청자 김희진씨(26)는 “주로 한국 선수의 입장에 이입해 경기를 챙겨보긴 하지만 국적이나 나이, 성별과 관계없이 오랜 훈련을 거쳐 이 자리에 온 모든 선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올림픽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약자나 타자에 대한 배제 없는 공정한 경쟁의 장으로서 올림픽 그 자체를 즐기며, ‘대항전’ 너머 ‘스포츠’가 주는 온전한 재미를 누리려는 태도가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널리 공유돼 있다.

지난 25일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 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여자 탁구 국가대표 신유빈과 룩셈부르크 대표 니시아리안의 경기, KBS 중계진들은 니시아리안을 두고 “여우처럼 경기하고 있다”고 빗댔다. KBS 캡처

지난 25일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 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여자 탁구 국가대표 신유빈과 룩셈부르크 대표 니시아리안의 경기, KBS 중계진들은 니시아리안을 두고 “여우처럼 경기하고 있다”고 빗댔다. KBS 캡처

3사 캐스터 32명 중 여성은 1명 뿐
지상파 중계진 다양성도 낙제 수준



루마니아 축구 대표팀의 자책골에 대한 MBC의 ‘자막 조롱’ 이후에도 일부 시청자들은 타국 선수에 대한 비하적인 중계진의 태도에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25일 열린 여자 탁구 단식, 한국 대표 신유빈과 맞붙은 룩셈부르크 대표 니시아리안에 대한 중계진의 발언이 도마에 올랐다. KBS 중계진이 58세 선수 니시아리안의 연륜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숨은 동네 고수” “여우처럼 경기한다”는 등 표현을 사용한 것이 문제시된 것이다. 상대 선수를 불필요하게 비하한 발언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앞서 24일 양궁 혼성 단체 결승전,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 선수가 10점 과녁에 화살을 꽂은 직후 “의미 없다. 10점을 쏴도 못 이긴다”는 KBS 중계진의 발언 역시 불필요한 조롱조의 표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차별과 배제 없는 연대의 장으로서 스포츠를 중계해달라는 시청자들의 문제제기는 오래전부터 이뤄져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키리바시 등 타국에 대한 비하적 표현을 썼던 MBC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에는 트위터 이용자들이 합심해 ‘올림픽 중계 성차별 발언 아카이빙’을 작성하기도 했다.

지난 24일 열린 양궁 혼성 단체 결승전,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 선수가 10점 과녁에 화살을 쏘자 KBS 중계진은 “의미 없죠. 10점을 쏴도 못 이깁니다”며 조롱조로 말했다.

지난 24일 열린 양궁 혼성 단체 결승전,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 선수가 10점 과녁에 화살을 쏘자 KBS 중계진은 “의미 없죠. 10점을 쏴도 못 이깁니다”며 조롱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별다른 쇄신 없이 ‘하던 대로’ 스포츠 중계를 진행한 방송가의 관성이 결국 ‘MBC 중계 사고’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지상파 중계 캐스터 중 단 3%만 여성이었다는 점이 중계진의 성차별적 발언들과 함께 지적됐다. 그럼에도 2020 도쿄 올림픽 중계 방송의 캐스터 ‘다양성’은 여전히 낙제 수준이다. 취재 결과 KBS는 캐스터 14명 전원이, SBS도 캐스터 8명 전원이 남성이고, MBC는 10명 중 1명만 여성이다.

방송가가 여전히 시청자들의 달라진 시각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기획팀장은 “스포츠 행사를 국위선양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지상파의 중계 태도가 다양성을 중시하는 여론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MBC 중계 사고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시대정신에 발맞춘 실질적인 쇄신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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