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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2020 도쿄 올림픽 폐막을 앞둔 지난 8일 오후, 케이블 채널인 KBS N 스포츠에서 중계된 미국 대 브라질 여자배구 결승전은 뜻밖의 관심을 모았다. 코트에는 여성 선수가, 중계석엔 여성 캐스터와 여성 해설위원이 있었다. 지상파 3사 중계진 중 여성 캐스터는 단 1명, 그것도 다이빙 종목뿐이었던 이번 올림픽에서 비록 한국 경기는 아니지만 ‘여여 콤비’가 이끄는 구기 종목 중계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효주 KBS N 스포츠 아나운서(29)와 이숙자 해설위원. 지상파 3사의 시대착오적 중계 관행에 피로를 느끼던 시청자들은 “낯설지만 편안하다”는 찬사로 이들을 반겼다. ‘캐스터는 당연히 남성’이라는 편견 속에서, 4년째 여성 스포츠 캐스터로 활동하며 ‘낯섦’을 ‘편안함’으로 바꿔가고 있는 오효주 아나운서를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KBS 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2018년 1월 프로배구 V리그 생중계 캐스터 데뷔 당시 오효주 아나운서. 유튜브 캡처

2018년 1월 프로배구 V리그 생중계 캐스터 데뷔 당시 오효주 아나운서. 유튜브 캡처

“한국대표팀의 활약 덕분에, 배구라는 종목 자체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요. 중계가 좋았다는 반응도 기분 좋지만, 세계인들의 스포츠 축제를 함께했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2014년 입사한 8년차 스포츠 아나운서지만 올림픽 중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 아나운서는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배구 미국 대 브라질, 세르비아 대 브라질전을 비롯해 총 8경기의 중계를 맡았다. 2018년 1월, 프로배구 V리그에서 생중계 캐스터로 데뷔해 당구, 테니스 등에서 꾸준히 중계 방송을 진행해온 그에게도 올림픽은 특별한 경험이 됐다. 장유례 SBS 스포츠 아나운서, 김선신 MBC 스포츠플러스 아나운서 등 골프나 당구 등 비교적 정적인 스포츠 종목에서 여성 캐스터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올림픽의 인기 종목 중계를 여성 캐스터가 하는 경우는 드물다.

“입사 초기부터 캐스터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스포츠 방송 일을 오래 하고 싶은데, 그동안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에게 요구됐던 리포터, MC 등의 역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반짝하고 사라지지 않으려면, 좀 더 전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2018년 1월 프로배구 V리그 생중계 캐스터 데뷔 당시 오효주 아나운서(왼쪽)와 이숙자 해설위원. 유튜브 캡처

2018년 1월 프로배구 V리그 생중계 캐스터 데뷔 당시 오효주 아나운서(왼쪽)와 이숙자 해설위원. 유튜브 캡처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를 ‘반짝’ 소비한 것은 2000년대 말부터 양적 팽창을 이룬 스포츠 채널들이었다. 너도 나도 여성 아나운서를 앞세워 시청률 견인에 나섰다. 전문성보다 외모와 매력이 이들의 무기인 양 여겨졌다. 경력 있는 남성 아나운서들이 중계를 독점하는 동안, 젊은 여성 아나운서들은 현장 인터뷰, 스튜디오 MC로만 기용됐다. 2015년 스타 아나운서로 불리던 정인영·윤태진 아나운서는 ‘계약 만료’를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

“뛰어난 전문성을 갖춘 선배님들이 다른 길을 찾는 모습을 보고 이 직업의 짧은 수명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저만의 콘텐츠 확장력을 더 고민하게 된 계기였죠. 하지만 이제는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2010년 전후만 해도 ‘남자들 세계의 꽃’처럼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외모나 신선함보다는 실력 면에서 더 엄격하게 평가받는다고 느껴요.”

오효주 아나운서는 캐스터로서 자신만의 강점으로 “사람에 대한 스토리”를 내세웠다. (선수가)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하나 더 말해주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와 감독,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더 전하려고 노력해요.” 박민규 선임기자

오효주 아나운서는 캐스터로서 자신만의 강점으로 “사람에 대한 스토리”를 내세웠다. (선수가)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하나 더 말해주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와 감독,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더 전하려고 노력해요.” 박민규 선임기자

‘여성 캐스터’는 이루기 어려운 꿈이라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 “여자는 목소리가 얇고 높아서, 샤우팅이 어려워서 캐스터로는 부적합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어요. 시청자들이 여성 캐스터를 그저 낯설게만 느끼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대도, 저도 바뀌었어요. 샤우팅이 안 되면, 저만의 역량으로 승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오 아나운서는 캐스터로서 자신만의 강점으로 “사람에 대한 스토리”를 내세운다. “스포츠 중계는 단순히 경기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입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중에서도 더 따뜻하고, 사람 냄새 나는 중계를 추구하죠. (선수가)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하나 더 말해주고,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와 감독,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더 전하려고 노력해요.” 그는 캐스터의 성별 다양성이 확보된다면 ‘샤우팅’만이 최선이 아닌, 더욱 다양한 이야기와 개성이 넘치는 스포츠 중계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남초인 중계석에서 여성 캐스터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오 아나운서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는 2018년 1월, V리그 생중계 캐스터로 데뷔한 날을 잊지 못한다. “회사와 사내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느껴지던, 정말 행복했던 날로 기억해요.” 중계석을 지키던 신승준 아나운서가 당시 자원해서 현장 인터뷰를 맡았다. 성별 고정관념이 뒤집힌 순간이었다. 변화는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 회사에서도 여성 캐스터, 여성 해설위원, 여성 아나운서 셋이 모여 있는 그림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됐어요. 예전엔 여자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일하는 게 아니라 그중 하나는 ‘놀러왔다’고 생각하시곤 했거든요.”

오래 일하는 것이 꿈이다. MC로도, 리포터로도, 캐스터로도 모두 장수하고 싶다. 다음 V리그 시즌에서는 주로 맡던 녹화중계보다는 생중계 캐스터를 더 하고 싶다. MC로 참여하는 <아이러브 베이스볼>에서 하이라이트 중계를 하곤 하지만, 언젠간 한 경기를 책임지는 캐스터로 나서고 싶다. “오효주 이제 나이 들어서 할 거 없겠네, 이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외국처럼 흰머리 휘날리며 활약하는 여성 스포츠 아나운서의 모습, 새로운 길을 내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김지혜 기자 kim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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