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결혼, 어디까지 해봤니읽음

이길보라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과 시도

네덜란드필름아카데미 석사 과정 학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졸업한 지 2년 만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데 그가 말했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페셜 포스터 중 일부분. (주)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페셜 포스터 중 일부분. (주)영화사 진진 제공

“얼마 전에 결혼했어.”

그는 1959년생이다. 깜짝 놀라 학장이 이미 결혼하지 않았던가 혹시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인가 머리를 굴렸다. 졸업식과 같은 큰 학교 행사에 학장은 종종 남편으로 추정되는 이를 데려왔다. 오래 같이 살았고 둘 사이에 내 나이 또래 아들도 있으니 당연히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의 연구와 작업에 관심이 많았고 학문적으로도 박식했다. 나의 머리 모양을 보고 이런 기하학적인 스타일은 일본 문화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다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것을 빼고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된 것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내게 학장은 말했다.

“네가 아는 그 사람이랑 했어. 몇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 나이에 결혼이라니. 너도 알다시피 우리 세대, 68혁명을 겪은 페미니스트는 대부분 결혼 제도에 반대하잖아.”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했던 프랑스의 68혁명은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학장과 영국 출신인 파트너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둘은 결혼이 아닌 파트너십을 택했다. 네덜란드는 1998년부터 파트너 등록제를 실시했다. 네덜란드의 파트너십은 배우자로서의 권리와 법적 이익이 결혼과 유사하다. 파트너십은 시민결합, 생활동반자관계, 시민동반자관계, 시민연대계약 등 국가마다 조금씩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왜 갑자기 결혼했냐는 질문에 학장은 세금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네덜란드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기도 최근에 결혼했다. 그는 레즈비언이다. 오래 관계를 지속해온 파트너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가족들은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가문 사람들은 예술가라 보통 결혼 제도를 선택하지 않는데 너는 왜 유별나게 결혼을 하려고 하니? 어차피 지금도 같이 살잖니?”

동기는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보다 유연하기에 파트너십을 택하는 이도 있지만 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선택하는 데에 둘의 생물학적 성별이 같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다.

“최근에 결혼했다”는 60대 학장
“여친과 결혼했다”는 나의 여친
이들 모두 각기 다른 ‘가족’의 형태

나는 코로나 생이별이 아니었다면
파트너와 굳이 혼인신고 안 했을 것

가부장적 사회선 여자가 ‘집사람’
다큐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속
육아·가사 도맡는 건 ‘남자 집사람’

결혼과 가족이란 정녕 무엇일까

그와 반대로 네덜란드필름아카데미에서 만난 멘토는 여전히 파트너십을 유지한다. 서로를 아내와 남편이 아닌, 파트너라 부르며 관계를 지속한다. 그곳에는 각기 다른 모습과 형태의 가족이 존재한다.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결혼 계약

나는 영상통화로 일본인과 결혼했다.

네덜란드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일본 도쿄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던 그를 만났다. 사랑에 빠졌고 네덜란드에서 다른 형태의 삶의 방식을 함께 찾아보기로 했다.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첫 번째 학기를 마칠 때쯤 그가 사표를 내고 날아왔다. 같이 사는 건 즐거웠으나 매일같이 비가 오고 해는 언제 뜰지 모르는 생소한 기후와 정반대의 문화, 다른 언어권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고됐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유학 생활이라 더욱 그랬다. 유학은커녕 교환학생, 어학연수도 해본 적 없는 내가 영어로 석사 과정을 이수하며 예술가로서 창작을 이어가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24시간이 모자랐다. 파트너는 열심히 내조했다. 나의 유학 생활을 돕기 위해 이주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외국에서의 생활과 둘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우리의 관계는 미등록 파트너였다. 네덜란드의 파트너십 제도는 외국인에게도 적용된다. 학생 비자를 받아 체류 중인 내가 파트너가 있음을 증명하면 성별·국적에 상관없이 파트너 비자를 발급한다. 파트너십 제도가 없는 한국과 일본에서 온 우리가 공식적인 서류로 관계를 증명할 수 없어도 말이다. 그걸 안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를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아닌 파트너로 부르기로 했다.

끈끈한 연대로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어디서 어떻게 살지 고민하다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타지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에 지친 데다 ‘가모장’의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생활비를 각자 부담했기에 여자는 돈을 벌고 남자는 가정을 돌보는 완전한 형태의 가모장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학교라는 커뮤니티가 있는 나와 속한 커뮤니티가 없는 파트너는 위치가 달랐다. 네덜란드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했으니 다음은 그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나는 이동이 자유로우니 양국을 오가며 일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산으로 국경이 닫혔다.

2020년 3월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이주하던 시기에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항공편이 전면 결항되고 상호 사증 면제 제도가 중지되었다. 계획대로라면 일본으로 간 파트너를 뒤따라가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기약 없는 생이별이 이어졌다.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국경은 어느 쯤에 열릴지 알 수 없었다. 양국 간의 정치·외교적 관계는 최악이었다. 이러다간 몇 년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혼인신고를 하여 배우자 자격으로 비자를 발급받는 것. 이렇게 결혼 제도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렵게 결정을 내렸지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결혼식은커녕 만날 수도 없으니 각자 혼인신고를 해야 했다. 아니 결혼을, 각자? 우리는 EMS로 서류를 주고받아 각국 행정처에서 각각 결혼했다. 서류상의 절차라지만 그래도 기념하고 싶어 영상통화를 걸었다. 일본은 접수 절차에 여유가 있어 각자 소회를 나눌 수 있었지만 한국은 민원이 밀려 있었다. 카메라를 켜고 “이제 우리 한국에서도 결혼했어!” 하며 다소 로맨틱한 말을 하려던 차에 담당자가 옆으로 좀 비켜달라고 소리쳤다.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결혼 계약이었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프랑스에서 유학과 경제 활동, 행정 업무를 맡은 아름(오른쪽)과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는 성만.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프랑스에서 유학과 경제 활동, 행정 업무를 맡은 아름(오른쪽)과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는 성만.

박강아름 결혼하다

얼마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 남편을 데리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강아름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자기가 나 서포트해줘야 해.”

영화의 주인공이자 감독인 박강아름은 비혼주의자였던 남편 정성만에게 프러포즈를 한다. 프랑스로 미술을 공부하러 갈 건데 결혼하고 함께 가자며 설득한다.

가족도, 친지도, 친구도 없는 프랑스에서 아름은 유학과 경제활동, 행정 업무를 맡는다. 글을 쓰고 식당에서 요리를 했던 성만은 전직을 살려 가사를 담당한다. 아름은 한국보다 프랑스가 양육 조건이 좋다며 평소 꿈꿨던 ‘엄마 되기’를 실천한다. 얼떨결에 성만은 공부를 하며 영화를 만들고 엄마도 되기로 한 아름을 전적으로 ‘서포트’한다. 심지어 영화도 함께 만든다. 본 영화 제작진 크레디트에는 성만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영화 제목 여덟 자에는 감독의 이름 네 글자가 정확히 들어가지만 성만의 이름은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아름은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프랑스어를 비교적 잘하니 서류 작업과 같은 행정 업무를 한다는 사유로, 생활비를 번다는 말로 가사와 양육의 책임에서 벗어난다. 물론 성만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출산은 아름이 한다. 하지만 성만에게 온갖 짜증을 내며 출산의 어려움과 고통을 호소한다. 이 영화의 화자는 박강아름이다. 박강아름이 찍고 박강아름이 내레이션하고, 심지어 박강아름이 누군지 궁금해하며 박강아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배경 음악도 깔린다. 그야말로 박강아름 잔치다. 그러나 관객이 아름의 시선을 통해 감정이입하게 되는 건 성만이다. 주부 우울증에 걸려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는 성만, 웃고 있지만 어쩐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성만, 김치를 담그며 한국 방송을 시청하는 성만, 어느 나라가 살기 좋냐는 질문에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프랑스어로 더듬더듬 대답하는 성만, 생활비 아껴야 하는데 비싼 체리토마토를 사왔다고 잔소리 듣는 성만, 이제부터 나도 생활비 흥청망청 쓰겠다고 큰소리치며 가출했지만 기껏 사먹은 건 3유로짜리 커피 한 잔이었다고 씁쓸하게 회고하는 성만.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을 ‘서포트’하며 내조하는 여성의 모습은 너무나 일반적이라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전통적 성역할이 전복된 이 영화에서는 가사노동과 독박육아를 하는 남편 성만이 주인공이 된다.

박강아름은 고민한다. ‘나는 왜 성만에게 결혼하자고 했을까? 이렇게 힘든 유학 생활에 왜 성만까지 데려왔을까? 왜 출산과 양육을 지금 하기로 결정했을까?’ 감독의 질문은 현재의 결혼 제도와 가족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원시공산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이라는 제도가 생기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일처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공동체 내에서 규율 없이 결혼하다 형제자매 간의 성관계가 배제된 가족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모계제 사회가 정립되고 여성이 경제를 장악했다. 농경과 목축이 분리되며 생산력이 증대되고 그에 따른 잉여물의 교환, 사유재산이 생기며 지금과 같은 가부장제가 출현했다. 남성의 경제적 역할이 커지면서 생산수단과 가축, 노예가 남성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과정 중 여성은 남성에 의해 멸시당하고 남성의 욕망의 노예이자 아이 낳는 단순한 도구로 전락하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일부일처제가 생겨났다. 즉 남성이 가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는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가 당연하지 않다는 거다. 약 5000종의 포유류 중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동물은 3~5%에 불과하다. 인류 또한 사유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를 택했을 뿐이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아니, 다양하다. 여전히 모계사회를 유지하는 민족도 있고, 일부일처제에 얽매이지 않고 함께 살며 서로를 가족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사랑의 형태 또한 그렇다. 비독점 다자연애인 폴리아모리, 무성애 정체성인 에이섹슈얼, 탈연애 등 인류는 일부일처제라는 결혼 계약 제도를 넘나들며 사랑하고 연대하고 유대한다.

결혼과 가족이란 무엇인가

전복된 성역할 속에서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박강아름은 영화를 통해 질문한다. 결혼이란 무엇이며 어떤 형태로 가족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건 계속되는 질문일 테다. 올해 결혼한 1959년생 학장은 함께 사는 사람을 남편이 아닌 파트너로 부른다. 나와 파트너는 이주라는 방식으로 환경을 바꾸며 이전과는 다른 성역할을 시도한다. 레즈비언 동기는 그동안 성소수자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결혼 계약 제도를 기꺼이 선택했다. 영화 바깥의 아름과 성만은 뒤바뀐 성역할을 지속하거나 변형하며 질문할 것이다. 결혼과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질문과 그에 따른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길보라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9) 결혼, 어디까지 해봤니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저서로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 <길은 학교다> 등이 있고, 연출한 영화로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 등이 있다. 2021년 네덜란드 정부가 세계 각국의 여성 리더에게 수여하는 젠더 챔피언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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