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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57)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에는 삼계탕을 끓이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처음에는 어머니 강정희씨가 딸 영희씨의 예비 남편 아라이 가오루에게 삼계탕을 대접한다. 사위는 처음 보는 삼계탕을 뼈까지 빨아 먹는다. 다음으로 사위는 장모와 함께 직접 장을 보고 마늘을 다듬으며 삼계탕 만드는 법을 배운다. 마지막으로 사위는 홀로 삼계탕을 끓여 장모, 아내와 함께 먹는다. 열정적인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는 생전 “미국인,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고 했지만, 이 집안의 삼계탕 손맛은 결국 일본인 사위에게 전수됐다.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수프’는 삼계탕을 의미한다. 열정적인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는 생전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고 했지만 양 감독 집안의 삼계탕 손맛은 결국 일본인 사위에게 전수됐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공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수프’는 삼계탕을 의미한다. 열정적인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는 생전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고 했지만 양 감독 집안의 삼계탕 손맛은 결국 일본인 사위에게 전수됐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공

영화 제목의 ‘수프’는 이 삼계탕을 뜻한다. 이 영화는 9일 시작하는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삼계탕과 이데올로기가 무슨 관계일까. 최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양 감독이 직접 설명해줬다.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밥은 같이 먹자’는 뜻이라 할까요. 사실 2009년 돌아가신 아버지와 제가 밥을 먹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조총련에 인생을 바친 부모님의 삶에 의문을 느꼈고, ‘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든요. 20대 때 ‘창작자가 되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게 일이냐. 일본에서 조선인이 하는 건 불가능하다. 예술가 되고 싶으면 차라리 북한 가라’고 하셨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한 달에 한 번만 아버지와 밥을 먹어달라’고 딸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함께 밥을 먹고, 아버지에게 노래 시키고, 어머니와 대화하며 조금씩 가족의 삶을 담아내다보니 10년 만에 <디어 평양>(2006)이 완성됐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굿바이, 평양>(2011) 이후 10년 만에 나온 작품이자, 양 감독의 가족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3부작의 최종편이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 개막작으로 선정된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굿바이, 평양> 이후 10년 만에 나온 작품이자, 양 영희 감독의 가족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3부작의 최종편이다.  김창길 기자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 개막작으로 선정된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굿바이, 평양> 이후 10년 만에 나온 작품이자, 양 영희 감독의 가족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3부작의 최종편이다. 김창길 기자

양 감독에게는 세 오빠가 있었다. 아버지는 1970년대 재일교포 북송사업 당시 ‘지상 낙원’인 조국에 세 아들을 모두 보냈다. 홀로 일본에 남은 어린 영희는 사실상 외동딸처럼 자랐다. 하루아침에 생활환경이 바뀐 소년들이 평탄한 삶을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던 큰오빠는 북에서 조울증에 시달렸고 2009년 사망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여전히 김일성, 김정일 부자 사진을 안방에 걸어두었다.

어머니는 일본 오사카에서 제주 출신 부모 아래 태어났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오사카를 폭격했을 때, 어머니는 부모님 고향인 제주도로 피란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제주 체류 기간에는 1948년 4·3사건이 겹친다. 양 감독은 어머니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매번 “잊었어. 묻지마”라고 신경질을 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은 잔인하다”는 말을 종종 했고, 일본 텔레비전에 나오는 K팝 가수까지 싫어했다. 오히려 아버지는 고향 제주도 노래를 종종 부를 정도였는데, 어머니는 왜 그리 한국에 치를 떨었을까.

아버지가 말년에 이르고 양 감독이 첫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를 준비하던 때였다. 한국에서 4·3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관련 연구소도 생겼다는 소식이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어느날 어머니는 “정말이냐”고 되묻더니 “사실 나 그때 거기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너한테만 얘기하는 거다. 새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는 4·3 생존자였다. 제주 체류 당시 약혼자가 있었다. 의사였던 그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돕겠다면서 산으로 들어간 뒤 사망했다. 친척 몇 명이 총검에 찔려, 개머리판에 맞아 죽었다. 제주에 남아있다가는 언제 ‘빨갱이’로 몰려 죽을지 모르는 시기였다. 어머니는 남동생의 손을 잡고, 여동생은 업고 일본으로 밀항을 결심했다. 동네 산책 나온 척 가벼운 차림으로 30㎞ 밤길을 걸어 밀항선에 올랐다. 짐이라도 들었다가 군경에 걸리면 도망치는 것이 확인돼 봉변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영화 종반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됐다. 양 감독은 “오사카 공습, 4·3 와중에 피란 다니느라 어머니 10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애니메이션은 그때의 어머니를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재일교포 북송사업 당시 세 오빠가 모두 북한으로 떠나고, 홀로 일본에 남은 양 감독은 사실상 외동딸처럼 자랐다. 어머니는 조울증에 시달리던 큰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안방에 걸어두었다. 사진은 굿바이평양 스틸컷. 키노아이DMC 제공

1970년대 재일교포 북송사업 당시 세 오빠가 모두 북한으로 떠나고, 홀로 일본에 남은 양 감독은 사실상 외동딸처럼 자랐다. 어머니는 조울증에 시달리던 큰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안방에 걸어두었다. 사진은 굿바이평양 스틸컷. 키노아이DMC 제공

영화 종반부에는 양 감독 부부와 어머니의 제주 방문 여정이 담겼다. 문재인 정부가 ‘조선적’을 가진 일본동포의 한국 방문을 허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양 감독은 한국국적을 취득했지만, 여전히 조선적을 유지하는 어머니는 일회용 여행 허가증을 받아 2018년 70주년 4·3위령제가 열린 제주땅을 밟았다. 어머니는 문 대통령이 참석한 위령제에서 놀랍게도 애국가를 따라불렀다.

다만 이미 어머니의 기억은 뚜렷하지 않았다. 거센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도 그곳이 제주인지 오사카인지 모르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2017년 4·3 연구자들에게 경험담을 증언한 이후 알츠하이머 증세가 급속히 진행됐기 때문이다. 북한에 간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세 아들이 어디 있는지, 이미 별세한 남편은 언제 오는지 묻는다. 의사가 “어머니의 말을 부정하지 말라”고 했기에, 양 감독은 매번 어머니의 장단을 맞춘다. “학교 갔어요.” “이미 잠들었어요.” “오늘 먼 효고현에 가서 늦게 온대요.” 지금도 어머니는 병원에 머물고 있다.

개인사를 담아낸 다큐멘터리지만 양 감독은 어느 장면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고,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봐야 할 때는 따로 촬영감독을 대동했다. “반은 딸로서 가족을 찍고, 반은 감독으로서 주인공 캐릭터로 괜찮을지 봅니다. 처음에는 ‘어머니 얘기만으로는 장편 다큐로 찍기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12세 연상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특이한 일본인(남편)이 나타났을 때 ‘스토리가 되겠다’고 판단했어요(웃음).”

<디어 평양>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조총련은 양 감독에게 사과와 향후 영화 제작 중단을 요구했다. 그는 “내게 영화 만들지 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이라고 말한 뒤 <굿바이, 평양>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후 양 감독은 북한 입국이 거부됐다. 일본의 부모, 북한의 오빠들 누구도 양 감독에게 영화 내용을 비판하거나 영화를 그만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래도 양 감독은 <디어 평양>을 준비하기 시작한 1995년쯤부터 가족들이 칼을 들고 자신을 쫓아오는 꿈을 지속적으로 꾼다고 했다.

“꼭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고, 어떻게 보면 내 욕심이니까…. 그래도 답은 ‘만들겠다’는 것이니, 이왕 만들 거면 ‘문제아로 유명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한에서도 ‘그집 여동생은 미친 여자니까 손대지 말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그래서 영화제도 열심히 나가고 인터뷰도 많이 합니다.”

강정희씨와 그의 딸 양영희 감독 부부는 2018년 70주년 4·3위령제가 열린 제주도를 찾았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공

강정희씨와 그의 딸 양영희 감독 부부는 2018년 70주년 4·3위령제가 열린 제주도를 찾았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공

양 감독의 경험은 다큐멘터리 감독의 자세에 대한 이론으로 이어졌다. ‘피사체를 대하는 윤리’는 다큐멘터리 역사의 오래되고 중요한 화두다.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하는 분들 중에 스스로 사회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솔직히 소름 돋았습니다. 다큐멘터리에는 배우 아닌 사람이 등장하고, 그들은 돈도 안 받아요. 영화가 끝나도 그 사람들은 계속 삶을 삽니다. 영화로 인해 여러 평가를 들을 텐데 그중에는 듣기 싫은 소리도 있잖아요. 인물들의 보석 같은 말들도 시나리오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에서 나온 겁니다. 그 삶과 말을 모아 결과가 좋으면 상은 감독이 받아요. 그게 참 뻔뻔하다는 자각이 다큐 감독에게 있어야 합니다. 설령 범죄자를 찍을 때도 그 삶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가 있어야죠. 내 아버지, 어머니의 사상은 틀리지만, 난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경의를 버리지 않습니다.”

양 감독은 “어머니가 4·3 피해자란 이야기를 듣고 ‘난 난민의 딸이구나’ 생각했다. 50이 돼서 정체성을 새로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수프와 이데올로기>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다. 양 감독의 정체성이 한반도와 일본의 비극적 현대사와 촘촘히 교직돼 있다는 점이 그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왜 이런 집의 딸일까’ 수없이 생각했어요. 무겁고 싫고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결국 해방되기 위해선 정면으로 마주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덴티티의 모든 요소를 마주보고 그에 대한 자기의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 감독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양 감독의 정체성이 한반도와 일본의 비극적 현대사와 촘촘히 교직돼 있다는 점이 그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공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 감독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양 감독의 정체성이 한반도와 일본의 비극적 현대사와 촘촘히 교직돼 있다는 점이 그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공

영화 마지막 대목에서 양 감독은 어머니 집의 김일성·김정일 부자 사진을 떼어낸 뒤 북한에서 받은 훈장을 자랑스럽게 단 아버지 사진 등 가족사진을 걸어둔다. 아버지가 생전 만들어두었던 어머니 이름의 문패도 뒤늦게 걸었다. 아버지의 유해는 북한에 묻혔고, 어머니 자리까지 그곳에 마련돼있다. 양 감독이 북한에 입국할 수 없기에,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곳으로 모실 방안을 궁리하고 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양 감독은 이 영화가 가족사 다큐멘터리의 ‘라스트 챕터’라고 했지만, 역사가 그러하듯 다큐멘터리도 이어질지 모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내년쯤 국내 극장 개봉도 추진 중이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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