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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대한민국 여성 1호 건축사 지순(86)이 지난 21일 별세했다. 아이 셋을 둔 주부가 여성 최초 건축사가 됐다는 소식이 몇몇 일간지를 장식했던 것이 54년 전 일이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최초’라는 타이틀은 늘 지순을 따라다녔다. 그 책임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대한여성건축사회 초대회장까지 맡았던 그는 수천명의 여성 후배들을 ‘아이들’이라 불렀다. 여성 건축계에 첫 획을 그은 발자취를 기리며 플랫팀이 지순의 생전 인터뷰를 다시 소개한다.



<이 글의 원문은 2014년 1월 27일 작성됐습니다>



강단에서 가르친 제자가 얼마 전 65세로 현역에서 은퇴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고 한다. 장충체육관 인근에 자리한 간삼건축 7층 지순 상임고문의 방은 희소식이 모이고 때로는 고민과 상담이 벌어지는 건축인들의 사랑방이다. 나이 먹으니 조용히 살고 싶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봐주고, 얘기해주고, 대변해줘야 하는 ‘아이들’ 때문에 ‘건축계 대모’의 하루는 금세 간다.

1967년 아이 셋을 둔 주부가 여성 최초 건축사가 됐다는 소식이 몇몇 일간지를 장식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최초’라는 타이틀은 늘 지순 고문을 따라다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7년 아이 셋을 둔 주부가 여성 최초 건축사가 됐다는 소식이 몇몇 일간지를 장식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최초’라는 타이틀은 늘 지순 고문을 따라다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500명의 후배보다 앞선 ‘최초’의 책임감



1월 초 발표된 2013년 건축사 자격시험 결과, 29세 여성 신명숙씨가 최고 득점을 기록했다. 아이 셋을 둔 주부가 여성 최초 건축사가 됐다는 소식이 몇몇 일간지를 장식했던 것이 지난 1967년의 일이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최초’라는 타이틀은 늘 지순 고문을 따라다녔다. 그 책임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대한여성건축사회 초대회장까지 맡았던 지 고문에게 1천5백여 여성 건축사 후배들은 자식이나 진배없다.

“내가 건축사 라이선스를 받고도 한 10년간 여성은 저 혼자였어요. 제일 나이가 가까운 여성 건축사가 아직 70이 안 됐어요. 이 사람들하고 차이가 많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저를 대모라고 얘기해요. 내가 건축계에서는 발이 넓으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직접 가서 봐주고, 협조도 받아주고, 우리 아이들 입장 대변도 해주고. 그것만 해도 바빠요.”

올해 나이 80세.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서 조용히 살고 싶어 그동안 관여하던 몇몇 협회의 신년 하례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면서도 ‘아이들’ 이야기에는 절로 힘이 실린다. 지 고문은 건축을 천직이라고 말한다. 20년 간 몸담았던 연세대 주생활학과 교수 시절이나 570여 명의 직원을 둔 간삼건축의 상임고문으로 있는 지금이나 늘 강조하는 것이 “천직 의식을 가져라”라는 것이다. 건축사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7년간의 실무 경력이 있어야 한다.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는 여성들은 기본 요건을 갖추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천직 의식’ 덕에 지 고문은 딸 넷을 낳고도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디자이너로서, 건축가로서 이 사회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천직 의식을 가짐으로써 조금 공백이 있더라도 또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거죠. 그게 없으면 일을 버리게 되잖아요. 난 건축을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아이 낳고 누워서도 도면을 본 사람이에요.”

”건축사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7년간의 실무 경력이 있어야 한다.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는 여성들은 기본 요건을 갖추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그는 늘  “천직 의식을 가져라”라고 말한다.‘천직 의식’ 덕에 지 고문은 딸 넷을 낳고도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건축사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7년간의 실무 경력이 있어야 한다. 결혼, 출산, 육아를 거치는 여성들은 기본 요건을 갖추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그는 늘 “천직 의식을 가져라”라고 말한다.‘천직 의식’ 덕에 지 고문은 딸 넷을 낳고도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농학자인 아버지는 학업 성적, 특히 수학에 뛰어났던 딸이 의대에 진학하기를 원하셨다. 이과 여학생이 공부를 잘하면 의대 혹은 약대 진학이 자연스럽던 때였다. 그런데 의사인 사촌 언니의 얘기를 들어보니 만날 환자만 보고 재미는커녕 고생만 하는 것 같았다. 그림 좋아하는 동생에게 건축 관련 잡지를 사 나르던 법대생 오빠 덕에 마음을 굳힌 지 고문이 서울대 건축학과 입시 준비 무렵부터 시작된 반대는 졸업 후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건축사무소에 근무할 때까지 이어졌다. “빠 걸(Bar Girl)이나 밤에 댕기지, 어디 여자가 밤에 댕기느냐”라는 성화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벗어날 수 있었다. 하긴 사위까지 건축가였으니, 포기라고 봐도 좋겠다. 지 고문은 1959년 가을, 같은 과 1년 선배 원정수(81) 간삼건축 상임고문(인하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과 결혼식을 올렸다.

건축에서 중요한 건 얼마만큼 마음을 쏟느냐다



지 고문은 요즘 말로 치면 ‘공대 아름이’였다. 건축학과가 있던 서울 시내 3개 대학교를 통틀어 여학생이라곤 다섯 손가락으로 꼽던 시절이었다. 워낙 주목받는 여학생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에 “글쎄, 모르죠”라며 미소만 지을 뿐인 지 고문을 사로잡은 원 고문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원 선생하고 가까워진 건, 그때 작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예요. 서로 열심히 했거든요. 그 열심히 하는 모습에 마음이 간 거예요. 건들건들 잘난 척하고 과시하고 그런 거 없이 진실하게 건축만 하는 거, 나도 어리고 순진했으니까 그게 좋았던 거예요. 가끔씩 농담으로 그러죠. 좀 더 정치적인 사람을 만났으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고(웃음), 건축밖에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해서 내가 더 힘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에요(웃음).”

그런 남편이기에 출산 1주일 만에 건축 도면을 펼쳐드는 아내에게 눈치 한 번 주지 않았을 것이다. 원 고문이 큰 구상을 하면, 지 고문이 계획 설계를 하며 부부는 지난 세월 최고의 파트너십을 구사했다. 1969년 한국 최초의 부부 건축전으로 도움닫기를 하고, 1983년 간삼건축을 설립하며 날개를 단 부부 건축가는 한국은행 본점, 동숭아트센터, 국회의장 공관, 삼성 태평로빌딩, 서울역 세브란스 빌딩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쏟아냈다. 1995년에는 국내 최초의 인텔리전트 빌딩 포스코센터로 건축의 미래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가장 아끼는 작품이 무엇이냐는, 그동안 수없이 받았을 그 흔한 질문에도 지 고문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조그마한 것에도 애정이 무척 많아서”라고 했다. 반면 열 손가락 중 아픈 손가락에 대한 기억은 또렷했다. 1968년 대한주택영단(현 한국토지주택공사) 근무 시절, 고 육영수 여사의 권유로 서울 창신동에 양지회 회관을 설계했다. 여성 직업교육을 위한 숙소 겸 교육장으로 사용된 이 건물은 건축가 지순으로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큰 의미가 있는 건물의 경우 외국 같으면 헐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는 많고 땅은 좁고 게다가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앞으로 미래 건축은 에너지 절약형으로 갈 거예요. 우리에게 에너지는 절대적이니까요. 또 실리를 추구할 거예요. 벌써부터 아파트가 너무 크면 안 팔리잖아요. 한때 우리가 건설 붐에 휩쓸려 무감각해져서 그리 지은 거예요. 한때는 집이 재산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삶의 방식과 경제 능력에 맞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지순 건축사 부부가 함께 작업한 포스코센터는 건축의 미래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간삼건축 제공

지순 건축사 부부가 함께 작업한 포스코센터는 건축의 미래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간삼건축 제공

2003년 간삼건축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뒤에도 지 고문은 남편과 함께 출근길에 나선다. 하지만 퇴근을 같이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각자 스케줄이 바쁜 탓이다.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원 고문은 현장에 나간 참이라고 했다.

“경험이 많으니까 혹시 설계가 잘못되거나, 건축주가 다른 걸 원하거나, 자재를 달리 쓴 게 있을까 봐 가서 봐주는 거죠. 나이를 많이 먹고 적게 먹고 간에 건축이라는 것은 자기가 얼마만큼 거기에다 마음을 쏟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50년을 하루같이 써온 감각은 무뎌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잘 벼린 칼날처럼 형형한 눈빛을 여전히 간직한 부부 건축가가 한창 때 현장을 누비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맡는 일이 점점 대형화되면서 설계 진행, 공정 관리, 사무실 운영 등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지 고문은 건축 현장에서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환영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건축주의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소통하는 데 강점을 발휘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원 고문은 “지순 없는 원정수는 상상할 수 없고 원정수 없는 지순은 무의미해진다”라고 말했다. 진부한 질문이 또 나갈 수밖에. 다시 태어나도 원정수를 택하겠느냐고.

“(웃음) 글쎄요.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니까. 그동안 나 나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었고 지금까지 잘 왔으니까요.”

이 멋들어진 표현에 비하면 “당연하죠”라는 대답은 얼마나 경박한 것인가. 요즘은 부부 사이에서도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캠퍼스 커플로 만나 업무 파트너로 평생을 지내온 부부에게는 그래서 물어볼 것도 더 많은 법이다.

“젊어서는 다툴 일도 많았어요. 서로 의견이 다른 게 부지기수였으니까요. 나이 들어서는 분야를 자꾸 갈랐어요. 건축 쪽에 분야가 상당히 많거든요. 잘 지내는 비결이라는 거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는 거예요. 어느 사람이나 장단점이 있어요. 그래서 따지고 보면 똑같아. 그러니까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돼요.”

엄마를 닮아버린 네 딸은 ‘커리어 우먼’



사실 이번 인터뷰는 바이올리니스트 원혜원씨가 아니었다면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앞서 언급한 네 딸 중 셋째로 인터뷰를 주저하는 어머니를 설득해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에 대한 불평이 참 많았던 걸로 생각했어요. 특히 둘째가 그랬어요. 연세대 가정대학, 지금의 생활과학대학에 입학시켜놨는데 학교 행사에서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간이 있었죠. 그 자리에서 자기는 절대 직업부인은 안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 엄마는 만날 일만 하느라 바쁜데,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생일이면 음식을 만들어서 친구들을 초대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더라’라면서요. 그런데 지금은 더 직업부인이 됐어요(웃음).”

통신기업 에릭슨에 근무하는 둘째 원선씨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 중이다. 사회학을 전공한 첫째 원순영씨와 그래픽 디자이너인 막내 원혜성씨는 미국에서 역시나 ‘커리어 우먼’으로 살고 있다. 25년을 함께 산 시어머니는 “우리는 옛날 사람이라 공부를 못했지만, 이제는 여자도 공부해야지”라며 손녀딸들을 돌봐주셨다. 바깥 일 하는 며느리를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시어머니와 둘째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셋째를 일곱 살까지 길러주신 친정어머니가 계셨기에 아이 낳기 직전까지 일하다가 병원으로 달려가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저는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걸 시켰지, 하나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부모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갑작스럽게 과외가 금지돼 혼란스러웠던 제5공화국 당시, 레슨 선생님이 녹음테이프를 보내준 덕분에 줄리아드 음대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원혜원씨의 무용담에도 지 고문은 “애들은 저절로 컸어요”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엄마를 둔 원혜원씨는 두 아들을 학원 한 번 보내지 않고도 원하는 진로를 척척 찾아준 ‘희귀한’ 대치동 엄마로 살고 있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그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에 재학 중인 큰아들로부터 ‘한예종 아티스트 패밀리’ 1호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했다. 작곡가였던 작고한 할아버지 외에도 CF 감독 아버지 그리고 건축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든든한 토양이자 자부심인 듯했다.

“내가 택한 일이니까 평생을 온 거예요.”



지 고문은 석 달 전부터 실버타운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도 현역처럼 활동하고 있는 부부에게는 장볼 걱정, 청소 고민 없는 그곳 생활이 편하다고. 부부 건축가가 그동안 직접 지은 내 집을 갖지 않았다는 게 의아할 정도다.

“대장간에 식칼 없다고(웃음), 우리는 집에 가면 쉬고 싶거든요. 대개의 건축주들을 보면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집을 짓는 거지, 건축가가 자기 집을 짓기 위해 몰두하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한창 주택 건축 붐이 일었을 때 ‘이름’을 빌려달라는 업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집 장수’를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한창 주택 건축 붐이 일었을 때 ‘이름’을 빌려달라는 업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집 장수’를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한창 주택 건축 붐이 일었을 때 ‘이름’을 빌려달라는 업자들도 많았다. 공사를 하고, 시공에 나서야 돈을 번다는 얘기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집 장수’를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고.

“건축이 참 어려워요. 디자인적으로도 만족스러워야 하지만 그 공간을 쓰는 생활인이나 사회에도 만족을 줘야 하거든요. 나는 건축이 이렇게 고생스러운 건지 모르고 뛰어들었지만 내가 택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여기면서 평생을 온 거예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스레 택한 전공이자, 평생을 매혹시켰던 건축의 마력은 실은 화려하지는 않았다. 공간의 주인공을 만족시키는 것, 그만한 쾌감은 없다고 했다. 올해 꼭 바라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는 사무실 직원들의 건강부터 챙겼다. 열심히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요새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거에 감사해요. 모든 걸 하늘의 뜻으로 돌릴 수도 있고, 우리 직원들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어딘가에 기도할 수도 있고요. 자기 전에 기도를 하면서 오늘 하루를 잘 보냈나, 생각해봐요. 남한테 서운하게 한 일이 있나, 남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나, 또 내가 최선을 다했나. 그렇게 죽 지내다 보니 결국은 그게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한창 일에 쫓길 때는 “오늘은 쉬자”라며 예배를 거르던 원 고문도 요즘은 일요일이면 함께 명동성당에 간다.

“나를 위한 기도는 딱 하나예요. 이렇게 지금껏 활동할 수 있게 건강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16년 전 신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도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하겠다던 지 고문의 의지를 누구도 꺾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조언에 천직 의식 외에 건강관리가 추가됐을 뿐. 스스로 고집이 세다고 밝히는 지 고문의 말을 ‘한결같음’이라고 받아 적었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충실히 사는 것’. 인터뷰를 앞두고 어렵게 찾아낸 빛바랜 30년 전 기사에서 본 문구를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음성으로 들으면서 순간 나의 30년 뒤를 떠올렸다. 나에게는 이토록 오랜 세월 스스로를 지탱할 삶의 신조가 있는가, 하고.


장회정 기자 longcut@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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