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도시빈곤·노동현장 부조리 되새긴 ‘시대의 자화상’읽음

선명수 기자

제29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 인터뷰

제29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인 김정현씨(시 부문), 정경진씨(단편소설 부문), 김설영씨(생활글 부문·왼쪽부터)를 지난 26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르포 부문 이행림씨는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해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제29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인 김정현씨(시 부문), 정경진씨(단편소설 부문), 김설영씨(생활글 부문·왼쪽부터)를 지난 26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르포 부문 이행림씨는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해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전태일 열사의 삶과 글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된 전태일문학상이 올해 제29회째를 맞았다. 노동 현장의 부조리 속에서 삶의 고단함을 적어내린 전태일의 일기가 한 시대의 기록이 되었듯, 어떤 이들의 삶은 곧 글이 돼 세상을 또렷이 비춘다. 올해 수상작 또한 ‘전태일문학’이란 취지에 맞춤했다. 노동 현장에서 느낀 분노와 설움, 개인의 삶에 남은 시대적 상처를 들여다본 글들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전태일재단과 경향신문이 공동 주최하는 올해 전태일문학상 수상자들을 지난 2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단편소설 ‘영국여인숙’을 쓴 정경진씨와 시 ‘세상 맨 끝 방’ 외 3편으로 당선된 김정현씨, 생활글 ‘구직 실패기’를 쓴 김설영씨가 올해 수상의 주인공들이다. 르포 부문 수상자인 이행림씨와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다. 단편소설 부문 심사는 김이정·김종광·이수경 소설가가, 시 부문 심사는 문동만·안현미·김현 시인이, 생활글과 르포 부문 심사는 송기역·안미선·은유 작가가 각각 맡았다. 수상작은 제16회 전태일청소년문학상 수상작과 함께 묶여 조만간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 단편소설 부문 정경진

국가폭력·도시빈곤·노동현장 부조리 되새긴 ‘시대의 자화상’

우리가 지켜야 할 존엄에 대해 고민하면서
아픔 치유할 수 있는 글쓰기 하고 싶다

소설은 어느 토요일, 오래 전 살던 도시로 향하는 모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 가족이 과거 이 동네에서 운영했던 ‘영국여인숙’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바람 때문이다. 이따금 치매 증상을 보이는 노모와 세 자매의 평범한 주말 나들이처럼 시작되는 소설은 수십년 전, 이 도시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 드러나며 이내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올해 전태일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수상작인 ‘영국여인숙’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그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현재에서 출발해 1980년 광주로 독자를 데려간다. 정경진씨(47)는 “7살이던 그때 광주에 있었고, 이후 청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냈다”며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상흔으로 남아 있는, 아프다고 소리내 말하지 않지만 계속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집단적인 상처에 대해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평범하고 조용한 주말 오후의 침묵 속에서 누구도 쉽게 꺼내지 못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가족들은 일상적인 대화 외에 누구도 그 때의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이는 결코 망각이 아니라 “고요로 위장했던 세월들이 쌓여 깊은 슬픔이 되었”던 비극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영국여인숙은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자 트라우마의 장소다. 여인숙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목격자이면서 세 딸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이를 외면했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뒤 다시 그곳을 찾는다. 정씨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도 내 새끼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구해주지 못했던 죄의식이 노모의 마음 속에 평생 남아 있었을 것”이라며 “그 근원적인 죄책감과 수치에 대한 얘기”라고 말했다.

심리치료 전문가인 정씨는 3년 전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켄 로치 감독을 좋아하는데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소설 쓰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며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누구나 겪게 되는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고 소화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소설을 쓰는 저 자신도 끝까지 존엄성을 지키면서 글을 쓰고 살고 싶어요. 우리가 지켜야 할 존엄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는 글쓰기를 하려고 합니다.”

■ 시 부문 김정현

국가폭력·도시빈곤·노동현장 부조리 되새긴 ‘시대의 자화상’

세상 끝으로 내몰리는 오늘날의 개인들
미약하고 사소한 것에 깃든 삶의 이야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새기려 할수록 점점 지워져만 갔다 내 몸 곳곳/ 허기(虛飢)의 냄새 같은 게 통증처럼 쌓여 있었다 지하철 한구석,/ 한나절 깨부쉈던 건물 부스러길 입안 가득 우물거리다 집 앞까지 오면/ 어느새 밤의 입구였다 (…).”

시 당선작 ‘세상 맨 끝 방’은 유려하면서도 쓸쓸한 언어로 세상의 끄트머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음 언저리 슬며시 켜졌던 어떤 불빛은 내가 불어보기도 전에 꺼져버렸”고, 절벽 꼭대기의 방 한 칸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은 “푸르스름하게 입 벌린 채로 혼곤히 잠들어 있는 무저갱처럼” 보인다.

시 부문 수상자인 김정현씨(40)는 “재개발되지 않은 동네의 언덕 위에 있는, 아는 형님의 방에서 시를 떠올리게 됐다”며 “그 방에서 가끔 형님과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그 공간이 주는 느낌과 삶의 이야기, 이런저런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합쳐져 이 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2018년 시 ‘물의 악공들’로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시를 써 왔고, ‘세상 맨 끝 방’ 외 3편의 시로 올해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씨는 “신춘문예 당선 때도 너무 기뻤지만, 이렇게 몇 년이 지나 상을 받게 돼 감사하다”며 “계속 묵묵하게 시를 써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세상의 맨 끝으로 계속해서 내몰리는 오늘날의 개인 이야기를 담은 시는 “행과 연의 갈이, 문장 부호 하나 허투루 쓰인 것이 없었다”는 심사평을 받으며 올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심사위원들은 “‘세상의 맨 끝 방’이라는 물음은 과거의 것이며 오늘의 것이고 동시에 미래를 향한 물음이기도 했다”면서 “우리는 시인의 그 물음과 물음표에 설득됐다”고 평했다.

김씨는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미약하고 사소한 것들에도 어떤 삶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 이야기를 통해 지금 시대의 자화상 같은 것들을 내보이고 싶었는데, 그런 마음이 미약하게나마 심사위원분들께 전해져 이 상을 받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지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제 일을 좋아해요. 환자분들과 가까이에 있으면서 때로 그분들께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소망이 있다면 일과 시 쓰는 노동을 앞으로도 병행하고 싶어요. 제가 느낀 것, 경험한 것들을 정직하게 계속 써나가려고 합니다.”

■ 생활글 부문 김설영

국가폭력·도시빈곤·노동현장 부조리 되새긴 ‘시대의 자화상’

흔하디 흔한 ‘경단녀’인 나의 구직 실패기
사회에 대한 분노가 나를 글쓰기로 이끌어

“저에게 큰 용기가 된 소식이었어요. 이제 할 일이 생겼구나, 오랫동안 내려놓고 있던 글을 다시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상입니다.”

‘구직 실패기’로 생활글 부문을 수상한 김설영씨(51)는 이번 전태일문학상 수상이 오랜 꿈이었던 소설 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용기가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구직 실패기’는 스스로를 “나이도 많고 특별한 기술도 경력도 없는 흔하디 흔한 경력단절 여성”이라고 밝힌 그의 구직 경험담을 솔직하고 재치있게 담아낸 에세이다. 가게에서 과일 상자를 나르는 일부터 ‘콜’ 수가 곧 실적이 되는 고객관리센터 상담원, 보험회사의 서류관리 직원, 병원 보조원, 마트 계산원까지. 일자리를 찾으며 접한 여러 노동현장의 현실과 그곳에서 마주한 크고 작은 갈등과 모순, 거기서부터 비롯된 낙담을 생생하게 기술했다. 화자는 각종 생활정보지와 사이트의 구인공고를 살피며 “이토록 많은 곳에서 사람을 구하는데, 이 많은 일자리 중 내가 비집고 들어갈 곳이 한 군데쯤 없겠는가”라고 기대를 갖다가도 막상 구직이 쉽지 않자 “내 이력서는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든 꽃잎, 말라 비틀어진 낙엽 한 장의 가치조차 없어”라고 낙담하기도 하고, 마침내 구한 일자리에서 부당한 일을 겪자 목소리를 높이며 그곳을 박차고 나오기도 한다. 김씨는 “전업주부 생활을 오래 하다가 몇 년 전부터 어떤 일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여러 일자리를 거치며 그때 그때 메모했던 것들을 다듬고 묶어 이 글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김씨는 졸업 이후 오랫동안 글 쓰는 일을 놓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마음 깊숙이 담아만 놓고 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한 것은 ‘분노’였다고 한다. 김씨는 “주휴수당 문제로 점장과 다투다 마트를 그만뒀는데, 사실 점장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에 화가 났다”며 “쌓이고 쌓여 부글부글 끓는, 속이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글쓰기에) 20년의 공백이 있으니 이제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인 임철우 선생님이 언젠가 가슴 깊은 곳에서 이야기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그리움을 잃으면 글이 나오지 않으니 살면서 그리움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주셨던 게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이 끝까지 읽게 되는, 흡인력 있는 저만의 글쓰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 르포 부문 이행림

아픈 가족사 더듬으며 만난 현대사의 비극
힘겹고 외롭게 살다 가신 아버지께 죄송해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러나 수백만의 죽음은 하나의 통계일 뿐이다.’ 스탈린이 남긴 이 말에 따르면 내 할아버지의 죽음은 통계다. 하지만 나에게도 할아버지는,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아버지는 한 사람뿐이므로 비극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비극으로도 통계로도 잡히지 못하고 땅에 묻혔다.”

르포 부문 수상작 ‘갈매기섬엔 갈 수 없다’는 진도 갈매기섬(갈명도)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할아버지의 자취를 추적하며,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족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담아낸다. 이행림씨(43)는 “제 아픈 가족사를 더듬어가면서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만났고, 그것을 한 편의 글로 옮겨 상까지 받고 보니 기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좀 복잡한 기분”이라며 “하지만 이번 수상이 제 생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선물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쓰겠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씨는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2016년 법원 판결이 나오고서야 할아버지가 이 사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판결을 보지 못한 채 “너무 빨리 가버린 아버지와 너무 늦게 찾아온 진실”이 그를 이끌었다. 이씨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니 할아버지 죽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죽음이 보였고, 제2, 제3의 갈매기섬과 그 뒤를 잇는 너무나 많은 학살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사’라고 하지만 그것이 정녕 과거사인지 모르겠다”며 “과거, 과거지사는 가해자들의 용어일 뿐 피해자들에겐 현재까지도 이를 갈고 치를 떨게 만드는 현재의 고통이고 비극”이라고 했다.

작품에는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야 했던 가족들, 그중에서도 평생 술에 의지했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담겼다. 그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괴롭혀야 할 쪽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비극을 기획하고 연출한 자들이어야 했는데, 그것은 줄기차게 아버지를 따라붙었다”고 썼다. 이씨는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를 원망하는 순간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라면서 최소한의 물과 햇빛도 공급받지 못한 채 감시와 멸시만 받아온 아버지께 왜 다른 아버지들처럼 꽃 피우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냐고 비난한 꼴이 아니었나 싶다”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날의 트라우마를 안고 힘겹고 외롭게 살다 가신 아버지께 죄송했다는,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는 전태일문학상 수상작을 엮은 책이 나오면 그 책을 들고 해남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를 찾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너무 이르게 가셨지만, 그 이름만큼은 묻히지 말고 다시 세상 빛을 보시도록 할아버지 이름 석자를 이렇게 책에 담았다고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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