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장 넘는 종이에 빼곡히···칠곡할매, ‘꼴’좋네!

김태훈 기자

경북 칠곡군 할머니 글씨 본떠 만든 '칠곡할매글꼴'

지난 5월부터 소프트웨어 탑재…인기에 굿즈 발매도

칠곡할매 글꼴을 만든 할머니들이 자신의 글씨가 담긴 푯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칠곡군청 제공

칠곡할매 글꼴을 만든 할머니들이 자신의 글씨가 담긴 푯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칠곡군청 제공

“한석봉이처럼 내가 글자 잘 써서 쓴다 카는데 내가 뭣이 잘 쓰노. 폰트 나오면 자식들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지.”(김영분 할머니)

“폰트가 뭐꼬? 똑같이 잘 쓰고 싶은데 손도 떨리고 와이래 잘 안 되노. 영어는 와이래 꼬불랑거리고. 손이 내 맘대로 안 된다 카이.”(이원순 할머니)

“글씨를 더 예쁘게 써야 안 되나 했는데 아닌가 봐. 그냥 쓴 게 더 좋다대. 아직도 이해는 안 돼. 내 글씨가 뭐 이쁜공.”(추유을 할머니)

“한 번 할 때마다 열장쓱 했다. 두시간씩 걸렸지. 한글은 적겠는데 영어는 잘 몬하겠더라. 이거 적는다고 한글 안 이자뿌고 지냈다.”(권안자 할머니)

“글자를 썼다가 지웠다 하도 하이끼네 볼펜 3개 이거는 금방이라. 다 쓰고 세알려보니까 7개 썼드라.”(이종희 할머니)

할머니들은 한글을 다 배우고도 글씨 연습을 계속했다. 넉달 동안 2000장 넘는 종이에 빼곡히 글자를 채웠다. 글꼴(서체) 제작업체는 할머니들의 글씨로 글꼴을 만들었다. 경북 칠곡군에 사는 다섯 할머니의 글씨를 본떠 만든 ‘칠곡할매글꼴’은 각 할머니의 이름을 딴 ‘권안자체’, ‘추유을체’, ‘이종희체’, ‘김영분체’, ‘이원순체’ 다섯종류로 구성됐다. 할머니들의 손글씨가 디지털 세계의 글꼴로 변신하면서 지난 5월부터 한컴오피스나 MS워드 같은 소프트웨어에도 탑재됐다.

칠곡할매글꼴의 인기에 주목한 칠곡군에서는 한글날을 맞아 아예 기획상품(굿즈)까지 내놨다. 삐뚤빼뚤하지만 정감 있는 글씨를 넣어 만든 병풍, 술잔, 부채 등 30여종의 상품을 기획해 전시하고 있다. 10월 6일 칠곡군청에서 열린 전시 첫날엔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의 손자 최홍식 연세대 명예교수도 참석했다. 최 교수가 “칠곡할매글꼴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국으로 퍼졌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네자 추유을 할머니(87)는 “일제강점기 때 한글을 지키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대중화에 힘쓴 고 최현배 선생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자신이 직접 재배한 햅쌀을 최 교수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글꼴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할머니들이 자신만의 글꼴을 갖게 된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의 영향이 컸다. “코로나19 때문에 문해교실로 모이는 것도 주춤한 상황에서 할머니들 글씨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길이길이 남는 추억으로도 만들 방법이 뭐 있을까 고민을 했죠.” 칠곡군 교육문화회관에서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한선혁 계장은 논의 끝에 글꼴 제작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한글 말고도 알파벳과 숫자까지 포함해 종이 한장마다 빼곡하게 글씨를 채워나갔다. 획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려 네임펜을 썼는데 할머니 한명이 7~8개씩 펜을 다 쓸 정도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한 계장은 “특히 영어 알파벳이 할머니들한테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림 그리듯 글자를 그려내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말했다.

글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신만의 글씨를 디지털 기기 화면 위에도 나타낼 수 있게 해주는 자작 글꼴을 만드는 이들도 늘고 있지만 사실 이 작업이 쉽지만은 않다. 전문적으로 글꼴을 구상하고 제작하는 글꼴 디자이너가 작업해도 3~4개월 걸리는 일이다. <글자 속의 우주>라는 책을 쓴 한동훈 글꼴 디자이너는 “우선 기초 콘셉트를 잡고 중심이 되는 예시 글자를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영어 알파벳 문자가 대·소문자 각각 26자씩 52자만 만들면 되는 것에 비하면 한글은 최소 2350자부터 만들어야 하므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한글 자모의 모든 조합을 고려해 만들 경우 최대 1만1172자가 파생되고 여기에 어울리는 알파벳과 기타 기호까지 포함해야 한글 서체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다.

쓰는 입장에서는 무료글꼴 파일을 내려받기만 하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쉽게 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아름답거나, 읽기 편하거나 또는 정감이 가는 여러 글꼴은 글자를 읽는 맛을 더한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글을 읽는 비율이 늘어난 이 시대에 오히려 아름다운 글꼴을 찾는 수요가 늘어난 것도 인쇄 매체로 글자를 볼 때와는 또 다른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글 디자인 전문 스타트업인 이도타입의 대표 이도희 디자이너는 “다수의 이용자가 쉽게 받을 수 있는 무료글꼴을 이용하고 있지만 유·무료를 가리지 않고 글꼴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도타입은 심미성과 가독성 가운데 가독성에 보다 중점을 두고 누구나 읽기 편한 글꼴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여기엔 한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흔히 ‘부리’라고 부르는 획 끝부분의 ‘삐침’을 쓸지 말지, 각각의 자모 사이 간격은 얼마나 넓힐지 좁힐지, 획마다의 굵기는 어느 수준에 맞출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의 가설을 세운 다음에 가설을 검증하는 데 필요한 글꼴 비교군을 만드는 거죠. 그래서 수십명의 사람에게서 얼마나 잘 읽히는지 데이터를 모아요. 단지 디자이너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만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런 검증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요.” 이도희 디자이너는 글꼴 역시 ‘상품’이기 때문에 시장의 수요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게 면밀히 검토한 뒤에야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글자 디자인 듀오 ‘글자동경’의 한동훈, 오경섭 디자이너가 한글의 조형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려 만든 한글 레터링 모음 / 글자동경 제공

글자 디자인 듀오 ‘글자동경’의 한동훈, 오경섭 디자이너가 한글의 조형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려 만든 한글 레터링 모음 / 글자동경 제공

■시대 따라 ‘대세 글꼴’ 바뀐다

이렇게 세상으로 나온 각각의 글꼴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행을 탄다. 한글 글꼴 디자인의 역사는 한자나 알파벳보다 짧지만 그만큼 역동적인 변화를 거쳐왔다. 최근 유행하는 대표적인 글꼴은 ‘격동고딕’, ‘HG꼬딕씨’ 등 네모틀을 꽉 채운 고딕 글꼴이다. 한동훈 디자이너는 “각종 광고나 유튜브에 필요한 주목성 높고 강한 인상의 서체에 이들이 적절히 맞아떨어져 2010년대 초반 이후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며 “서체 유행은 순환하기 때문에 이 흐름에 질리면 다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모양의 글꼴이 더 널리 쓰일 때는 사회적인 요인도 작용한다. 현재는 ‘부리’가 없는 고딕에 글자마다 면적이 같은 네모틀 글꼴이 유행하지만 1990년대 초에는 탈네모틀이 유행하며 한글 디자인계에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현재까지도 한글 글꼴 디자인 분야에서 상징적인 입지를 지키고 있는 안상수 디자이너의 안상수체를 비롯해 공한체, 샘물체 등이 문민정부의 출범과 맞물려 사회에 불어온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크게 유행했다.

반면 글자를 어떤 매체를 통해 접하는지에 따라 독자들의 선호도가 바뀌는 매체적 요인도 있다. 가령 한자를 보면 갑골문에 글자를 새겨야 하던 시절 등장한 전서와 이후 진나라의 통일왕조 출현 이후 만들어졌다는 예서는 다르다. 예서는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 죽간이나 비단에 글씨를 쓰는 상황에 맞게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자 글꼴로 가장 익숙하게 여겨지는 해서와 행서는 종이에 붓으로 쓰게 되면서 발전한 글꼴이다. 가장 많이 흘려 쓴 초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차이는 라틴 문자나 키릴 문자 등의 알파벳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이 직접 글씨를 필사하고 돌이나 나무에 글자를 새겨넣던 시절보다 아름답게 글자를 꾸미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세리프(Serif)’였다. 세리프는 한글이나 한자의 ‘삐침’ 또는 ‘부리’와 비슷하다. 세리프를 쓰지 않은 글꼴을 한데 묶어 ‘산세리프(Sans serif)’로 부르는 것도 세리프의 유무가 알파벳 글꼴의 모양을 좌우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컴퓨터 화면에서 구현할 수 있는 화소수가 지금만큼 많지 않고 해상도가 낮았던 시절에는 어떤 문자를 막론하고 산세리프의 특성을 가진 글꼴이 화면을 장악했다. 이도희 디자이너는 “인쇄 매체 역시 종이의 질이 좋지 않던 시절엔 잉크가 번지기 때문에 각각의 글자 획이 가늘게 디자인되는 것이 추세였다”며 “그러나 현재는 스마트폰조차 아주 선명한 디스플레이를 달고 나오는지라 이렇게 획이 가늘면 읽을 때 눈이 부시는 단점이 있어 다시 굵은 획 글꼴이 더 나은 가독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손글씨 기초한 ‘자작 글꼴’ 열풍

‘부리’ 또는 세리프가 달린 글꼴이 다시 주류로 등장하는 데도 글꼴 제작이 이미 디지털 환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해상도 화면이 널리 보급된 점이 작용했다. 안상수 한글 디자이너를 비롯해 20여명의 글꼴 전문가들이 네이버와 함께 기획에 들어가 올해 한글날을 맞아 완성본을 공개한 ‘마루 부리’ 5종 글꼴도 부리가 달린 ‘부리꼴(명조체)’ 글꼴이다. 2018년부터 4년간 진행된 이 ‘마루 프로젝트’에 약 6만명이 참여한 결과 부리 없는 ‘민부리꼴(고딕체)’에 편중된 화면용 글꼴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마루 프로젝트 총괄 디렉터를 맡은 안상수 디자이너는 “종이보다 디지털 화면에 익숙한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를 위해 한글의 현대적인 아름다움, 익숙한 가독성을 마루 부리에 담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손글씨 역시 부리를 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손글씨에 기초한 자작 글꼴의 유행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자작 글꼴을 만들어 자신의 블로그에서 배포하고 있는 블로거 이현영씨(32)는 간단한 프로그램 사용법만을 익힌 뒤 ‘나만의 글꼴’을 만들었다. 폰트랩 스튜디오나 글립스 같은 전용 프로그램을 갖추면 보다 더 제작이 쉬워진다. 이후 기본적인 한글 글자를 꾸준히 만들어낸 뒤 각각의 글자 원본들을 모아 폰트 파일로 만드는 작업을 거치면 완성된다. 이씨는 “점점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줄어들고 있어서 인쇄된 글자를 볼 때만이라도 내 원래 글씨를 담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한글 글꼴 중 가장 고전적인 글꼴이라는 인상을 주는 ‘궁서체’ 역시 조선시대 궁 내부 사람들이 붓글씨로 썼던 ‘궁체’를 바탕으로 만든 글꼴이다. 현재 불고 있는 손글씨 글꼴 열풍의 원조인 셈이다. 붓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획이 특징이어서 진지한 느낌을 준다. ‘신언서판’이라며 사람마다 다른 글씨를 그 사람을 보는 잣대로 쓰던 조상들의 인식 역시 지금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훈 디자이너는 말했다. “서체에는 그 기원이 일정 부분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런 뉘앙스를 보통 사람들도 어느 정도 느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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