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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바꾸는 자리까지는 무조건 버틸 생각" 여성 오마카세 셰프의 다짐[플랫]

[출근하는 여자들] 여성 오마카세 셰프 이슬기



75년간 도쿄의 작은 가게에서 오로지 맛과 품질에만 집중했던 오노 지로는 일본 최고의 ‘스시 장인’으로 불린다. 가업을 물려받은 그의 큰아들에게 월스트리트저널 기자가 물었다. “당신 가게에는 여자 직원이 왜 한 명도 없습니까.” 아들 장인은 진지하게 답했다. “여성이 생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배란주기에 따라 미각이 불균형하기 때문에 여성은 초밥 요리사가 될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사회적으로 도전받지도 않은 편견은 ‘전통’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지금도 하이엔드 스시야(고급 초밥 식당)의 주방을 떠돌고 있다.

이슬기 셰프(32)는 보수적인 일식 주방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개척해가고 있는 젊은 여성 셰프다. 그는 서울 청담동 ‘스시코우지’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코우지TV’에 ‘코우지 최초의 여성 오마카세 셰프’로 소개되면서 데뷔 초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누군가는 ‘여자가 하기 힘든 일’을 한다며 안쓰러워했고, 누군가는 ‘여자라서 주목 받는다’고 뒷말을 했다. 그는 어느쪽도 개의치 않았다. “제 대답은 항상 같아요. 원래 소수가 다수 집단에 들어가면 불편함을 느끼는 게 당연해요.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감내해야죠.” 단단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성장을 위해 달려가는 여성의 언어는 드물고 또 매력적이다.

지난달 10일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이슬기 셰프를 만났다. 그는 “저를 보고 ‘코우지’를 찾아오는 여자 후배들이 늘었지만 지금은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판을 바꾸는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무조건 버틸 생각”이라고 했다.

인생이 무서워서 가벼웠던 어린 시절



이슬기 셰프가 외식업계에 발을 들인 경로는 일반적이지 않다. 일반계 고등학교를 나와서 공연 기획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다가, 휴학 후 타악기 전공으로 편입을 했다. 그러다 돌연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3D 업종’이라는 회전 초밥집에 취직을 했다. 첫 직장이었다.

이슬기 셰프가 외식업계에 발을 들인 경로는 일반적이지 않다. 그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3D 업종’이라는 회전 초밥집에 취직을 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북스톤출판사 제공.

이슬기 셰프가 외식업계에 발을 들인 경로는 일반적이지 않다. 그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3D 업종’이라는 회전 초밥집에 취직을 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북스톤출판사 제공.

-9명의 여성 셰프들을 인터뷰한 책 <요리가 전부는 아니지만>에서 셰프님을 처음 알게 됐어요. 인생 경로를 크게, 여러번 바꾸었더군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었거든요. 인생이 가벼워서 그랬던 거죠. 저는 고등학교도 자퇴했어요. 한 반에 한두 명씩 있는, 공부 안 하고 까불거리는 애였어요.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부모님께 전화를 거신 거예요. 저 때문에 친구들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힘들어한다고요. 그날 밤 바로 가족 회의가 열렸어요. 아버지 첫 마디가 “슬기야 너 계속 학교 다닐 거야?”였어요.

-아버지가 자퇴를 먼저 권유하셨나요?

저희 아버지도 보통은 아니시죠.(웃음) “어중간한 대학 가서 어영부영 취업 준비하느니, 그냥 학교 관두고 지금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나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인생에 대한 생각이 하나도 없었을 때였거든요.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거에요. 수능, 대학, 취업….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공무원 시험만 붙으면 미래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거잖아요. 담임 선생님은 난리가 났죠. 그냥 ‘조금만 열심히 하자’고 전화를 한 건데 갑자기 자퇴를 한다고.(웃음)

-과격한 해법인데, 아버지 말씀에 선뜻 수긍했던 이유는 뭘까요.

돌이켜보면 미래가 무서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왜 저렇게 대책 없이 살까’ 싶은 사람들 있잖아요. 저는 그 사람들 마음을 너무 잘 알아요. 계획이 어긋나는 게 너무 무서우니, 아예 계획을 세우질 않는 거죠. 그런데 아빠가 인생 계획을 세워준거니 ‘감사합니다’ 했던 거죠. 저는 지금도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무언가를 해내면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이구나, 나도 해봐야지’ 생각할 뿐이에요.

📌 [플랫]주방에서 살아남은 여자 선배들에게 '일잘'이 되는 법을 물었다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사라진 때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며 회전초밥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첫 직장이었다. 이석우 기자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사라진 때 ‘일단 먹고 살아야지’라며 회전초밥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첫 직장이었다. 이석우 기자

-공무원 시험 준비는 잘 됐나요.

당연히 잘 안됐죠.(웃음) 혼자 맨날 영화 보고 포켓볼치고…. 부모님이 “너는 속세랑 연을 끊어야 한다”고 절까지 보냈죠. 그래도 공부 머리는 조금 있어서 결국은 검정고시 쳐서 지역 국립대에 들어갔어요.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때 배웠던 장구 생각이 나더라고요. ‘어렸을땐 재미있었는데 다시 배워보면 어떨까’ 하고요.

-좋아하는 장구는 왜 그만뒀나요.

예체능은 어릴 때부터 한 길만 파온 사람들을 이길 수 없겠더라고요. 한계를 느낀 후에는 공연 기획 쪽으로 진로를 바꿨고, 대학원에 갈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학부 조교일을 하면서 사람에게 크게 상처를 받는 일이 한번 있었어요. 조금만 노력하면 전통음악이라는 ‘판’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순진한 생각이었구나…. 그 순간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지면서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어요. 안 그래도 인맥과 학연으로 얽힌 판에 환멸이 났는데 ‘그냥 다 때려치우고 워킹홀리데이나 갈란다’ 했던 거죠. 일종의 도피였어요.

도피하듯 떠난 호주에서 칼을 잡다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사라진 때 ‘일단 먹고는 살아야지’라며 초밥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시간과 노력을 쏟은 만큼 발전하는 스스로를 보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초밥 쥐는 법은 호주에서 처음 배웠나요.

네. 처음 3개월은 한국인들만 있던 회전 초밥집에서 일했어요. 한국 사람들만 있어서인지 파벌이 생기는 분위기도 싫었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기분도 들었어요. 이후 조금 더 좋은 레스토랑으로 옮겨 다니며 3년 정도 경력을 쌓았죠.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는 ‘시드니 3대 일식집’으로 불렸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준 관리자급으로 일했어요.

-호주 주방의 분위기는 한국과 다른가요.

자유로웠어요. 헤드 셰프에게 지켜야 할 선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 같이 ‘화이팅’하는 수평적인 분위기였어요. 여자 셰프라고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없었어요. 여자든 남자든 다 똑같은 셰프였죠.

비자 만료를 앞두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하이엔드 스시야’ 몇 군데에 이력서를 냈다. 그중 유일하게 연락이 왔던 ‘스시 코우지’가 지금의 직장이 됐다. “그때는 ‘스시야’가 어떤 곳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호주에서 일했던 고급 일식당 정도로만 생각했죠.” 주방에서 확인한 자신의 실력은 그동안의 경력에도, 스스로의 기대치에도 한참 못 미쳤다. 칼질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하지만 호주 주방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손님 앞에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욕설이 날아온 적도 여러 번이다.

“전통음악을 그만두었을 때처럼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제는 ‘나이가 있다’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어요. 도망치지 못하면 죽기 살기로 버티는 것밖에 답이 없더라고요.”

이슬기 셰프는 스시코우지 그룹에서 오마카세를 진행하는 유일한 여성 셰프다. 초밥 셰프들은 불요리를 담당하는 ‘뒷주방’, 생선 요리를 담당하는 ‘칼판’을 거쳐야 손님에게 오마카세를 대접하는 ‘앞주방’으로 나올 수 있다. 코우지TV갈무리

이슬기 셰프는 스시코우지 그룹에서 오마카세를 진행하는 유일한 여성 셰프다. 초밥 셰프들은 불요리를 담당하는 ‘뒷주방’, 생선 요리를 담당하는 ‘칼판’을 거쳐야 손님에게 오마카세를 대접하는 ‘앞주방’으로 나올 수 있다. 코우지TV갈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낄 땐 어떻게 대응하는 편인가요.

주방에서 욕을 먹는 표면적인 이유는 ‘일이 서툴러서’인데, 내가 일을 못해서인지 아니면 나를 싫어해서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요. 타당하지 않다고 느낀 경우도 있죠. 예전에는 한두 번 참다가 들이 받았어요. 지금은 트러블을 안 만들려고 해요. 대신 ‘왜 저 사람에게 빌미를 줬을까’를 생각하죠.

-참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바뀐 건가요?

완곡하게 “그렇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의사 표현은 했죠. 하지만 주방에서 발언권이 생기려면, 선배든 후배든 일을 잘해야 해요. 저는 성장하면 할수록 그걸 더 강하게 느꼈어요.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좌지우지되지 않으려고 더 악착같이 실력을 키웠어요.

-그 ‘실력’이 하루아침에 쌓이지는 않잖아요. 많은 사회 초년생들이 자괴감이 느끼는 이유도 그 부분이고요. 이런 ‘일못’의 시기는 어떻게 견뎠나요.

그냥 일찍 나왔어요. 시간으로 때웠어요. 스스로 평가하기에 저는 일머리가 더딘 편이에요. 남들보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속도가 느려요. 대신 한 번 터득하면 누구에게도 욕 안 먹고 잘할 자신 있어요. 함께 일하는 선배들께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시간을 달라고. 대신 내가 다 깨달았을 땐 당신이 원하는 일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다고요.

판을 바꾸려면 다수의 인정이 먼저다



현실의 오마카세 셰프들은 ‘장인’과 ‘직장인’ 사이를 오간다. 튀김이나 국물요리를 하는 뒷주방, 생선 손질을 담당하는 칼판, 손님 앞에서 오마카세를 진행하는 앞 주방, 해당 지점을 총괄하는 실장까지…. 주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 팀’처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코우지’ 입사 후엔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요.

“‘스시소라’(스시코우지 그룹이 운영하는 중저가 스시야) 대치점에 있을 때요. ‘스시코우지’ 본점에서 온갖 잡일하며 3~4개월 버텼더니 어느 날 코우지상(스시코우지 대표 나카무라 코우지)이 “슬기야 이제 오마카세 하자”고 부르시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대치점에 갔더니 홀 업무를 시키는 거예요. 당시 실장님께 “저 오마카세하기로 한 거 아닌가요?”라고 대놓고 물어봤죠. 지금 생각해 보면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죠.(웃음)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더라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게 먼저였는데 그땐 몰랐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몰렸던 시간이었다. “저는 선배들이 저를 따돌린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만 일을 주지 않았거든요. 반대로 그분들 눈엔 남들 일할 때 저 혼자 쉬는 것처럼 보였겠죠.” 정식 오마카세 셰프로 데뷔한 후엔 기존에 하던 홀과 뒷주방 업무에 오마카세 집도까지 더해지면서 업무량까지 폭증했다.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했나요.

저 때문에 ‘단체 미팅’이 열렸어요. 갈등을 그대로 두면 ‘썩겠다’ 싶어, 실장 바로 아래 선배가 자리를 주선해 주셨어요. 선배들의 불만을 쭉 듣다가 제가 말했죠. “알려 달라. 제가 언제 시키는 일 안한 적 있었냐”고요. 그렇게 속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후에는 정말 전투적으로, 이를 갈면서 일했어요.

-감정이 완전히 풀리기까지는 얼마나 걸리던가요.

서너 달 걸린 것 같아요. 선배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안 하고, 해줬으면 하는 행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아졌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좋으신 분들이에요.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 건 어떻게든 저를 데리고 가려고 하신거잖아요. 저는 지금도 실장님을 존경해요.

이슬기 셰프는 ‘한 끼에 20만원’이 주는 압박감을 느끼는 연차가 됐다고 말한다. 북스톤출판사 제공

이슬기 셰프는 ‘한 끼에 20만원’이 주는 압박감을 느끼는 연차가 됐다고 말한다. 북스톤출판사 제공

-같은 상황에 있는 후배들에겐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냉정하게 말하면 소수는 다수를 못 이겨요. 당신이 그 직장을 떠날 것이 아니라면, 다수의 인정을 받는 것이 먼저에요. 그래야 발언권이 생기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죠. 그전까지는 아무리 이야기해 봤자 다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끝인 거예요.

-어느덧 선배 연차가 됐는데, 처음과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하이엔드는 ‘한 끼에 20만원’이 주는 압박감이 있어요. 아주 사소한 실수가 음식의 퀄리티와 직결되니까, 관리자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제가 싫어했던 선배처럼 되지는 말자고 매일 다짐해요. 보통 디너 때 쓸 생선이 오후 3시쯤 산지에서 배송되거든요. 생선 손질을 깔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지점에서 근무하는 10명 중에서 2~3명밖에 안되고요. 결국 선배들까지 달라붙어야 재료의 퀄리티도 높아지고 작업 시간도 맞출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선배는 점심 먹고 들어가서 혼자만 쉬어요. 선배는 후배보다 능력도 있고 책임도 크니 더 대접을 받는 거잖아요. 그것들을 다 누리면서 의무는 다하지 않는다? 저는 그런 건 못 참겠어요.

장인정신과 바이럴 사이에서



요리 시작한 지 어느덧 7년. ‘스시소라’ 대치점과 ‘스시코우지’ 본점에서 오마카세 경력을 쌓은 그는 지난달 ‘스시소라’ 서초점의 실장 바로 다음 직책인 ‘세컨드’로 승진했다. 예전에는 존경하는 선배들처럼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성장의 동력이었지만, 이제는 ‘셰프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무게감이 그를 움직인다.

-셰프로서 본인이 추구하는 맛의 기준이 있나요.

초밥은 밥과 생선의 간이 어느 하나 튀지 않게 조화를 이뤄야 해요.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그 균형점을 찾는 게 정말 어렵게 느껴져요. 그날 그날 식재료의 수분기와 소금기가 다르니까요. 대부분 손님들은 잘 모르는 아주 작은 디테일을 두고, 지구 내핵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웃음)

예전에는 존경하는 선배들처럼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성장의 동력이었지만, 이제는 ‘셰프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무게감이 그를 움직인다. 이석우 기자

예전에는 존경하는 선배들처럼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성장의 동력이었지만, 이제는 ‘셰프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무게감이 그를 움직인다. 이석우 기자



-사람마다 입맛이 다른데, 좋은 피드백과 무시해야 할 나쁜 피드백은 어떻게 구분하나요.

선배들이 자주 해주신 말씀 중에 “셰프가 피드백 하나하나에 휘둘리면 그 가게는 망한다”가 있어요. 휘둘리지 않으려면 셰프 스스로 본인의 실력을 인정해야 해요. 자기만의 맛에 대한 기준도 확고해야 하고요. 이때의 맛은 밥이 말랐다거나 생선이 신선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재료 관리는 기본이에요.

-손님에게 휘둘린다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뜻이죠.

‘스시소라’ 대치점 첫 데뷔 때였는데 손님이 봐도 제가 너무 서툰 거예요. 손님이 불만조로 “이거 밥 어제 한 건가요?”라고 물었는데 “확인해보겠다”고 답을 한 거예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제 손으로 한 밥인데…. 미친거죠. (웃음) 셰프가 자신감이 없으면 손님의 눈빛 하나만 바뀌어도 ‘내 음식에 문제가 있나’하며 전전긍긍하게 돼요. 매일 일을 하다 보면 현실과 타협하고 디테일을 포기해야 할 때도 생겨요. 이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더라도 요즘은 ‘내가 왜 저 손님을 납득시키지 못했을까’를 생각하게 됐어요. 여기엔 맛부터 접객까지 모든 요소가 포함돼요.

-부정적인 평가에 억울할 때는 없나요.

나는 내 음식에 프라이드가 있는데 손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니까…. 일정 경지에 오른 선배들은 ‘내 음식의 진가를, 내가 살린 디테일 하나하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욕망의 결핍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건 모든 예술가가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지만 오마카세 셰프는 손님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이에요. 스시만 먹으러 오는 손님은 없어요. 그 분위기를 즐기러 오시죠. 손님의 입맛, 방문 목적까지 단시간에 파악해 내야만 셰프가 분위기를 장악할 수 있어요.

이슬기 셰프가 스시코우지에서 치른 오마카세 데뷔전 영상은 조회수 30만회를 기록했다. 스시코우지TV 갈무리

‘여성 셰프’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기회인 동시에 꼬리표다. “너는 지금도 유명하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다독여준 선배들이 있는가 하면 “나도 여자로 태어날 걸 그랬다”며 뒷말을 한 동료들도 있었다. “글쎄요. 그분들이 여자로 태어났으면 칼을 잡았을까요? 저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만큼 못했어요. 여자로, 약자로 태어났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치열하게 산거죠.”

-여성 스시 셰프가 드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이엔드 스시야’의 ‘장(長)급’ 중에는 “여자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여전히 대부분이에요. 그래도 시대의 흐름이 달라졌고, 코우지 사장님은 그 변화를 잘 읽고 바람을 불어주신 거죠. 처음이 어렵지 누군가 물꼬를 트기만 하면 변화는 빠르게 일어날 거라고 봐요. 제가 ‘여성 셰프’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저보다 먼저 이 일을 해오신 선배 여성 셰프의 이름도 알려지고 있거든요.

📌 [인터뷰]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혼을 담아내는 것” 김선미 헤드셰프

-실력보다 마케팅으로 먼저 주목받은 게 부담스럽진 않나요.

제가 존경하는 선배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네 초밥이 아무리 맛있어도 사람들이 찾지를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고요. 여성 셰프를 강조한 건 스시코우지의 ‘마케팅 전략’ 중 하나였고, 저는 일종의 발표자예요. 미디어에 노출되고 단기간에 지명률이 올라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제 성과가 아니에요. 당장 제 업장을 차려보라고 하면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성공하진 못할 테니까요. 이게 저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앞으로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봐요.

이제 그의 시선은 자신을 뒤따라 오는 후배 여성 셰프들로 향한다. 자신을 보고 스시코우지에 찾아오는 여성 후배들도 눈에 띄게 늘었지만, 대부분은 한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 그는 자신을 “메마른 땅의 스프링클러”에 빗댄다. “자라나는 새싹들의 숨통을 트여줄 수 있어도 가뭄을 해결해 줄 단비가 되기엔 역부족이에요.”

-후배들이 그만두는 것을 볼 때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토양만 갖춰지면 잘 자랄 수 있는 애들인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본점에서 같이 일했던 한 여성 후배가 제가 타지점으로 발령 난 뒤에 결국 그만뒀다고 연락을 해오면서 ‘선배랑 계속 있었으면 안 그만뒀을 것 같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다짐해요. 내가 어떻게든 버텨야겠다, 그래서 판을 바꿀 수 있는 위치까지 가야겠다고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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