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Hi-story

19세기를 풍미한 조선판 '댓글'…'이완용아!' '제국 인민들아!'읽음

경향신문 역사 스토리텔러 기자

요즘 댓글문화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요. 130년 전에도 일종의 댓글문화가 있었습니다. 19세기말~20세기 초 도서대여점(세책점)에서 빌린 소설책에 독자들이 툭툭 써내려간 낙서가 바로 그것인데요. 그것이 요즘의 댓글이 아니겠습니까.

국권이 침탈되던 당대 소설책에 쓰여진 낙서 가운데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꼬집고 풍자하는 이른바 ‘시국댓글’이 있었습니다. 낙서, 즉 당시 댓글의 주공격 대상은 매국노 이완용(1858~1926)·송병준(1858~1925) 등이었습니다.

매국노 이완용을 욕한 낙서. 소설의 내용 사이사이에 붉은 글씨로 ‘대역부도한 이완용’ 운운이라고 썼다. 국권침탈기인 19세기 말~20세기 초 백성들의 공적은 이완용 등 매국노였다. 백성들은 이완용 등 매국노를 향한 적개심을 이렇게 표현했다.|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매국노 이완용을 욕한 낙서. 소설의 내용 사이사이에 붉은 글씨로 ‘대역부도한 이완용’ 운운이라고 썼다. 국권침탈기인 19세기 말~20세기 초 백성들의 공적은 이완용 등 매국노였다. 백성들은 이완용 등 매국노를 향한 적개심을 이렇게 표현했다.|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대역부도 이완용아!”

“대한제국 인민들아. 자세히 들어보라, 이 나라 망하게 놓은 자는 누구냐 하면 이완용과 송병준이라 하니 우리 대한 동포들아 일심하세. 그 두 놈을 잡아내어 장안에서 만민의 원수를 갚으세.”

“대역부도 이완용아. 천하의 몸쓸놈 아무 때 죽어도 내 손에 죽으리라. 총리대신 이완용 개자식.”

대놓고 욕할 수 없었던 매국노를 향한 조선 민중의 울분을 대여점 소설책에 고스란히 풀어놓은 겁니다.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한 댓글도 제법 눈에 띄었는데요. 어떤 댓글은 “심심하니까 이런 고담(옛 이야기·소설)만 보겠지만, 이젠 고담을 보지말고 학교에 가서 교사합시다.”라고 당부합니다. 소설에만 빠지지 말고 신식교육만이 살길이라고 당부하고 있는거죠. 가없는 항일의식을 표출한 댓글도 있습니다.

비분강개에 가득찬 낙서도 보인다. 어떤 독자는 <삼국지> 독후감에 유비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은 것과 관련해서, “천도가 무심하고 지리가 화합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유춘동 교수 제공

비분강개에 가득찬 낙서도 보인다. 어떤 독자는 <삼국지> 독후감에 유비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은 것과 관련해서, “천도가 무심하고 지리가 화합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유춘동 교수 제공

“우리 대한국 이천만 동포들아! 언제나 자주 독립하여…대한 동포끼리 살어볼까. 이 책 보는 동포들은…아무쪼록 정신을 차려서 일본을 다 죽이고 삽시다.”

순수하게 소설의 내용에 대한 독자의 감상과 촌평도 있었습니다.

<삼국지>를 읽고서는 “이 책인 삼국지라 칭하나 삼국지가 아니라 망국지”라 하는가 하면 “가련타! 유황숙(유비)이여! 통일천하 하기 전에 영안궁에서 귀천하니 천도가 무심하고…”라는 댓글을 단 이가 있습니다. 또 관우가 여몽에게 허무하게 죽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여몽 때려죽일 놈”이라고 울분을 터뜨리는 독자도 있었습니다.

<하진양문록>에 쓰여진 낙서. 약육강식의 21세기 패망한 월남과 파란(폴란드)의 예를 들며 책세를 싸게 받으리고 충고했다.|유춘동 교수 제공

<하진양문록>에 쓰여진 낙서. 약육강식의 21세기 패망한 월남과 파란(폴란드)의 예를 들며 책세를 싸게 받으리고 충고했다.|유춘동 교수 제공

■음담패설과 신상털이 댓글

물론 이런 댓글도 있지만 요즘처럼 익명성에 기댄 지독한 욕설과 신상털기 등도 악플 문화는 지금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중에는 책대여값이 바싸다며 도서대여점(책세점) 주인을 겨냥한 댓글(낙서)도 줄을 잇는데요. 게중에는 월남과 파란(폴란드)의 망국사까지 들먹이며 세책집 주인을 비판한 낙서가 눈길을 끄네요.

“지금은 약육강식에 우승열패하는 20세기에…우리나라 형편이 어찌 되었는고. 월남과 파란의 망국사를 보지 못했는가. 이런 세계에 음담패설로 꾸민 언문 이야기 책을 돈받고 세를 놓을 게 뭐냐.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풍속의 좋고 그른데 크게 관계있나니…이후에는 책세를….”

댓글 중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내용도 많았다. <삼국지> 중에 갈겨쓴 댓글은 책 대여비가 너무 비싸다는 내용과 함께 계속 비싸게 받으면 평생 감옥에서 보낼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옆에는 음란한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놓았다.|이민희 강원대 교수 제공

댓글 중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내용도 많았다. <삼국지> 중에 갈겨쓴 댓글은 책 대여비가 너무 비싸다는 내용과 함께 계속 비싸게 받으면 평생 감옥에서 보낼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옆에는 음란한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놓았다.|이민희 강원대 교수 제공

이건 양반입니다. 차마 눈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댓글을 남긴 이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책주인아, 너무 책세를 많이 받아서 욕을 했는데, 또 이 낙서를 보고도 예전 같이 돈을 받으면 감옥소에 보내 종신징역하게 될 터이니 조심해…”라는 댓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놓고는 바로 옆에 “좌편에 있는 ○○와 ××는 너와 네 어미와 △하는 거야”라는 음란한 그림까지 그렸습니다. 그외에도 남자의 성기 옆에 나체 상태의 책주인 어머니를 그려놓고는 “이 물건은 세책점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쓴다든지, “네 딸년을 나한테 보내라”든지 하는 쌍욕을 해댄 낙서도 있습니다.

주인의 실명을 거명하고 비판하는 경우도 제법됩니다. “임경삼아. 내용을 고치라고 몇번을 말했느냐”는 실명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장주영(張周泳) 마자(馬子)이고, 어견자(魚犬子) 잡종류(雜種類)’처럼 도서대여점(세책점) 업자 이름을 거론한 뒤 한글욕을 한자로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의 실명을 터는 것도 모자라 그 가족까지 들먹이며 성적인 욕을 서슴치않고 해대는 모양이 어쩌면 그렇게 요즘의 SNS 댓글과 비슷한지 모르겠네요.

세책점(도서대여점) 주인의 부모까지 소환해서 음란한 그림을 그렸다. ‘민총각은 춘흥이 어떻고, 화부인은 ××가 어떻고’”하면서 성적인 행동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낙서가 보인다.|이민희·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세책점(도서대여점) 주인의 부모까지 소환해서 음란한 그림을 그렸다. ‘민총각은 춘흥이 어떻고, 화부인은 ××가 어떻고’”하면서 성적인 행동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낙서가 보인다.|이민희·유춘동 강원대 교수 제공

■당대 최고인기 가요는 ‘유산가’

낙서한 사람을 욕한 댓글도 있습니다. 유치한 악플 릴레이라 할 수 있겠죠. “이것 쓴 사람은 개자식”이라든지 “이 글씨 쓴 자식은 개자식의 자손”이라든지 “만약 이 낙서를 보고 욕하는 놈은 내 아들이다”라든지 하는 식이죠.

이런 ‘악플’에 일침을 가하는 댓글도 있는데요. “책 보는 사람은 곱게 보시고, 낙서하지 말고…무식하게 욕설을 기록하지 마시오. 그리고 지금 관민이 아사 지경인데 어찌 이야기책만 보시오.” “이 책에 욕설을 쓰거나 잡설을 쓰는 폐단이 있으면 벌금을 낼 것이니 이후로 깨끗이 보시고 보내주소.”

낙서 중에는 “책주인 안주인 보소. 이따 갈테니 방에 불이나 더 때고 베개를 둘 놓고 기다리라”는 등 성폭력적 내용을 쓰고 그린 것도 있다. 책주인을 욕하는 댓글에 대해 다른 독자가 ‘이 글씨를 쓴 자식’ 운운하며 악플 릴레이를 벌인 경우도 있다.|유춘동 교수 제공

낙서 중에는 “책주인 안주인 보소. 이따 갈테니 방에 불이나 더 때고 베개를 둘 놓고 기다리라”는 등 성폭력적 내용을 쓰고 그린 것도 있다. 책주인을 욕하는 댓글에 대해 다른 독자가 ‘이 글씨를 쓴 자식’ 운운하며 악플 릴레이를 벌인 경우도 있다.|유춘동 교수 제공

당대의 유행가를 끄적거린 경우도 꽤 됩니다.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와 가사인 ‘상사별곡’, 가곡인 ‘황산곡’, 단가인 ‘소춘향가’, 고시조인 ‘서산에 일모하니’ ‘담바고 타령’, 민요인 ‘성주풀이’와 ‘수심가’ 등이 있는데요. 그 중 민속성악곡인 ‘유산가(遊山歌)’는 당대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것 같아요. 현전하는 90여종의 세책 중 20종에서 낙서가 보입니다. 유산곡은 봄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면서 봄구경을 권하는 노래입니다.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를 구경가세…”하는 내용이라네요.

낙서나 댓글은 좋게보면 가감없는 의식표출이죠. 당대 사회현상의 반영하는 일종의 쌍방간 의사소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독한 악플이 문제지만 그 역시 당대 사회의 민낯을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그 자체로 소중한 역사자료임이 틀림없습니다.

대역부도한 매국노 이완용을 욕하고, 쌍칼을 들고 설치는 일본인을 그린 낙서. 또한 19세기 말 조선의 외교고문이었던 독일인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를 그린 낙서도 눈에 띈다. 쌍칼에 흉측한 악인으로 묘사됐다. 빌린 책에 독자들이 끄적거린 낙서, 즉 댓글은 19세기말~20세기초 국권침탈기, 당대 사회의 민낯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유춘동 교수 제공

대역부도한 매국노 이완용을 욕하고, 쌍칼을 들고 설치는 일본인을 그린 낙서. 또한 19세기 말 조선의 외교고문이었던 독일인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를 그린 낙서도 눈에 띈다. 쌍칼에 흉측한 악인으로 묘사됐다. 빌린 책에 독자들이 끄적거린 낙서, 즉 댓글은 19세기말~20세기초 국권침탈기, 당대 사회의 민낯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유춘동 교수 제공

■“얼굴에 한문책을 덮으면 잠이 솔솔”

이 대목에서 궁금한 점이 생기죠. 당대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기에 책을 빌려주는 도서대여점까지 있었다는 말일까요.18세기 중후반까지 올라가 볼까요. 잠을 청하려면 책, 그것도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죠.

그걸 실천한 이가 다름아닌 영조(1724~1776) 임금이었답니다. 야사가 아니라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 나와있으니 엄연한 정사라 할 수 있죠. 1758년(영조 34) 12월 19일의 일인데요. 도제조 김상로(1702~?)가 밤잠을 설치던 영조에게 “제가 읽어주는 언문(한글) 소설책을 들으시면서 잠자리에 들으시라”고 권했답니다.

1758년 12월19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영조를 위해 도제조 김상로가 “제가 읽어드리는 한글소설을 듣고 주무시라”고 청했다. 그러자 영조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영조는 보채는 아이를 재우려고 한문책을 얼굴에 덮어 주었다는 민간의 아낙네 이야기를 전하면서 “잠을 청하는데는 한글책 보다는 역시 어려운 한문책을 읽어야 제격”이라는 ‘아재개그’를 날렸다.

1758년 12월19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영조를 위해 도제조 김상로가 “제가 읽어드리는 한글소설을 듣고 주무시라”고 청했다. 그러자 영조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영조는 보채는 아이를 재우려고 한문책을 얼굴에 덮어 주었다는 민간의 아낙네 이야기를 전하면서 “잠을 청하는데는 한글책 보다는 역시 어려운 한문책을 읽어야 제격”이라는 ‘아재개그’를 날렸다.

그러자 영조는 “언문이 아니라 한문소설을 읽어야 잠이 올 것”이라고 민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전에 어떤 아낙이 아기가 울자 한문책으로 얼굴을 덮어주었다는 거야. 이웃집 사람이 ‘왜 하필 한문책이냐’고 물었더니 아낙은 말했네. ‘아이 아버지가 잠을 청할 때마다 한문책을 읽읍디다. 그래서 나도 이 애 애비처럼….”

영조는 그러면서 “이 말이 절묘하지 않은가. 한문책이야말로 사람을 잠들게 하는 거지”라며 크게 웃었다(大笑)고 합니다.

이 일화는 조선 후기 소설 열풍을 소개할 때 양념으로 식탁에 올리는 메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체반정을 외친 정조는 숙직 도중 중국 소설인 <평산냉연>을 본 서학교수 이상황과 이조참의 김조순을 파직하고 문제의 서적을 불살라버렸다. 오른쪽 사진은 이상황과 김조순이 읽다가 들켜버린 <평산냉연>. <평산냉연>은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남녀의 결혼과정을 묘사한 청나라 통속소설이다.

문체반정을 외친 정조는 숙직 도중 중국 소설인 <평산냉연>을 본 서학교수 이상황과 이조참의 김조순을 파직하고 문제의 서적을 불살라버렸다. 오른쪽 사진은 이상황과 김조순이 읽다가 들켜버린 <평산냉연>. <평산냉연>은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남녀의 결혼과정을 묘사한 청나라 통속소설이다.

영조와 그의 아들인 사도세자(1735~1762)는 두 분 다 소설을 즐겨 읽었던 것 같아요. 영조는 중국소설은 물론이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홍백화전> 등 한글 소설을 읽었던 것 같구요.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불과 4일 전(1762년·윤5월9일)까지 <서유기>와 <수호지>, <삼국지> 등의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중국소설회모본>의 서문을 썼다고 합니다.

반면 문체반정의 기치를 든 정조(1776~1800)는 어땠을까요. 아버지·할아버지와 달리 소설을 민간의 잡담을 꾸민 거짓 투성이라며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1737~1805)에게 “경박한 문체로 <열하일기>를 썼다”면서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고, 성균관 유생 이옥(1760~1815)의 과거(대과) 응시를 막기도 했답니다.

또 예문관 숙직 중에 <평산냉연> 등 중국소설을 본 서학교수 이상황(1763~1841)과 이조참의 김조순(1765~1832)을 파직시키고 문제의 서적을 불살라버렸답니다. 그 중 <평산냉연>은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남녀의 결혼과정을 묘사한 청나라 통속소설입니다.

18세기 서울의 이상적인 풍경을 그린 <태평성시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화폐 경제의 경험과 상업이 활발해지는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유가 생기자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책은 중인과 평민의 벗이 되었다.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한글소설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서울의 이상적인 풍경을 그린 <태평성시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화폐 경제의 경험과 상업이 활발해지는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유가 생기자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책은 중인과 평민의 벗이 되었다.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한글소설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의 탄생

이 일화는 무엇을 일러줄까요. 다른 분도 아닌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분서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조선에 소설열풍이 불었다는 얘기죠. 당시 서울거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기상이변에 따른 전염병 창궐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린 것 같습니다.

18세기 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어났구요.

조정에서는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시장이 발달했고,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수공업이 활발해졌구요.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된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돌았고, 저잣거리 문화가 꽃피게 되었답니다.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던 책은 중인과 평민의 벗이 되었구요.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한글소설이 창작되기 시작하죠. 물론 그때까지는 일반 백성이 책을 사보기에는 너무 비쌌죠.

소설을 읽고싶은 욕구는 강했지만 여전히 책값은 비쌌다. 서울에서는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전기수는 청계천 일대를 하루씩 돌며 한달 단위로 책을 읽어 주었다. |EBS ‘역사채널e’

소설을 읽고싶은 욕구는 강했지만 여전히 책값은 비쌌다. 서울에서는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전기수는 청계천 일대를 하루씩 돌며 한달 단위로 책을 읽어 주었다. |EBS ‘역사채널e’

그래서 중국에서 수입되는 책을 유통한 책쾌(서적중개인)와 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전기수(傳奇수)와 같은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는데요. 전기수는 청계천 주변을 하루씩 한달 단위로 돌며 책을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책 읽어주는 남자’인 전기수는 배우톤의 연기와 대사로 청중을 사로잡았답니다. 조수삼(1762~1849)의 <추재집>을 보면 흥미진진합니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연기톤으로 책을 읽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 갑자기 대사를 멈추고 뜸을 잔뜩 들였답니다. 애간장이 녹은 청중이 돈을 던지면 그제서야 대사를 이어갔다는데요.

조수삼은 이것을 ‘요전법(邀錢法·돈을 요구하는 수법)’이라 했습니다. 비극도 일어났는데요. 소설 <임경업전>에서 임경업 장군(1594~1664)이 역적 김자점(1588~1651)의 무고로 목숨을 잃는 장면을 읽고있던 전기수가 구경꾼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는데요. 임경업 장군이 실의에 빠지는 전기수의 연기가 너무도 실감나서 벌어진 어이없는 살인사건이었던 셈이죠.

인기 있는 전기수는 부잣집 여인들의 부름을 받아 여장을 하고 여자 목소리를 내며 양반집 안채를 드나들었다는데요. 이때 안방마님과 전기수가 눈이 맞은게 들통나서 포도대장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도 일어났답니다.

전기수는 실감나는 연기톤으로 책을 읽어주다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면 갑자기 멈춰서 잔뜩 뜸을 들였다. 애가 단 청중이 돈을 던져줘야 대사를 이어갔다. 소설 <임경업전>에서 역적 김자점의 무고로 목숨을 잃는 임경업 장군의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던 전기수가 청중이 휘두른 담배 써는 칼에 찔려 죽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1790년(정조 14) 8월16일 실제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다.

전기수는 실감나는 연기톤으로 책을 읽어주다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면 갑자기 멈춰서 잔뜩 뜸을 들였다. 애가 단 청중이 돈을 던져줘야 대사를 이어갔다. 소설 <임경업전>에서 역적 김자점의 무고로 목숨을 잃는 임경업 장군의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던 전기수가 청중이 휘두른 담배 써는 칼에 찔려 죽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1790년(정조 14) 8월16일 실제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다.

■책 빌려보느라 가산탕진?

깨끗이 베낀 책을 빌려주는 ‘조선판 도서대여점’도 탄생했습니다. 그것이 18세기 유럽에서도 유행한 ‘세책점(貰冊店)’인데요. 세책점은 당대 불어닥친 소설열풍을 타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부녀자들이 소설에 흠뻑 빠졌다는 건데요. 문제는 책은 보고 싶은데, 빌릴 돈은 없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녀자들이 비녀나 팔찌를 맡기거나 팔아, 혹은 빚까지 내서 책을 대여하는 통에 가산을 탕진할 정도였다는 겁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 같은 이는 “부녀자들이 투기와 음란한 내용이 대부분인 소설에 정신팔려있다”면서 “요즘 부인들의 방탕함과 방자함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비판합니다.

왼쪽사진은 독일인 헤르만 산더(1868~1945)의 한국방문(1906~07) 때 찍은 세책점(도서대여점) 사진. 산더는 잡화점이라 했다. 그러나 사진에 등장하는 세사람을 세책점 주인과, 소설 필사자, 세책본 배달자 등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독일 드레스덴의 도서대여점에서 사람들이 신문과 책을 읽고 있는 그림.(하인리히 루카스 아르놀트작) 세책점(도서대여점)은 18~19세기 유럽에서도 유행했다.

왼쪽사진은 독일인 헤르만 산더(1868~1945)의 한국방문(1906~07) 때 찍은 세책점(도서대여점) 사진. 산더는 잡화점이라 했다. 그러나 사진에 등장하는 세사람을 세책점 주인과, 소설 필사자, 세책본 배달자 등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독일 드레스덴의 도서대여점에서 사람들이 신문과 책을 읽고 있는 그림.(하인리히 루카스 아르놀트작) 세책점(도서대여점)은 18~19세기 유럽에서도 유행했다.

일본인 오카쿠라 요시자부로(岡倉由三郞·1865~1935)는 “조선에서는 냄비, 솥 등을 맡기고 책을 빌리며, 요금은 2~3일 기한에 권당 2~3리 정도”(<조선의 문학>)라고 했고,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1865~1935)은 “세책점은 10분의 1~2문에 빌려주는데, 흔히 돈이나 화로 혹은 솥을 담보로 요구한다”고 기록했습니다.

19세기말~20세기초 서울의 세책점은 30곳이 넘었다는데요. 월탄 박종화(1901~1981)는 “서울의 책세집은 장마철이 석달 넘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왜냐면 서울 친정을 방문한 새색시가 장마 핑계를 대고 얼른 시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월탄회고록’)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은 “골방 속에 갇혀 지내던 부인네들에게 달밝고 별 깜박거리는 시원한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 실로 이 소설의 세계였다”(매일신보 1938년 7월30일)고 소개했습니다.

실학자 이덕무는 “요즘 부녀자들이 소설책을 별려 보느라 가산을 탕진할 지경이며, 소설의 내용이 음란하고 투기하는 내용이어서 부인들이 방탕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청장관전서> ‘사소절·사물’)

실학자 이덕무는 “요즘 부녀자들이 소설책을 별려 보느라 가산을 탕진할 지경이며, 소설의 내용이 음란하고 투기하는 내용이어서 부인들이 방탕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청장관전서> ‘사소절·사물’)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그렇다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이었을까요. <삼국지>나 <수호지> 등 중국소설의 번역물은 스테디셀러였죠. 그러나 베스트셀러 한글창작소설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윤하정삼문취록>(186책)이나 <명주보월빙>(117책) 등 100책 이상의 대하소설은 물론이고, <현씨양웅쌍린기>(24책)나 <옥루몽>(30책) 등은 20책 이상의 장편소설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춘향전>, <홍길동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임경업전>, <숙영낭자전>, <심청전>, <여장군전> 등도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당대 꼬장꼬장한 사대부 남성들도 앞에서는 눈쌀을 찌푸리는 척하면서 뒤돌아서서는 이른바 통속소설을 탐독하며 웃고 울었을 겁니다.

<홍길동전> <춘향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의 고소설은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작품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

<홍길동전> <춘향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의 고소설은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작품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

이런 소설에는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요. 소설을 지은이나 소설을 읽은 독자나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화기에 사랑을 받은 이른바 고소설류는 일종의 퇴폐적인 유물로 폄훼됐는데요.

하지만 <춘향전>, <홍길동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등 고소설이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근대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훨씬 더 많이 읽히고 팔렸다는 분명합니다. 아니 위로는 영조 임금부터 즐겨 찾았고, 아래로는 안방의 여인네들까지 가재도구를 탕진하면서까지 빌려보았다고 하지않습니까.(이 글을 쓰는데 유춘동·이민희 강원대 교수가 도움말과 함께 사진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유춘동, ‘세책본 소설 낙서의 수집, 유형분류, 의미에 관한 연구, <열상고전연구> 45권45호, 열상고전연구회, 2015

오영식·유춘동, <오래된 근대, 딱지본의 책그림>, 소명출판, 2018

이민희, <세책, 도서대여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이윤석, <조선시대 상업출판-서민의 독서, 지식과 오락의 대중화>, 민속원, 2016

우정임, ‘16세기 방각본의 출현과 책쾌의 활약’, <역사와 경계> 76집, 부산경남사학회, 2010

이태영, ‘완판방각본의 유통 연구’, <열상고전연구> 61권, 열상고전연구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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