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은 ‘애니캐릭터 베개’를 정말 처형했을까

정용인 기자

[언더그라운드.넷]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연인일 텐데.”

12월 1일 인터넷커뮤니티에 ‘여성들을 사정없이 참수하는 IS’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에 붙은 코멘트다. 영상을 보면 비장한 아랍노래를 배경으로 건물 위에 서 있는 남자가 연설을 한다. 칼로 목 부분을 벤 뒤 사정없이 땅바닥으로 던진다. 아래에 대기해 있던 다른 사람은 총으로 확인사살을 한다.

12월 1일 여러 커뮤니티에 탈레반이 제작한 처형영상이라고 올라온 영상의 한 장면. 찾아보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함락 때인 지난 8월 18일 전후에도 국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 많이 올라온 영상이다. /fmkorea

12월 1일 여러 커뮤니티에 탈레반이 제작한 처형영상이라고 올라온 영상의 한 장면. 찾아보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함락 때인 지난 8월 18일 전후에도 국내외 온라인 커뮤니티에 많이 올라온 영상이다. /fmkorea

영락없는 이슬람국가(IS)가 제작한 선동용 참수 영상 포맷인데 문제는 그 ‘대상’이다. 베개다. 오타쿠들 사이에서 흔히 ‘다키마쿠라’라고 불리는 애니메이션·게임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다. IS나 탈레반이 서구에서 유입된 저질 오타쿠 문화를 규탄하기 위해 만든 영상?

여러 커뮤니티에 퍼진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정말 저 영상을 IS 또는 탈레반이 만들었다는 전제로 댓글이 달리고 있다. 그런데 의문은 외국뉴스를 검색해봐도 해당 ‘처형사실’을 보도한 뉴스는 나오지 않고, 영상은 주로 유머사이트에서 유통된다.

영상의 히스토리를 검색해보면 지난 8월 18일을 전후로 한국이나 외국 사이트에서도 흥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탈레반이 함락하는 때라 이때의 ‘베개처형’의 주체로 거론된 것은 탈레반이었다.

인터넷 유머사이트 ‘9gag’에 올라온 영상에는 “탈레반이 미군 병사가 남기고 간 ‘와이푸(waifu)’ 베개를 처형하고 있다(카불·2021·컬러영상)”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그런데 영상을 더 추적해보면 2019년경에 동일한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이때 처형의 주체로 거론한 집단은 IS. 일단 최근 국내외에서 공유됐던 ‘올해 8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탈레반이 찍은 영상’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된다.

유튜브에 영상을 올린 이는 “이 영상은 축약 버전이며, 원래 20여분에 달하는 긴 버전의 영상이 따로 있다”고 링크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 긴 버전의 영상은 유튜브 규약위반으로 삭제된 것으로 나온다. 영상의 진실성 여부를 묻는 누리꾼 질문에 이 게시자는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이라며 영상을 하나 더 제시했지만, 역시 영상의 비하인드는 규명되지 않았다.

앞서 9gag, 레딧, imgur 등의 사이트에서도 “진짜 IS(또는 탈레반)가 만든 게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누리꾼이 있었지만 “Did ISIS invade 4chan?(IS가 4chan 사이트에 침공했나요?)”, “Yamero jihadi kun(그만둬 지하디 군)”과 같은 찰진 영어버전 드립에 묻혔다.

디씨인사이드 만화갤러리 사용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영상에 맨 처음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스마트폰용 온라인게임 ‘페이트오’ 캐릭터인 잔느얼터(흑잔)이다. /유튜브 캡처

디씨인사이드 만화갤러리 사용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영상에 맨 처음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스마트폰용 온라인게임 ‘페이트오’ 캐릭터인 잔느얼터(흑잔)이다. /유튜브 캡처

영상 속에 단서가 없을까.

우선 배경음악. Allahin’ Aslanari라는 노래인데 실제 IS가 제작한 참수선전 영상에 많이 사용된다. ‘신의 사자(lion)’라는 뜻이다.

제일 처음 참수되는 베개 속 캐릭터는 디씨인사이드 만화갤러리 유저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마트폰용 온라인게임 ‘페이트오’ 캐릭터인 잔느얼터(흑잔)이다. TV용 애니메이션과 함께 이 게임이 발매된 때가 2014년이니 생각보다 좀 된 영상일 수도 있다. 앞서 유튜버가 제시한 두 번째 영상을 보면 참수장면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잠시 포착되는데 아무래도 종군기자의 포스는 아니다. 영상의 진위 여부에 의심을 더하는 대목이다.

두번째 영상에 나오는 ‘베개 처형’이 진행되는 건물 전경.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이다./ 유튜브 캡처

두번째 영상에 나오는 ‘베개 처형’이 진행되는 건물 전경.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이다./ 유튜브 캡처

디스코드에 올라온 유튜브가 삭제한 원본 영상을 확인해보니 앞서 게시한 유튜버의 주장처럼 20분은 아니고 38초짜리의 조금 더 긴 버전이다. 제목은 ‘정의가 나아갈 길은 너희들의 ‘와이푸(waifu)’의 피로 정화될 것이다’. 영상 후반부엔 이들 게릴라군의 습격으로 미군 병사 2명이 어이없게 당하는 장면, 캐러밴 차량이 후진해 베개들을 짓뭉개는 장면 등이 추가돼 있는데 유튜브 측은 미군 병사 관련 장면 때문에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레딧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제보. 영상은 옥사이드(oxide)라는 유명 밀리터리 유튜버가 몇년 전 ‘밀심(milsim·무슬림이 아니다) 웨스트’라는 곳에서 찍은 서바이벌 게임에서 참가자들끼리 장난으로 찍은 것인데, 현재 그 영상이 삭제되다 보니 진짜로 오해를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일까. 옥사이드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검토해봤다. 위 누리꾼의 언급대로 이 ‘베개처형 영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올린 ‘침공 취소(Invasion Cancelled)’라는 제목의 영상 인트로에서 앞서 베개처형 영상의 배경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5년 전이다. 그러니 원본 영상도 2017년 전후로 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밀심 웨스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서바이벌 게임 사진에서 그로즈니(러시아 체첸 수도) 도심 모형에서 해당 건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명 밀리터리 유튜버 oxide가 침공 취소(invasion cancelled)라는 제목으로 올린 영상의 시작 부분. 위 ‘베개처형 영상 속 장소와 같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튜브 캡처

유명 밀리터리 유튜버 oxide가 침공 취소(invasion cancelled)라는 제목으로 올린 영상의 시작 부분. 위 ‘베개처형 영상 속 장소와 같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튜브 캡처

‘밀심 웨스트’ 사이트에 등록된 홍보용 이미지. 역시 위 ‘베개처형’ 영상 속 장소와 같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심 웨스트 사이트 캡처

‘밀심 웨스트’ 사이트에 등록된 홍보용 이미지. 역시 위 ‘베개처형’ 영상 속 장소와 같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심 웨스트 사이트 캡처

결론이다. IS 또는 탈레반은 미군이 남기고 간 다키마쿠라를 ‘처형’하는 선동 영상을 실제로 제작했을까. 답은 아니다. 누리꾼들이 ‘미군 와이프 공개처형’ 등의 이름으로 공유하는 영상은 처음엔 유명 유튜버가 장난으로 찍은 영상이며, 여기에 다시 누군가 IS 선동 영상의 배경음악을 삽입하고 편집기법을 흉내 내 만든 가짜영상이었다. 오늘의 팩트체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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