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팀이 새로운 시선과 시도로 완성된 콘텐츠를 ‘플랫pick’으로 추천합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담은 영상과 서적 등을 소개합니다. 이번 ‘pick’은 21세기의 주인공이 밤마다 1960년대의 가수지망생이 되는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 78회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제인 캠피언표 서부극 <파워 오브 도그> 입니다.
1960년대 런던에서 목격한 악몽같은 현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
디자이너의 꿈을 꾸는 엘리(토마신 맥켄지)는 영국 런던의 패션 학교에 입학한다. 엘리는 어머니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은 아픔을 갖고 있다. 시골에 살던 엘리는 기숙사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작은 자취방을 구한다. 엘리는 밤에 잠들었다가 별안간 1960년대 런던 번화가 소호에서 깨어난다. 그곳에서 엘리는 가수지망생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가 된다. 유명 클럽의 실력자 잭(맷 스미스)은 샌디를 돕는 듯 하더니, 금세 본색을 드러내 샌디를 착취한다. 샌디와 엘리는 조금씩 피폐해진다.
1일 개봉한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요란한 영화다. 이경미 감독은 “카메라가 춤을 춘다”고 표현했다. <아가씨>의 정정훈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아 눈을 쉴 틈 없는 현란한 영상을 보여준다. 패션과 음악이 폭발했던 1960년대 소호의 분위기를 꿈인듯 현실인듯 몽롱하게 담아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베이비 드라이버>(2017) 등 재치있는 상업영화를 만들어온 에드거 라이트 감독이 연출했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는 ‘지알로 영화’의 영향력이 묻어 있다. 마리오 바바, 다리오 아르젠토 등 이탈리아 감독들이 만든 공포물을 일컫는 지알로 영화는 얼굴 없는 살인마, 잔혹하고 독창적인 살해 수법, 화려한 음악, 비논리적인 전개 등의 특징을 갖는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전개 역시 종잡기 어렵다. 현란한 형식의 외피를 걷어내면 서사의 엉성한 이음새, 설정의 비합리성이 보인다.
차라리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꿈을 닮은 영화라고 보는 것이 편하다. 꿈을 두고 합리성을 따지진 않는다. 꿈 속에서는 어떤 황당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사회에 갓 나오려는 젊은 여성들이 터무니 없는 일을 겪는다. 가수의 꿈에 부풀어있던 재능있고 자신만만한 샌디는 곧 냉혹하고 착취적인 현실에 부딪힌다. 기대와 달리 노출 심한 옷을 입은 백댄서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은 약과다. 매니저 잭은 “이 바닥에서 뜨기 위해선 유력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샌디에게 성접대를 강요한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안락한 공간이어야 할 샌디의 소호 자취방은 연일 성폭행이 벌어지는 범죄 현장이 된다. 희미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손길을 붙잡기에 샌디는 너무 지쳤다. 1960년대의 지나간 일도 아니다. 정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엘리의 어머니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고 ‘힘들다’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해 결국 죽은 것으로 설정됐다. 21세기의 엘리도 런던에 오자마자 잡아탄 택시의 운전기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한다.
엘리는 샌디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후 반전이 있다. 반전이 말이 되든 안 되든 제작진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악몽’이기 때문이다. 눈 뜬 채 현실에서 악몽을 체험하는 여성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스토킹 피해에 시달리다 거주지를 옮기고 경찰에 신고하고 스마트워치를 받았는데도 결국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한 여성의 사례는 현실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할 수 없다.
페미니즘의 렌즈로 본 유독한 남성성 <파워 오브 도그>
1925년 미국 몬태나주의 대목장.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형과 유순하고 점잖은 동생이 목장을 이끈다. 형은 카우보이 공동체의 우두머리도 겸한다. 어느 날 동생이 한 과부에게 반해 결혼한다. 과부에겐 전남편과의 사이에 둔 유약한 아들까지 있다. 형은 제수를 적대한다.
<파워 오브 도그>(원제 The Power of the Dog)는 제인 캠피언 감독이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내놓은 장편 영화다. 올해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캠피언에게 은사자상(감독상)을 안기며 환영했다.
1993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피아노>에서 보여줬듯, 캠피언은 꾸준히 페미니즘 관점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대부분 영화에서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파워 오브 도그>는 다르다. 형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을 중심에 두고 영화가 전개된다. 필의 대체로 기묘하고 가끔 매혹적인 남성성이 영화 분위기를 좌우한다. 이 남성성은 어떤 이에겐 유독하다. 필이 같은 공간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수 로즈(커스틴 던스트)는 숨이 막힌다. 로즈에겐 도망칠 곳도 없다. 로즈는 도시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 다정하지만 어수룩한 남편 조지(제시 플레먼스), 그리고 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세심하게 보지 않는다면 로즈의 심신이 파괴돼 가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필은 로즈를 노골적으로 괴롭히거나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캠피언은 저택을 압도하는 필의 존재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했다. 나무로 된 마루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필의 발소리가 크게 강조됐다. 로즈가 서툴게 피아노 연습을 할 때 필이 벤조로 그 곡조를 그대로 따라 하는 장면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로즈를 짓누르는 필의 분위기를 컴버배치는 탁월하게 연기했다. 컴버배치는 이 연기로 내년 아카데미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거론되고 있다.
필은 여자가 필요 없는, 남성들의 자족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라면 아내를 맞아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이 당연히 여겨지는 시대였겠지만, 필은 동생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내비친다. 결혼 상대의 신분이 자신들보다 낮아서가 아니라, 형제와 카우보이 공동체가 충분히 완벽하기 때문이다. 필은 예일대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묘사된다. 필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잘 빚어진 육체를 뽐내는 남성들의 사진을 남몰래 간직한다. 이상적인 남성성을 향한 필의 나르시시즘에는 여성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로즈의 앙상하고 구부정한 아들 피터는 카우보이 집단의 손쉬운 놀림거리가 된다. 필 역시 처음엔 피터를 조롱하다가 어느 순간 피터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음을 감지한다. 필은 피터를 자기 집단으로 받아들이려 하지만, 피터 역시 필의 반대편에서 미스터리하면서 유독한 남성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난 17일 소규모로 개봉한 <파워 오브 도그>는 이달 초 개봉한 <퍼스트 카우>와 함께 또 하나의 대안적 서부극 수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파워 오브 도그>는 1일 넷플릭스에서도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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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찬 기자 myungworry@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