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히면 안 준다'···사람의 그때 '시간의 문'을 열다

김창길 기자
사진가 황규태, 김기찬, 한정식(왼쪽부터). 1996.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 모여 있는 사진가들의 사진을 찍는 강운구의 모습이 창문에 반영돼 있다.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사진가 황규태, 김기찬, 한정식(왼쪽부터). 1996.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 모여 있는 사진가들의 사진을 찍는 강운구의 모습이 창문에 반영돼 있다.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꿈틀거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대학원생의 질문에 김형이 대답한다. “사랑하고 말고요.” 김형은 생각했다. 추억이란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고. 나는 사진가 강운구가 찍은 소설가 김승옥의 초상을 보며 그의 단편‘서울, 1964년 겨울’에 적힌‘꿈틀거림’에 대해 생각했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는 어둡던 시절, 창문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태양빛이 사선으로 명암을 만들어내는 서울의 어딘가에서 사진가와 소설가가 마주하고 있다. 신문을 손에 들고 벽에 기대어 사진가를 바라보는 김승옥. 꿈틀거리는 빛의 명멸을 소설가의 얼굴에서 낚아챈 강운구.

소설가 김승옥.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소설가 김승옥.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은 없다.” 20년 전 <마을 삼부작>을 발표한 사진가 강운구의 작가 노트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새마을을 만들겠다며 시골 집들의 지붕을 뜯어고치던 시절에 찍은 마을의 풍경들에 대한 감회다. 그리고 시간은 어김없이 훌쩍 지나갔다. 마을 풍경들을 찍던 그 시절의 빛을 간직한 필름 매거진을 보관했던 상자를 뒤적였다. 이번에 현상되고 인화된 사진들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이다. 사진가는 이렇게 말했다. “50년 동안 저장했던 강운구의 타임캡슐이 개봉됐다.”

‘사람의 그때’는 1960년대 후반부터 기록해온 160명의 문인과 예술인들의 초상 사진전이다. 소설가 이청준·박경리, 시인 서정주·박두진, 평론가 염무웅·백낙청, 사진가 김기찬·한정식·황규태, 화가 장욱진·천경자, 건축가 김수근, 출판인 한창기…. 사진가 강운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났을까? 사람의 반세기는 그만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인 것일까?

전람회는 먼 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부산 해운대구의 요트 선착장과 가까운 곳에 있는 고은사진미술관. 비행기를 탈까? 아니면 1970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며 그 시절을 떠올려 볼까? 이런, 한심하기는. 1970년대에 태어난 내가 그 시절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감정이입을 하려 했을까? 10년 전 사진가가 쓴 <강운구 사진론>을 배낭에 넣고 부산행 기차를 탔다.

화가 천경자. 영화 ‘퀸 크리스티나’의 배우 그레타 가르보의 초상을 그린 ‘청춘의 문’ 아래서 천경자가 눈을 감고 있다.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화가 천경자. 영화 ‘퀸 크리스티나’의 배우 그레타 가르보의 초상을 그린 ‘청춘의 문’ 아래서 천경자가 눈을 감고 있다.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문인과 예술인들의 초상 사진들은 전시장 입구 양쪽에서 두 줄기로 뻗어나간다. 소설가 김원일을 시작으로 왼쪽은 글 쓰는 사람들이, 오른쪽은 화가 윤형근을 비롯한 시각예술가들의 초상이 이어진다. 강운구 작가는 전시회 구성의 맥을 산맥과 강물로 비유했다. 1970·1980년대 우리 문화예술의 지형을 형성했던 산맥과 강물이 두 줄기로 요동치며 흐르다가 전시장의 중심에서 만나 소용돌이치며 뒤섞인다. 그 중심에는 이름 없는, 아니 이름을 알 수 없는 화가 한 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반세기 전의 문인과 예술인들의 얼굴들을 마주하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60대로 보이는 여성 관람객 세 명이 사진 속 인물의 의상과 소품들을 반기며 수다를 떨었다. 사진이 관람객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소란함이 나쁘지 않았다. 고은사진미술관 이미정 학예사는 다양한 연령층의 관람객들이 찾아와 조용했던 사진미술관이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다며 반색했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 객석에서 다시 <강운구 사진론>을 펼쳐놓고 ‘사람의 그때’를 떠올렸다. 초상의 주인공들 중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강운구의 말처럼 시간과의 겨루기는 슬픈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슬프지 않다고, 사진가는 그의 책에 적어 놓았다. 화석 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뿐이라는 것이다. ‘화석’이란 단어에서 롤랑 바르트의 말들이 떠올랐지만 생각을 접었다. <강운구 사진론>은 한국적인 사진을 추구했던 그의 사진 철학서다. 원로의 사진가는 사진을 재구성하는 미술계의 흐름에 동승한 젊은 사진가들을 걱정한다. 사진은 사진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른바 강운구의 ‘밥 사진론’이다.

“쌀로는 밥 말고도 떡이나 죽, 그리고 튀밥 같은 것들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주식인, 뻔한 쌀밥을 짓는 것이 가장 쌀답게 쓰는 것이다. 사진도 그렇다. 그러므로 기반이 약한 우리나라의 사진에서는 쌀밥 타령을 아직은 해야만 된다.”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사진가 강운구를 만났다. 사진 이론서가 전무했던 시절, 젊었던 그는 어렵게 외국 서적을 구해 번역하며 사진의 본질을 이해했다.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운구가 받아들인 강운구의 ‘결정적인 순간’이란 “찍고자 하는 대상의 선과 면, 그리고 광선의 상태가 어우러져 완전하게 구도가 잡히고, 피사체와 사진가의 감정이 일치하는 순간”이다. 그에게 초상 사진의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 물었다.

“사람을 제대로 찍으려면, 발품을 팔아 그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빛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그 사람의 아우라는 그 사람이 오래 머물면서 이루어낸 고유의 환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법이다. 그만의 공간에서 쏟아지는 빛과 그늘이 사람들 얼굴 위에서 부단히 교차한다. 어떤 빛을 받아들일지는 사진가의 태도에 달려 있다. 유섭 카시처럼 아첨해서도 안 되고, 리처드 아베든처럼 빈정거리는 것도 곤란하다(두 사람 모두 유명한 초상 사진작가다). 결정은 늘 찍히는 이들 스스로가 하는 것이다. 나는 말없이 그 사람들의 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화가 장욱진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화가 장욱진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사람들을 찍으러 갈 때마다 지러 간다고 강운구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찍히는 대상들이 이겨야 그 사람 모습이 그 사람답게 찍힐 것이라는 게 그의 굳은 믿음이다. 결정적 순간은 사람마다 달랐다. 화가 장욱진처럼 사진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카메라만 들면 몸이 굳어버리는 소설가 박태순 같은 예민한 사람들도 있었다. 몇 컷 찍지도 않았는데, 박태순은 ‘이제 다 찍었죠?’라고 말하며 진땀을 흘렸다. 사진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박태순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진가는 잽싸게 그 순간과 장면을 낚아챘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다려도 그 모습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그런 모습 또한 그 사람의 성격이라 생각해 사진가는 셔터를 눌렀다.

반세기 전부터 찍었던 시대의 초상들에는 문인과 시각예술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도 있고, 기억은 나지만 필름을 찾지 못해 현상할 수 없었던 초상들도 있다. 유명하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찾아다니지 않았다. <우연 또는 필연>(1994)이라는 그의 사진집 제목처럼 살면서 어쩌다가 인연이 닿게 되면 만났던 것이다.

- 건축가 김수근. 자신이 설계한 파주의 집으로 사진가와 한창기 선생을 초대한 김수근.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 건축가 김수근. 자신이 설계한 파주의 집으로 사진가와 한창기 선생을 초대한 김수근.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건축가 김수근과의 만남은 출판인 한창기 선생 덕분에 이루어졌다. 둘은 허물없는 친구였다. 한창기 선생이 말했다. “참 이상해, 어째서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일찍 떠나게 될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김수근의 사진을 강운구는 찍지 못했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된 김수근이 다시 그들을 불렀다. 김수근은 “맘대로 찍어”라고 말했지만 강운구는 쩔쩔맸다. 한 인생의 마지막 사진을 찍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옆에 있던 한창기 선생은 김수근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며 멋있다고 그를 격려했다.

“덧없는 삶에 덧없는 사진.” 얼마 후, 한창기 선생이 친구를 따라 세상을 떠났을 때 강운구는 “덧없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강운구는 한창기 선생이 만들었던 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그와 인연을 맺었다. 자신이 기획한 사진을 찍기 위해 신문사 사진기자를 그만둔 그에게 선생은 잡지의 지면을 제공했다. 각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한 선생이 임종을 앞두자 강운구는 또다시 사람의 마지막 사진이 될 얼굴을 찾아야 했다. 두 장을 골랐다. 양복을 입은 사진과 한복을 입은 사진. 양복 사진을 먼저 그에게 내밀었다. “좋다!” 잡지에 실릴 사진을 고를 때는 깐깐했던 선생이 첫 사진이 좋단다.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기 싫었던 강운구는 한복 사진을 꺼내지 않았다.

충주호에서 요양 중인 출판인 한창기.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충주호에서 요양 중인 출판인 한창기.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한창기 선생은 그의 생애 마지막 여름 충주호 근처에서 요양했다. 물을 보면 좋다는 말을 들었단다. 강운구는 선생과 함께 물가로 갔다. 바위에 걸터앉은 한 선생은 먼 산과 하늘, 그리고 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찰칵. 선생의 뒷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아무도 말이 없었다. “물도 그 안에 잠긴 산도 한낮의 어둠이 삼켜버린 듯했다”고 강운구는 기억했다.

“강운구에게 찍히면 안 준다. 다들 그렇게 말했다. 지금에서야 그들의 얼굴을 보여주어서 죄송하다. 아직 살아있을 때, 건강할 때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회상에 잠긴 사진가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던가?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사진가 강운구는 힘이 세다. 나는 그가 만났던 이청준의 소설 <시간의 문>에 등장하는 사진가 유종렬의 모습과 강운구를 겹쳐 놓아 본다. 사진기자였던 유종렬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미래를 찍는 사진가가 되려 한다.

소설가 이청준, 서울 잠실 1990.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소설가 이청준, 서울 잠실 1990.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난 내가 찍는 사진을 당시로서는 아무것도 해석을 하려 하지 않아요. 다만 사진을 찍는 것뿐이지요. 해석은 훨씬 나중의 일이에요. 사진들은 나중에 인화가 될 때 비로소 내 해석을 얻게 되고 현실의 의미도 지니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진을 찍는 일은 무엇이 됩니까. 나는 오히려 미래의 시간대를 찍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때의 내 시간은 미래의 이름으로 살아지고 있는 셈이구요.”(이청준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378쪽)

소설가 이청준이 강운구가 개봉했다고 말한 ‘사람의 그때’라는 타임캡슐을 보았다면 ‘시간의 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강운구의 표현은 조금 달랐다.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 그래서 시간과의 겨루기는 항상 슬프다. 그러나 사진은 슬프지 않다. 강운구가 찍은 시대의 초상들은 ‘시간의 문’ 저 너머에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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