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경향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 하마르티아, 일하는 몸들의 운명

김숨, <제비심장>

그림 | 김상민 기자

그림 | 김상민 기자

1. 우리는 연루되었다

현재가, 미래를 위해 응전하는 우리의 반응과 방식을 문제 삼는다고 할 때2) 김숨이 <철> 이후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한 동의는 쉬워진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문학 재현의 주제라면, 그에 대한 태도는 문학의 윤리로 이어진다. 어떤 문제가 역사적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돌아온다면, 그것은 사건이 지닌 운명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조건과 결과가 반복적으로 구성되는 데 따른 결과, 현상이기도 하다. 왜 <철>은 13년을 경유하고 <제비심장>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는가? 왜 아직 그것은 유효한 이야기인가? 그것은 자본과 노동이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현재’들은 되풀이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문학은 이 일에 ‘연루’된다.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어든 이상” “모르는 척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3) 문학이 무엇을 발화할 때 그것은 독자와 함께 그 길에 기꺼이 들어섬을 뜻한다.

노동은 지금 사회에서는 그 모습을 단장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개인의 역량에 맡기는 ‘워라밸’ 같은 것들로 자못 은폐되어 있다. 우리는 대부분 일하는 사람이면서도 일을 노동으로 일컫기를, 일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부르기를 망설인다. 우리에게 노동의 얼굴은 육체와 결부되어 ‘몸 쓰는 일’을 노동이라 부르기 주저하지 않지만, 지성이나 감성이 비중을 차지하는 일에 대해서는 몸의 이미지를 축소하려 한다. ‘노동자’란 단어는 법정 분쟁이나 실직·이직 등의 문제와 함께 서류 위에서만 낯선 용어로서 떠오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노동을 말함에 있어 그다지 육체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노동은 감추고 싶은 신체의 비밀처럼 언제나 주체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뒤따라오는 셈이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종속된 유용한 것의 생산이라는 측면은 고대 철학자에게 필연성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이 폴리스의 정치활동이 요청하는 바에 힘입어 노동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다는 것, 그로부터 노동하는 자는 노예의 속성을 껴안으며 주인의 자유를 담보하는 자로 규정되었다는 것과 같은 오랜 역사적 인식은 근대에 이르러 노동을 신성시 여기는 운명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급하게 한 사회가 성장가도를 달릴 때 노동자의 육체들이 기계로 치환되었던 역사를, 그러면서 육체가 인격을 지워나가는 과정을 목도케 함으로써 노동의 차별화는 사라지지 않고 강화되었다. 그것은 인식에 꽤 고단한 그림으로 각인되어 우리는 육체를 홀대하거나 외면하는 방식으로 인격과 거리를 떨어뜨리며, 노동에 있어서의 육체는 다른 영역, 다른 누군가의 것이라고 구분하는 편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동에 대한 멸시는 인류사를 통해 반복되고 있다.

김숨이 시차를 두고 발표한 이 두 이야기는 하나의 궤적 속에서 현상으로서 재현되는 우리의 일과 일하는 사람, 일하는 환경에 대해 반복하여 묻고 있다. 오늘은 어제와 무엇이 다른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왜인가? 이것은 곧 현재를 대하는 문학의 태도이기에, 문학의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세계는 오직 그것을 바꾸려는 기도 앞에서만 그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4) 그러니까 이 글은 노동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에 대해, 그것을 담아내는 문학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도 일하지 않고 살 수 없으며 우리 중 누군가는 오롯이 육체를 통해 그 성과를 달성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쓴다. 우리는 모두 연루되었다.

2. 코러스

언어가 시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은 기존의 의미망을 끊고 달아난다.5) 시적 형식에 대한 이러한 이점은 <제비심장>으로 들어와 의도적 코드 끊기를 수행하며 노동소설의 기율을 벗고 달라진 노동 환경과 노동 주체를 돌아보게 하는 한편, 노동하는 우리 삶의 본질에 더욱 밀착된 사유를 부추긴다. 문학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형식적 모험이라면, “말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6) 작가의 발화는 문학이란 형식으로 재현되고 인물의 행동은 작가의 행위가 된다. 이 소설의 발화는 그 형식이 심상치 않다.

“뛰어오르고, 기어오르고, 춤추는 걸 배우고 와.”

그래서 춤추는 것까지 배우고 찾아갔는데 죽고 없었어. - 프리드리히 니체, <중력의 0에 대하여>(34쪽)

“종달새는 허공에서 죽었대.”

“어떻게 떨어지는지 몰라서.”- 쥘 쉬페르비엘, <중력>(38쪽)

거대 철선의 구조물 조각인 ‘철상자’ 안 노동자가 철학자와 시인을 말한다. 어째서 이 노동자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고 또 그것을 재현하는 노동소설에서의 화법을 완전히 비켜 서 있는 것일까? 노동의 서사가 반드시 리얼리즘을 따를 이유는 없으나, 그것은 재현의 윤리와 결합하며 미화하지 않는 방법으로서 노동에 대한 존중과 노동자의 고단함을 해치지 않는 핍진성으로서 최선의 서사기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숨은 <제비심장>에 이르러 완전히 다른 차원의 발화를 노동자의 언어에 씌운다. 언어는 극도로 개별화되고 두뇌에 의존하는 지식체계로서 구조화된 결과물이라 그들의 대화를 육체노동자의 아비투스로 읽어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해서 이를 그리스 비극의 구성요소인 ‘코러스’로 독해할 때, 우리는 언어와 발화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망이라는 관념에서 놓여나 노동의 운명, 노동이란 세계의 운명으로 이해의 기반을 옮겨갈 수 있다.

세계와 내가 결별하지 않았던 그때, 영웅적 주인공의 전유물이었던 비극은 이제,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잃”(289쪽)은 “하루살이”(68쪽) 노동자들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그것은 고독한 개인의 운명을 거슬러 집단을 대표하는 대리인의 위상을 획득하도록 인물을 추동한다. 니체는, 비극을 인생의 고통과 무상함에 직면한 인간 삶의 지속 여부에 대한 고뇌의 발현이자 삶에 대한 정당화의 결과물로 보았다.7) 이제 철상자는 하나의 커다란 무대가 되고, 끊길 듯 내뱉는 발화들은 노래가, 공중그네타기와 아슬한 발판 위의 종종걸음들은 춤이 된다. 노동은 무대 위 극으로 전유되고 이들의 말은 지속되는 노동의 고달픔과 삶의 정당성을 향한 질문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의 춤, 그러니까 노동은 헤라클레스가 아우게이아스왕의 마구간을 청소한 것과 같이 평가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적 지겨움이 따르는 일상적 싸움일 뿐 영웅적 용기를 수반하지 않는 것으로 구분된다. 이 노동이 비록 목숨을 담보로 할지라도 헤라클레스의 노동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위대한 행위로 평가받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8) 이들의 노동은 반복되며, 얼마든지 다른 노동력으로 대체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노동의 척박함에 대해 코러스는 묻고 답하고 자조하고 위로한다. 코러스는 따로 또 함께 노래되지만, 나와 너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특별히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만이 증명이자 증거가 되는 노동 현장의 특징은 개인을 독자적 인물로 기립시키지 않는 코러스와 성격을 나란히 한다.

이들에게 코러스는 노동요다. 과중한 노동일정 속 혼절과도 같은 가수면 상태에서 읊조리는 노래들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아야 할 호흡이다. 나를 잠에서 버티게 하면서 아직 내 옆의 동료가 추락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기술의 수사학이다. 바람도 나비도 시간도 없는 철상자 속 고소의 공포로부터, 아찔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버티어주는 주문이다.

“노래가 멎으면 내 인생도 멈출 것 같아.” “철상자 속 우리는 있으면서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죽음도 없어.” “하지만 고통은 있어.”(217쪽)

깊이 20미터에 달하는 철상자 안 허공에서 공중그네를 타고 내벽에 페인트를 입히는 여성노동자들은 크기가 맞지 않는 안전모 대신 시장 좌판에서 산 스카프를 쓰고 있다. 페인트와 시너에 오염된 몸들은 머리카락조차 제대로 보전하지 못한다. 용접공 옆에 붙어서 불티를 감시하는 눈은 별을 보고도 착시를 일으키고 가는귀는 먹었다. 생리는 오래전에 끊겼다. 시너로 망가진 손으로 손주의 여린 살갗을 만질 수 없어서 이들에게 “사랑은 나쁜 것”(157쪽)이다. 남편은 잔업을 마치고 나오다 심장마비로 죽었지만 “일하다 죽은 게 아니어서”(167쪽) 산재신청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경제적 부담만 가중시키는 존재가 된다. 이들에게 생은 ‘잃는 것’뿐이다. 그저 “더디게 평생에 걸쳐 식”(49쪽)고 있는 이들의 생명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되지 못할 색색의 스카프는 이들을 한 마리 새로 만드는 연극적 장치가 된다.

코러스는 이 서사의 질문이다. 비극의 구성에서 코러스는 행동력이 없다. 노인과 여성들로 구성된 코러스는 극의 흐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디오니소스 제의가 기본적으로 착란의 상태를 전제하듯 이들의 노래는 몽환의 상태와 겹치며 발화자인 노동자에게 응답의 책임을 지우지 않고 그 임무를 소설 바깥으로 던진다. 왜 이들은 노동으로 오염되고도 그 존재를 부정당하기만 하는가? 왜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하는가? 50대와 60대를 훌쩍 넘는 여성노동자들은 철상자 속을 날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일하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고무나무에 물을 줘야 한다. 잃어버린 앵무새도 찾아다녀야 한다. 생명을 낳고 유지하는 모든 일이 여성의 손에 의존해서만이 지속된다. 육체의 고단함은 남녀에게 따로 있지 않고 노동에 대한 책무는 여성에게도 공정하게 부여되었지만, 가사노동의 책임만은 가정이라는 내부의 폐쇄성과 함께 고스란히 여성에게 전승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육체의 “노고와 고통은 유기체가 죽어야만 끝이”9) 나는 것일까.

“날게 내버려둬. 못도, 나사도……철사, 발판, 페인트통, 호스, 스패너, 전동 드릴, 죽은 종달새, 안전모, 작업화, 그리고…….” “얼굴.”(46쪽)

철상자 속으로 날개 없는, 나는 법을 모르는 많은 것들이 부유한다. ‘죽은 종달새’는 동료이기도 하고, 다가올 이들의 운명이기도 하며 분신이기도 하다. 먼저 떠난 동료이자 죽은 신이다. 이들의 노동은 철로 거대한 배를 만들어내는 조형이다. 조형을 하며 만들어내는 몸의 이야기는 한 편의 비극으로 변주된다. 아폴론적 조형과 디오니소스적 춤과 노래가 이들의 몸을 통해 발현되고 그것은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아닌 차라리 범접할 수 없는 노동하는 육체의 비통을 엿보게 한다. 그들에게 너무 먼 이야기 같은 코러스는 의미를 모르고도 부를 수 있는 노래처럼 계급성을 지우는 한편 살아서도 죽어서도 끝내 중력과 싸워야만 하는 허공에서 죽은 종달새와 같은 이 운명의 비극성을 남긴다.

3. 그리고 육체들

“세상이 깻잎처럼 작네.”

“저 작은 게 무서워서 손가락으로 건드려보지도 못했네.”(34쪽)

‘나’는 불을 감시한다. 그런 나를 누군가 또 감시한다. 감시가 일이 되고 ‘확성기’의 소리만으로도 한 체제는 굴러간다. 이것은 판옵티콘의 눈이다. 노동자들은 표어만으로도 자신의 할 일을 숙지하고 있다. 노동하는 육체에 대해서 작가는 <철>을 통해 먼저 말했다. 노동은 육체를 할 수 있는 한 구분 짓고 구획한다. 우리는 <철>을 통해 가장 소외된 육체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끊임없이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던 착취의 근거는 육체들끼리도 구분하고 차별화하여 불화하게 한다.

가난한 마을에 조선소가 들어서자 남자들은 조선소 노동자가 되고, 쌀독에는 쌀이 그득히 차오른다. 모두가 조선소를, 철선을, 쇠를 우러른다. 조선소에서 일하려는 외지의 남자들이 마을로 찾아든다. 그러나 모든 남성의 육체가 조선소 노동에 투입될 때 ‘꼽추’만은 그 자격을 얻지 못한다. 그의 몸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규정되며 끝내 조선소 입성을 허가받지 못한다. 외지에서 왔지만 조선소 노동자가 되어 결혼까지 한 건장한 육체들과 달리 그의 존재는 계속 외부로 남는다. 꼽추는 조선소로부터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로부터도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조선소 노동의 성격은 그를 노동하는 몸으로서 비정상으로 규정하여 소외시킨다.

초기 근대 자본의 신화적 속성과 그 이면을 그린 이 소설은 ‘가정독본’과 ‘보건소’라는 상징물로 움직이는 ‘조선소 마을’을 통해 생명관리통치의 모습을 재현한다. 임신, 임신 중단과 같은 출산율의 통제라는 목표는 기관의 독려 외에도 적합한 생산력을 출산하여 삶을 지속하고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이 포개져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된다. 가부장제에 더해 산업화는 ‘힘’ 있는 육체 선호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선별에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투신한 노동의 현장은 다시 육체를 통제하고 차별한다. 경제적 이익의 효과적 달성을 위한 인구통제와 그들 속으로 침투된 규율권력은 마을을 자동적으로 작동케 한다. 근대 이후의 권력은 제 몸을 감추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마을의 넝마주이도 조선소 노동자가 되는 마당에 끝내 그 자격을 얻지 못한 꼽추는 다른 경로로 돈을 번다. 부는 비정상적으로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발소를 차린 꼽추는 ‘쇠틀니’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이발소 의자와 치과병원 진료대는 그 생김도 유사하다. 그런데 생니를 뽑고 틀니를 박아 넣는 일은 어쩐지 의료행위라기보다 신체형을 연상시킨다. 망치나 펜치 같은 의료에 부적합한 도구를 사용하며 극한의 신체 고통과 낭자한 피를 동반한 이 행위는 이발소 전면의 거울을 통해 전시된다. 이 형벌과도 같은 작업은 그에게 ‘입’을 저당 잡히고 마는 사람들의 앞날을 예견하게 한다. 조롱을 뱉던 입은 처절하게 응징되는 한편으로 이제 틀니의 유지보수 즉 입의 관리는 꼽추의 손에 달렸다. 입은 자연 인간으로서의 생명 즉 먹는다는 행위와 사회적 사람으로서의 생명 즉 발화의 행위를 담당하는 실용적, 상징적인 기관이다. 그런 입을 관리하는 꼽추는 마치 음지의 관리인, 관료제 사회의 작은 통치자와도 같다. 음지에서 허가 없이 자행하는 그의 일은 후에 고리대금업으로 옮겨가며, 또 다른 의미로 입을 틀어쥐게 되는 것이다.

가장 소외된, 그래서 가장 하위의 육체성을 지닌 인물로 꼽추와 함께 말할 수 있는 인물은 ‘이경자’이다. 그녀는 조선소 노동자를 위한 창녀다. 도덕과 상관없이 생명관리의 수단들은 ‘먹고살기’, 노동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버젓이 존재한다. 여관에서 일을 치른 후 불을 켜고 이경자의 얼굴을 확인한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경악한다. 그녀가 너무도 늙은 창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그녀와 관계되었었다는 의식의 환기가 불러오는 환멸의 순간이다. 자연적인 몸으로 태어났지만 노동자의 육체는 이미 기계로서 복속되어 있다. 오직 이경자의 늙은 몸을 확인하는 그 순간만이 온전히 자신의 몸을 반추할 찰나의 기회로서 번뜩인다. 그렇다면 왜 하필 경악할 정도로 늙은 창녀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경자의 몸이 출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관리수단으로서의 유용성을 획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가 출산 능력이 있다면 조선소 마을의 통치 체제는 그녀에게 몸을 파는 노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격이 아닌 노동력으로 치환되는 이들의 몸은 하나의 ‘힘’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다시 육체들은 등급으로 분류되고 소외되는 것이다. 이런 육체는 때로 자신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진짜 권력의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철선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즐기는 꼽추, 결혼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욕정을 풀어주는 늙은 창녀 뒤로 숨은 얼굴은 따로 있고 이들의 육체는 점점 더 자신의 온전한 그림자와는 멀어진다. 실체 없는 철선의 주인은 영원히 살고, 마을은 녹이 스는 쇠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들의 입속에 들어앉은 쇠틀니도 녹슬어간다.

4. 0의 그림자

“우리가 사람이 되면 망치들이 경악할 거야.”

“우리가 사람이 되면 가위들이 놀라 얼어붙을 거야.”

“우리가 사람이 되면 사람은 다른 존재가 돼 있을 거야.”(293쪽)

식사나 휴식을 충분히 취하기에는 철상자를 오르내리는 시간과 수고가 만만치 않다. 공중그네 위의 페인트공들, 철선벽에 발판 작업대를 설치하는 발판공들은 차라리 그 위에서 크림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쪽잠을 자며 잘 들리지도 않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정규직 조선소 노동자, 하청업체 파견 노동자 그리고 하청업체가 재하청을 준 물류팀으로 구분되는 이 노동 현장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물류팀에서 고용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하루살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고용이 오직 하루만 약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살이들은 ‘일당’을 받고 일한다. 일당을 받는다는 것은 인건비의 지출을 줄일 수 있게 움직이는 것만이 자신의 경쟁력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생산성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의 힘, 노동력의 잉여에 있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이들의 ‘일당’노동에도 들어맞는다. 이들은 철저히 자신의 육체, 그 힘을 동력삼아 ‘오늘’만을 생산하지만 서로의 경쟁력이 서로를 ‘잉여’로 떨어뜨리는 역설의 운명을 가진다. 그마저도 연속성을 기약할 수 없는 ‘오늘’과 ‘오늘’만이 반복될 뿐이다. 이들에게 노동은 아이러니다. 같은 일당을 받아도 더 빨리 일을 끝내면 하청의 이익은 커진다. 그래서 물류팀 반장은 늘 말한다. “뛰지 마,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해.”(61쪽) 뛰다가 산재를 내는 것, 그것은 회사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이며 회사의 이익에 구멍을 내는 짓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 것. 그러면서 인건비 지출을 줄여 업체의 이익을 도모할 것. 그러면 당신은 좋은 노동자이니 하루 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마 하는 저의가 ‘오늘 끝내라’에 담겨 있다. 이들의 고충은 업무기량으로만 충당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오늘을 얻기 위해서는 부당한 요구들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부는 오늘을 약속하지 않는다.

“0은 구멍이야.” “0은 거울이야.” “0은 없음.”

“0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도 없어.”(250쪽)

삶은 노동과 일체화되어 그렇게 노동만이 이들의 삶의 전부가 된다. “못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벽에 못질을 할 때이며, 벽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도 거기에 못을 박을 때”10)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자가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각인시키는 일은 노동을 하는 순간 혹은 노동을 통해서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이 소설 안과 밖에 많이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죽음, 그 빈자리를 통해서만이 존재를 확인받기도 한다. 가장 나쁜 것은 그런 죽음조차 은폐되는 것인데, ‘0’이라는 무사고, 무사망 등의 숫자는 동시에 이들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마저 말소하는 좌표로 수렴되고 만다. 이런 죽음이, 공동체를 극복하고 개인의 고유성을 존립하는 일이 된다고 할 때 노동자 개인의 투신은 더욱 고독하고 숭고해진다. 그러나 이런 숭고 이전에 존엄은 생의 전면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크레인 위의 ‘정씨’와 같은 이는 끝내 고공에 버티어 서 있다.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 외부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철상자 안이 아니라 저 드높은 곳에서 ‘보이길’ 원하는 정씨의 시위는 현실의 그들에 대한 재현을 넘어선다. 결국 그것은 노동이자 행위로서 존재의 확인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죽음을 껴안고 있는 것이지만, 이들에게 죽음은 유독 가시화되어 있다. “시계에는 시침도 분침도 초침도 없”(76쪽)고 동료는 자주 “넷이 들어”가서 “셋이”(75쪽) 되곤 한다. “일하다 죽기도”(167쪽) 한다는 말을 태연하게 뱉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조선소, 노동 현장의 비밀, 누구나 아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나의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을 내가 인수하며 이전의 나는 소멸하고 다른 나로 거듭난다는11) 말을 떠올릴 때, 그런 죽음은 살아 있는 순간에는 기회조차 없다가 생성되는 노동자의 연대의식이 어떤 박탈들을 통해 형성된 잔혹하고 옹골찬 것일지, 고개 숙이게 된다. 그리하여 <제비심장>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육체만이 노동을 지속할 생산의 힘임을 알고 온전히 오염되어가면서도 동료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추락하는 법을 모르듯 기도하는 법도 모른다.

5.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12)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걸 만들어.”

“우리는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걸 만들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걸 만들어.”(94쪽)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세계의 사물들은 일단 인간에 의해 생산된 이후엔 인간의 삶과는 무관해지고, 인간의 삶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이었다.13) 노동자가 생산물에 대해 낯설어지는 이 자본주의의 허상을 김숨은 끝내 볼 수 없는 ‘철선’에 대입한다. <철>에서 그것은 거주공간을 무화시키는 소외까지 나가며 <제비심장>에 이르러 급기야 인물들을 철상자 안으로 가두는 것으로 어느 쪽에서도 노동자들은 주인 되지 못하므로 공간과 나의 사이에 ‘관계’가 발생하지 않는다. 공중그네와 발판 위에 겨우 매달려서 선사先史의 누군가처럼 욕망과 두려움을 써내려간 낙서만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지워질 삶의 유일한 증거로 남는다.

육체의 노동 그 반복 재생되는 노동력이, 노동자의 재산이자 능력이면서도 동시에 타자로 하여금 그들의 존엄을 손상시킬 수 있는 계급화의 속성이 된다면 그것은 그저 그 자체의 비극적 운명이나 결함일까? 거대 자본이나 특정 악인의 문제가 아닌 연쇄적 하청이라는 법의 망을 피하기에 너무도 알맞은, 책임회피의 구조나 그 안에서의 끊임없는 권력의 세분화, 그를 통해 거듭 분류되는 육체에 대한 재단과 멸시는 나이나 성별, 국적 같은 문제와 함께 새로운 시스템으로 구조화되고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본은 제 입맛에 맞게 여성, 이주노동자와 같은 이들을 ‘쉬운’ 노동력으로 포섭하며 얼마든지 거대한 철선과 같은 허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고대 비극에서 신탁에 의한 운명의 무지가 주인공의 결함이었다면, 지금 어떤 처지들은 자신의 운명을 너무도 뻔히 알고 있다. 조선소 주인은 조선소 주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철은 있지만 철선은 결코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 조선소에서 일하지만 일용직 노동자 누구도 조선소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들은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다.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않는 세계 앞에서 결함을 깨닫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것이 이들의 진정한 비극일지 모른다. 고대의 그것이 영웅의 치명적 결함이라고 부르던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할 때, 우리의 하마르티아는 한 사회의 시스템 속에 내재되어 마치 한 인물, 특정 집단의 선천적 결함으로 수렴되게 하는 속임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노동이 세계에서 어떤 책무를 부여받는 것이라면 문학이라는 노동의 책무는 이 세계의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지독하고 끈질긴 반복재현 앞에서 조금 더 숙연해지는 것은, 그런 속성을 함부로 운명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희망의 전언으로만 이 글을 마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노동은 지속될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하고 바라봐야 한다. 조세희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발화한 당대의 노동과 빈부라는 현실인식은 시간을 경유한 현재에 이르러 다음 세대 작가를 통해 재현되었다. 그것은 지속되는 노동에 대한 경배가 아닌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착복 형태와 그 대상, 변하지 않는 노동자에 대한 소모적인 처우와 같은 문제들이 반복, 강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학의 발화는 0으로 기록되는 숫자 너머에 있는 인간에 대한, 일하는 육체에 대한 순정한 기도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철은 인류문명 이래 가장 널리 그리고 오래 지속된 원료 중 하나이다. 쇠와 피의 성분이 같다는 사실은 인간의 비극적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쇳덩이에서 피냄새가” 난다는 마지막 문장은 일종의 추궁이자 경고이기도 하다.

쇠는 녹슬고 인간은 죽을 운명이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확인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확인은 보다 정당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 갑작스레 나타나 생을 번쩍 들어 올려줄 신은 없겠지만, “삶은 미친 사람에게나 좋은 것이”(319쪽)라는 노동자의 냉소가 실은 정직한 육체의 노동에 대한,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새를 향해 기꺼이 크림빵 조각을 나누는 저 친절하고 정직한 손을 위해 기도해 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각주

1)김숨, <제비심장>(문학과지성사, 2021), <철>(문학과지성사, 2008)을 다룬다. 본문 인용은 <제비심장>으로, 쪽수만 밝혀 쓴다.

2)푸코는 1973년 발표한 ‘세계는 거대한 정신병원이다’라는 글에서, “미래는 우리가 현재 일어나는 일에 반응하는 방식이고, 어떤 변동이나 의식을 진리로 변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미래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오늘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썼다. 오생근, <미셸 푸코와 현대성>, 나남, 2013, 52쪽.

3)장 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역, 민음사, 1998, 33~34쪽. 사르트르는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음을 가장 투철하게 의식하려 애쓰는 순간이야말로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말한다.

4)장 폴 사르트르, 위의 책, 315쪽.

5)서동욱, ‘앙가주망에 대한 단상’, <익명의 밤>, 민음사, 2010, 167쪽.

6)장 폴 사르트르, 앞의 책, 30쪽.

7)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박찬국 역, 아카넷, 2007, 99~100쪽.

8)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역, 한길사, 2019, 189~190쪽.

9)한나 아렌트, 위의 책, 186쪽.

10)장 폴 사르트르, 앞의 책, 315쪽.

11)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5, 232쪽.

12)고대 그리스 극작술로 파국의 직전 신이 인위적으로 등장해 모든 것을 극적으로 해결하는 기법.

13)한나 아렌트, 앞의 책,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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