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상처에서 나온 서슬퍼런 증오...아흔 넘어 내민 용서의 손길읽음

김종목 기자

국제갤러리 루이스 부르주아 ‘유칼립투스의 향기’전

아버지 불륜·어머니 죽음의 충격

노년까지 어린시절 트라우마 표출

1974년 설치 작품 ‘아버지의 파괴’

남성 신체를 토막낸 듯 형상화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 ‘거울’(왼쪽에서 세번째)와  ‘내면으로 #4’ 연작. 김종목 기자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 ‘거울’(왼쪽에서 세번째)와 ‘내면으로 #4’ 연작. 김종목 기자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트라우마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부르주아의 트라우마는 미술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정신분석가들에게도 연구 대상이 된다. 이 트라우마로 부르주아 작품세계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나온다. 개별 인간으로선 처참하고 비극적인 경험이었다.

루이스는 1922년부터 10여년간 아버지 루이 부르주아와 입주 가정교사의 불륜을 목도한다. 고통스러운, 떨쳐낼 수 없는 기억은 작품 활동에 반영됐다.

루이스의 작업 주제에 관한 설명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여성의 젠더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는데, 그 주제를 극렬하고 공격적으로 드러낸 게 1974년작 ‘아버지의 파괴’다. 그는 “공격하지 않을 때 살아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한다”고도 했다. 인체 부위를 활용한 공격적인 이야기를 설치작품으로 전개했다. 그는 남성 신체 부위를 토막 낸 듯한 형상을 식탁에 올렸다. 여성 신체 부위 형상을 둘레에 놓았다. 가족이 아버지를 잡아 먹는 근친 도륙을 재현한 이 작품을 두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공격성을 떨쳐내려고 과거 아버지를 파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이상적 아버지를 재건하는 것”이라는 등 여러 해석이 나왔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즘 미술로도 해석되곤 한다.

‘내면으로 #4’와 설치 작품 ‘POIDS’. 김종목 기자

‘내면으로 #4’와 설치 작품 ‘POIDS’. 김종목 기자

‘내면으로 #4’ 연작 중 ‘유칼립투스의 향기’(부제) 2점. 국제갤러리 제공

‘내면으로 #4’ 연작 중 ‘유칼립투스의 향기’(부제) 2점. 국제갤러리 제공

어머니 조세핀 부르주아는 남편 외도를 묵인하고, 방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페인독감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다 1932년 사망했다. 이 또한 루이스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대표작 ‘마망’(1999)이 모성, 어머니와의 연대를 무겁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루이스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여러 인터뷰와 강연에서 아버지의 외도 때문에 생긴 상처가 예술작업의 토대라고 했다. 2008년 97세 때 프랑스 퐁피두미술관에서 전시를 열 때도 “내 후반기 50여년의 모든 작품 주제는 유년 시절에 그 원천이 있다. 내 유년 시절은 마력, 불가사의함, 드라마적인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예순 이후 노년 때도 서슬 퍼런 공격성을 드러냈던 작가는 아흔 넘은 말년에 용서와 화해, 치유의 미술 작업을 이어갔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최 중인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는 병상의 어머니를 살려내지 못한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와도 이어진다. 더 정확히는 트라우마의 극복과 자기 용서, 치유에 관한 이야기다. 루이스는 말년엔 식물 작업에 치중했다. ‘꽃’ 연작이 그중 하나다. 그는 “꽃은 아버지의 부정을 용서해주고, 어머니가 날 버린 것을 용서해준다”고 했다. ‘꽃’ 연작에서 죄책감도 떨쳐냈다.

치유와 회복의 또 다른 매개체 중 하나가 유칼립투스다. 루이스는 스튜디오를 정화하려고 유칼립투스를 태우곤 했다. 1920년 후반 어머니를 간호할 때 사용한 약용 식물이 유칼립투스다. 자신을 치유하고, 어머니와 얽힌 추억을 불러내는 매개체인 셈이다.

39점의 ‘내면으로 #4’ 에칭 연작이 전시 주축이다. 전시 제목과 동명인 ‘유칼립투스의 향기’는 ‘내면으로 #4’ 연작의 부제다. 루이스는 ‘너울’ ‘통로들’ ‘높이, 더 높이’ ‘잎사귀’ ‘내 비밀 인생’ ‘가족’ ‘추락’ 같은 부제를 넣었다. 2004~2006년 작업한 것들이다. 낙엽, 씨앗, 눈(eye)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이 이어진다. 루이스 특유의 인체 부위를 추상화한 이미지도 여럿이다. 갤러리는 “물리적 긴장과 완화, 풍경과 신체, 내면과 외부 현실 간의 간극을 역동적으로 오가는 작품들을 지배하는 감성은 자기성찰”이라고 말한다.

‘POIDS’(1993), ‘거울’(1998) 등 조각 작품도 나왔다. 거울은 루이스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거울은 “자기 내면을 직시하거나 다른 존재를 수용하는 매개체”란 해석도 나와 있다. ‘속귀’(1962)와 ‘무의식의 풍경’(1967~1968) 등 1960년대 조각 작품도 볼 수 있다. 전시작은 총 54점. 오는 30일까지. 무료.

1992년 마국 뉴욕 웨스트 20번가 자택 계단에서 내려오는 루이스 부르주아, 국제갤러리 제공

1992년 마국 뉴욕 웨스트 20번가 자택 계단에서 내려오는 루이스 부르주아,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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