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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이후에도 여공들이 있었다.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을 하던 청계피복노동조합 여공들은 퇴근 후 공부하던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1977년 9월9일 노동교실 점거 결사투쟁 사건(9·9 사건)을 비롯한 이들의 투쟁은 노동사에 실패나 공백으로 기록됐다. 주도자들은 구속됐고, 노조원들은 흩어졌다. 정부는 사건 참여자들을 끈질기게 감시하고 괴롭혔다. 노조 경험은 당사자들에게도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주인공들.  신순애, 임미경, 이숙희씨 .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주인공들. 신순애, 임미경, 이숙희씨 . 영화사 진진 제공

이들은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로 오랜 침묵을 깼다.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많은 이들이 “시댁도, 남편도, 자식들도 모르는 일”이라며 출연을 거절했다. 설득 끝에 14명이 모였다. 영화는 누구도 기록하지 않은 역사를 당사자의 언어로 다시 쓴다. 다큐 영화에 흔한 기사 자료화면이 하나도 없다. 영화에 나오는 글은 모두 당시 노동자들이 쓴 것이다. 사진은 노동자들이 내놓은 것을 썼다. 투쟁하는 사진보다 노동교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하고 웃고 뛰어놀던 사진이 더 많다. 지식인도, 남성도 아닌 당시 10대 여공이었던 이들이 자신들의 말로 경험을 풀어낸다. 영화를 공동연출한 김정영 감독과 영화 주인공 중 한 명인 신순애씨(68)를 지난 17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청계피복노조 여성노동자들은 어리면 열둘, 열셋에 ‘시다’로 일 시작해 한달에 한두 번 쉬고 거의 매일 야근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했다. 야학의 전신인 노동교실에서 국어, 역사 등을 배우고 노조에 가입한 이들의 구술사를 기록하다 다큐 영화 촬영까지 하게 된 김정영 감독(오른쪽)과 노조 간부였던 신순애씨를 1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에서 만났다. 우철훈 선임기자

청계피복노조 여성노동자들은 어리면 열둘, 열셋에 ‘시다’로 일 시작해 한달에 한두 번 쉬고 거의 매일 야근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했다. 야학의 전신인 노동교실에서 국어, 역사 등을 배우고 노조에 가입한 이들의 구술사를 기록하다 다큐 영화 촬영까지 하게 된 김정영 감독(오른쪽)과 노조 간부였던 신순애씨를 1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에서 만났다. 우철훈 선임기자

“중등 수업 무료. 그 여섯 글자를 보고 쫓아간 거죠, 노동교실을. 제가 다이어트를 못해요. 없어서 못 먹었잖아요. 음식이 있는데도 안 먹는다는 건 나한테 너무나 참기 힘든 건데, 그때 ‘너 밥 먹을래, 노동교실 갈래?’ 그러면 ‘노동교실’ 할 정도로 좋았던 곳이에요. 거기서 ‘힘 없는 공순이(여공들을 낮잡아 이르는 말)’가 아니라 ‘당당한 노동자 신순애’로 거듭났어요. 그 시절이 지금까지도 삶의 희망인 것 같아요.”

신씨는 말했다. 신씨는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이름) 3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열세 살이던 1966년,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이른 아침부터 막차시간인 오후 11시20분까지 미싱을 돌렸다. 명절만 되면 며칠이고 철야를 했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잠깐 졸면 몸을 다치기 일쑤였다. 그러고도 월급을 못 받을까 걱정했다. 공짜로 공부 시켜준다는 유인물을 보고 노동교실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이 아니라 기형적 노동구조 탓인 줄 알았다.

신씨는 노조 소모임인 아카시아회 회장이 됐을 때 회보에 쓴 인삿말을 기자에게 건넸다. “기술자만 되면 서울에 빌딩은 모두 내 것이 될 것 같은 꿈에 아픔과 배고픔, 설움을 참으며 일을 했다. 일을 끝내고 집에 갈 때면 제과점에 보이는 빵이 그렇게 먹고 싶다. 그러나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며 살아왔다. (…)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지금 나에겐 무엇이 변하였는가? 제과점 빵은 지금도 먹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무슨 꿈이 이루어졌겠는가”라고 적혀 있었다. 글은 “흔히 말하기를 노력하면 무엇이든 안 되는 게 없다고 한다. 노력하다 못해 10년이 되도록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뭔지 몰라도 잘못 된 게 틀림없다. 변한 게 있다면 나에겐 직업병이란 병은 다 가지고 있다”고 이어진다. ‘7번 시다’가 ‘1번 미싱사’가 되는 동안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밥도 못 먹고 화장실을 참으며 일해야 하는 노동현실은 변하지 않았으며 가난이 여전히 목을 졸랐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영화 출연자들은 청계상가에서 자신의 40년 전 모습과 만난다.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영화 출연자들은 청계상가에서 자신의 40년 전 모습과 만난다. 영화사 진진 제공

희망은 노조, 노동교실이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일하는 거니까, 늘 기죽고 그랬죠. 근데 당시 남대문시장에서 미싱하는 애를 만났는데 ‘얘, 너네 평화시장에서 데모했다며, 어떻게 했니?’ 그래요. ‘그거 내가 했어’ 그랬더니 ‘진짜 고맙다’고, ‘너희 덕분에 남대문도 일요일마다 쉬게 됐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 이타적인 삶은 우리한테 진짜 절실했던 거예요. 저는 그때 저를 굉장히 잘난 사람으로 알았어요. 키도 조그맣고 얼굴도 이쁘지도 않고 내세울 게 없쟎아요. 근데 그때는 한번도 내가 안 예쁘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았어요. 역시 신순애는 멋있어, 막 그러면서.”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던 그때, 신씨는 자신을 지키면서도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에 눈 떴다고 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구속되고 노동교실이 완전히 폐쇄된다는 소문이 돌던 1977년 9월9일, 여성 노동자들이 삼엄한 단속을 뚫고 노동교실에 모였다. 그곳을 점거하고 “어머니 즉각 석방”과 “노동운동 탄압 중지와 노동 3권 반환” 등을 요구했다. 당시 15세 ‘시다’였던 임미경씨는 “평화시장에서 남자 한 사람 목숨 바쳤으니까,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되어야 한다”며 투신을 시도했다. 사건은 주도자들이 구속되면서 끝이 났다. 여성 노조원들은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들. 영화사 진진 제공

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들. 영화사 진진 제공

1970~80년대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2만5000여명 노동자 중 80%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청계피복노조원 대다수도 여성이었다. 그러나 언론 보도나 학술 연구에 등장하는 몇십 명을 제외한 이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는 잘 알려진 바 없다. 이들이 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지도 ‘살아남은’ 일부의 구술에 의존한 해석에 머무르고 있다. 신씨는 경찰이 집주인을 찾아와 신씨를 ‘빨갱이’로 모함하는 통에 1983년부터 2년간 18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는 “당시 지하철에서 우연히 노조를 적극적으로 했던 친구를 만났다. ‘언니 나는 평범한 주부로 살고 싶은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했다”며 “결혼 후에도 형사들이 찾아오고, 남편은 ‘과거에 무슨 행동을 했길래 형사들이 찾아오냐’며 다그친 모양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석사 논문 ‘열 세살 여공의 삶’에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 와해 이후 ‘빨갱이’라는 사회적 낙인, 성고문에 대한 공포, 블랙리스트를 통한 집요한 사찰 등으로 인해 점점 더 ‘말할 수 없게 됐다’고 썼다.

신씨는 가장 가까이에서 싸웠던 이들과 연락이 끊겼다. ‘1번 미싱사’ 시절 함께 싸웠던 ‘시다’ 조모씨, “80년대 퇴직금 싸움할 때 엄마가 들통으로 잡채를 가득 하나 해오셨던 친구” 공모씨, 결혼한 뒤에도 계속 현장에 나왔던 언니들…. 신씨는 “나는 어떻게 하다가 살아남았지만, 어떤 친구들은 아직 그 긴 터널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미안하다”며 “이름 없이 싸운 그분들한테 늘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신씨를 비롯한 영화 출연진은 그때 함께 싸웠던 그 사람들을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당당하지 않을 것 하나도 없다. 움츠러들지 말고 이제는 떳떳하게 내가 그 노동자였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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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영 감독의 시선은 <아름다운 전태일>, <1987> 등 과거 기록이 주요하게 다루지 않은 70년대 평화시장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향했다. 영웅도, 열사도 아니지만 치열하게 싸우고 자신의 삶을 지켜내온 청계피복노조 여성 노조원들의 말을 기록했다. 김 감독은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9·9 사건은 실패했는데 왜 다루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항상 승리한 기록만 남길 게 아니라 실패한 사건을 기록해 당사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성찰의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남성, 그것도 지식인에게 집중됐던 조명을 180도 돌려 당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카메라로 비추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신씨가 아카시아회 회보에 쓴 인삿말 전문.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에 나에게 무엇이 변하였는가>
먼저 내가 평화시장에 들어온 동기부터 말하고 싶다.
물론 이 시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거의 다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이렇다.
10년전 우리 식구는 부모님과 오빠, 새 언니, 조카 3명 모두 10 식구이다.
그 중 돈을 버는 사람은 큰 오빠뿐이다.

부모님은 환갑이 훨씬 넘어 노약하시고 겨우 밥을 먹을 수 있는 형편이다.
영세 가족은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작은오빠가 손을 다쳐 1년을 치료하다 보니 국수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

국수라도 배부르게 먹고 싶은 어린 심정에 나는 아는 언니를 따라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우기 위하여 따라온 데가 평화시장이다.

시장에 와보니 처음에는 눈이 매워서, 눈물이 나고 뿐 아니라 불편한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술을 배우며 돈을 벌 수 있다니 죽는 일만 아니면 무엇이든지 할 것 같은 심정이다.

시간은 아침 8시에서 점심시간도 없이 밤 11시까지. 그것도 부족하여 철야작업까지 시킨다. 우리 어린 시다에게는 아침에도 언니들보다 먼저 와서 옷을 정리해야 되고 점심 때도 미싱사에게 일감을 대주지 못하면 점심마저 먹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가야 했다.

어머님은 왜 점심을 안 먹었냐구 하신다. 난 배가 아파서 안 먹었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 그런 것인데 왜 난 엄마를 속여야만 했던가.

생리적인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10년 전 화장실 한번 갈려면 줄을 서서 차례로 가야 하기 때문에 30분은 걸리기 때문이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는 내가 화장실을 제대로 갈 수 있을까?

시다를 못해서도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옷 한 벌에 단추를 14개씩이나 달아야했다. 그건 마도매사들이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시다들이 하니 오죽하겠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일을 일주일 하고 나니 정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몸을 가누며 일을 한게 한달이 되었다.

오늘은 월급날이다.
나에게 과연 얼마를 줄지 궁금하고 마음이 초조하다.

지금 생각하니 미싱사가 도급제다. 미싱사가 내 월급을 주었다.
2000원 차비 빼고 나면 그 무엇이 남았겠는가! 난 그거나마 집에 보태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기술자만 되면 서울에 빌딩은 모두 내 것이 될 것같은 꿈에 아픔과 배고픔, 설움을 참으며 일을 했다.

일을 끝내고 집에 갈 때면 제과점에 보이는 빵이 그렇게 먹고 싶다.
그러나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며 살아왔다.

말할 수 없는 꿈들이 너무 많았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지금의 나에겐 무엇이 변하였는가?

제과점 빵은 지금도 먹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무슨 꿈이 이루었졌겠는가!

될 것 같은 꿈은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흔히 말하기를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안되는게 없다고 한다.

노력하다 못해 10년이 되도록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뭔지 몰라도 잘못 된게 틀림없다.

변한 게 있다면 나에겐 직업병이란 병은 다 가지고 있다.
한 두가지도 아니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보상은 과연 그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가?



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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