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흥선대원군 평전’ 저자, “정치 혼란기에 절대 권력자 원하는 모습, 구한말과 닮았다”

이혜인 기자

외교사 관점서 ‘흥선대원군 평전’ 출간, 김종학 국립외교원 교수

“약육강식·전쟁…홉스가 말한 ‘자연상태’ 같은 구한말 현실”

“생명·질서 지켜줄 절대권력 희구했으나 대원군은 일그러진 리바이어던”

“지금 한국 사회가 구한말로 퇴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봐야”

<흥선대원군 평전>을 쓴 국립외교원의 김종학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고종의 길’에서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1896년 고종이 일제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피난길이다. 사진·김창길 기자

<흥선대원군 평전>을 쓴 국립외교원의 김종학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고종의 길’에서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1896년 고종이 일제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피난길이다. 사진·김창길 기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선시대에는 흥선대원군 말고도 또 다른 대원군들이 있었다. 선대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경우 종친 중에 왕위를 계승하는 자가 발생하고, 그 왕의 친아버지는 대원군 칭호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대원군 칭호를 받은 사람이 총 4명인데, 흥선대원군만 유일하게 살아 있을 때 대원군 칭호를 받았다.

흥선대원군 하면 쇄국정책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배척하고 타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배외정책을 고수했다. 고종 집권 초기 10년 동안 그가 섭정을 하며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 동안 병인박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거치며 배외정책은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고종 말기 그의 행보는 쇄국정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권력을 되찾기 위해 청나라(중국), 일본, 프랑스 등 외세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이들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영국 군함에 전령을 보내 자신은 비록 예전엔 배외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 문호개방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근 출간된 <흥선대원군 평전>(선인)은 “개화당은 대원군을 마음먹기에 따라 ‘개화를 막고 완고(頑固·성질이 완강하고 고루함. 여기서는 개화파와 반대되는 수구파를 의미)를 보호’할 수도, 훗날 ‘완고를 변해서 개화로 나아갈’ 수도 있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고 전한다.

흥선대원군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역사적 인물이나, 그간 그에 대해 연구한 대중적 평전은 많지 않았다. 국립외교원의 김종학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가 쓴 <흥선대원군 평전>이 지난해 말 출간됐다. 국사학자가 아닌 외교사 연구자의 관점에서 흥선대원군을 바라봤다. 김 교수는 “인물의 행적을 설명하고 일생을 평가하는 것보다 흥선대원군이라는 개인의 삶을 통해 구한말 사회를 이야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정동에서 그를 만났다.

<흥선대원군 평전>은 세 시기로 나눠 조선 말기 정세와 흥선대원군의 행보를 다룬다.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공고화한 1차 집정기(1863~1873), 조선 왕실이 문호를 개방하는 중에 대원군을 둘러싸고 여러 정치적 음모가 시작된 시기(1873~1893),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고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등 권위가 부재하고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1894~1895)다. 김 교수는 “그간 대원군의 통치에 대해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축적돼왔으나, 그 대부분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이뤄진 제1차 집정기에 초점을 맞췄다”며 “하지만 대원군은 하야한 뒤에도 20여년간 한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고, 이는 대부분 대원군이 주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정치세력이 그를 소환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흥선대원군은 조선 정치사의 최후의 국면에 등장한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이라고 했다.

[인터뷰]‘흥선대원군 평전’ 저자, “정치 혼란기에 절대 권력자 원하는 모습, 구한말과 닮았다”

“구한말의 현실은 토머스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국가가 타락하고 붕괴해버리면서 개인들은 적나라한 약육강식의 전쟁 상태에 놓였고, 자신의 생명과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줄 만한 절대권력자(리바이어던)를 염원했습니다. 조선인들에게 흥선대원군은 마지막 희망이었고 대원군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조선 왕조의 법과 전통에 따르면 대원군은 원천적으로 정치에 간여하는 게 불가능했다. 책은 흥선대원군이 “형식상 대왕대비 조씨와 고종이 하명하는 여러 구체적 사업의 총책임을 맡으며 그 지위를 기정사실화하는 방식으로 권위를 확립해 나갔다”고 설명한다. 1차 집정기 10년간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등 정책을 펼치는 한편 서구 열강의 침입에 단호하게 대처하며 통치를 정당화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 고종은 1880년대 들어 문호개방 정책을 본격 추진한다. 청의 권유와 조선의 재정난 등 내외부 요인이 맞물려 시작된 문호개방 흐름이었으나, 여론의 극심한 반발이 초래되면서 임오군란을 계기로 정국의 혼돈이 시작됐다. 김 교수는 “위정척사, 개화당 등 국내 세력을 비롯해 위안스카이(청), 일본 등 조선 사회에서 권력을 원한 거의 모든 정파가 정치적 입장을 떠나 흥선대원군을 희구(希求)했다”고 말했다. 대원군은 청에 납치됐다가 1885년 조선에 돌아와 사실상 가택연금에 놓인 상태에서도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 위안스카이 등 상대를 바꿔가며 정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포기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흥선대원군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디까지나 이씨 왕가의 소유로 보고, 권력을 잡아 유약한 고종이 아닌 맏손자 이준용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하는 것을 바랐다”며 “결단력과 추진력은 있었으나, 그에 걸맞은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입장은 부재한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인물에 대한 역사적 관심에 비해 그간 흥선대원군을 깊이 있게 다룬 평전이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 교수는 “국왕이 즉위했을 때 아버지가 살아 있던 경우는 흥선대원군이 유일했기 때문에, 조선 사회의 가장 큰 윤리적 가치인 충과 효가 충돌을 하는 경우였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대원군이 왕과 같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권력 행사에 관한 모든 기록은 고종이나 신정왕후 조씨의 명을 따라서 하는 것처럼 쓰여 있다. 이 때문에 <매천야록>이나 <근세조선정감>과 같은 야사나, 일본 잡지에 실린 전기인 ‘흥선대원군약전’을 통해 그의 행보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1880년대부터 조선이 문호 개방을 하면서 외국의 외교관들이 생산한 자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외교 문서 속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많이 참고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연구를 하면서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을 두고 펼쳐지는 구한말의 사회상과 지금의 한국 사회 현실이 너무나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김 교수는 “구한말은 기존의 정치 시스템이 상당 부분 와해되고, 정치적 권위에 대한 백성들의 합의가 사라지면서 모두가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 사회였다”며 “사람들은 나의 자연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가장 강한 권력과 권력자를 원했다”고 말했다. 지금의 한국 사회 역시 “정치적 사상과 입장은 부재했더라도 대원군같이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구한말과 조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 있다”며 “우리가 여태까지 쌓아온 것이 있는데 구한말로 퇴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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