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24)모든 것을 휩쓰는 바람…‘정중한 전쟁’은 있는가읽음

박주용 교수

역사, 그리고 현재를 사는 개인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를 묘사한 판화. 셸비 푸트는 “독립전쟁이 미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면, 남북전쟁은 미국의 실체를 만들어냈다”고 했을 정도로 남북전쟁은  현재 미국의 모든 면면을 결정지었다. 출처 | Library of Congress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를 묘사한 판화. 셸비 푸트는 “독립전쟁이 미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면, 남북전쟁은 미국의 실체를 만들어냈다”고 했을 정도로 남북전쟁은 현재 미국의 모든 면면을 결정지었다. 출처 | Library of Congress

동서 냉전의 시기, 서독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 저편…
한 나라를 어떻게 더 잘 알 수 있을까 본질적 질문으로 이어져

정체성과 정치·경제 체제 등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남북전쟁
당시 미국 인구 3000만명과 전사자 60만명의 삶이 모인 것

이순간에도 인류의 미래는 역사 속 개인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나의 주업은 문화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이지만 평소 외교·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전 세계를 묶어주는 거대한 이슈들을 생각하면 작은 나의 개인적인 영역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그러한 성향은 아주 개인적인 경험들을 통해 서서히 만들어졌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일반 사람들에게는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외국이란 곳은 작은 TV를 통해서만 가끔 볼 수 있는 생소한 관념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아버지 직장을 따라 독일(통일되기 이전의 ‘서독’)로 가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네 주민들이 우리 가게에 찾아와 두 번 다시 못 볼 것처럼 ‘이민 잘 가세요’라며 인사를 해주셨다.

독일에서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세계 각국 학생들이 모여있었고, 학교 중앙 홀 높은 벽 쪽에는 학생들의 국적기를 걸어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어느날 소련 깃발이 새로 걸려있는 걸 보았다. 이른바 ‘철의 장막(The Iron Curtain)’ 뒤에 자리 잡은 냉전의 한 축이던 소련에서 한 학생이 다른 곳도 아닌 자유진영 최전선인 서독에 왔다는 사실(2022년 현재, 소련의 부활을 원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러시아의 푸틴이 같은 시기에 동독에서 소련의 KGB 정보요원으로 주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동서독은 냉전의 한복판에 있었다)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한국에서 온 내게도 큰 충격과 놀라움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이라는 세계 구도는 이렇게 학교 벽에 붙은 깃발을 통해서도 일상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현재 독일 수도인 베를린은 냉전 당시 2차대전의 결과로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군이 주둔한 서베를린과 소련군이 주둔한 동베를린으로 나뉘어 있었다. 또한 도시 전체가 동독 안에 섬처럼 고립돼 있었기 때문에 서독에서 차로 방문을 하려면 동독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서베를린으로 가는 유일한 육로라는 사실을 이용해 동독은 서독에 모든 유지비를 떠넘기고 있었지만, 결국엔 공산 국가의 땅 위였기 때문에 우리 같은 한국인은 절대로 멈춰서 오해 사는 일이 없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몇 시간을 긴장 속에 달려가야 했다. 그렇게 가는 길에 갑자기 트라반트(서독과 동독의 기술 차이를 입증해주는 신세가 되고 사라진 동독제 자동차이다) 한 대가 우리 차 옆에 따라붙더니 그 운전자가 우리를 한참이나 응시하는 일이 있었는데, 경계심이나 적개심보다는 흔치 않은 동양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그런 눈이었다. 게다가 자기 차보다 더 좋은 서독제 세단을 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열 한 두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서너 시간 경험한 극도의 긴장 상태를 잊을 순 없었는지 서베를린에서 시내 구경을 시켜주던 택시 기사님이 “이곳이 바로 케네디 대통령이 ‘나도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연설을 한 곳”이라고 얘기해주었을 때 적에게 둘러싸인 서베를린 사람들에게 냉전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는 우방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외국 생활 경험은 20대 때 찾아왔다. 대학원생의 삶은 ‘학교→집→학교→집…’의 무한반복이라고 하는데, 갓 졸업을 한 어느날 집에 앉아있는데 ‘벌써 5년을 넘게 살아왔고, 앞으로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는 이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지 않은가?’하는 물음이 생겼다. 곧바로 ‘한 나라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알 수 있는가’라는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대답의 실마리가 되어준 것은 미국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흔히 접하게 되는 거대한 입간판 두 개였다. 보통 그러한 간판에는 지나가고 있는 마을의 자동차 딜러나 변호사가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마거릿 미첼의 남북전쟁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배경이 되는 ‘타라 농장’ 광고와,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는 다소 침울한 분위기의 광고가 떠올랐다.

“600,000 deaths. How is this a ‘civil’ war?”

즉, “전사자 60만명. 어떻게 이것이 ‘정중한’ 전쟁인가?”라는 뜻이었다. 남북전쟁을 미국에선 ‘내전’이라는 뜻의 “Civil War”라고 부르는데, civil이 ‘정중한’ ‘공손한’ 이런 뜻도 있으니 그렇게 서로 많이 죽여놓고 그런 말을 쓸 수 있느냐 하는 풍자였던 것이다.

구타와 학대를 당한 흑인노예. 출처  | 미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구타와 학대를 당한 흑인노예. 출처 | 미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내가 자랄 때 미국 남북전쟁에 대해서는 보통 두 갈래 길을 통해 들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낭만적이고 평온했던 남부가 전쟁을 통해 어떻게 폐허가 되었는지 그려져있는데, 배우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언 리가 주연을 맡은 1939년작 영화는 과거 명절이 되면 TV에서 자주 방영해주는 작품으로 우리 윗세대까지는 최고의 영화로 꼽혔다. 또 하나의 갈래는 역사 교과서에서 미국 영토 확장기에 새로운 영토에서의 노예제 실행을 두고 북부(반대)와 남부(찬성)가 갈등하다가, 남부가 미연방을 탈퇴한 다음 전쟁을 일으키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북부(연방)가 노예제를 철폐하고 승리하면서 끝나는 것으로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남북전쟁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남북전쟁이 미국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으며 아직도 사회 곳곳에 그 흔적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남북전쟁 전문가 셸비 푸트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이 미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면, 남북전쟁은 미국의 실체를 만들어냈다”고 했을 정도로 남북전쟁은 미국인의 정체성과 정치·경제 체제, 인종 문제, 지역별 차이 등 지금 미국의 모든 면면을 결정지었다. 비록 1865년 종료된 남북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전쟁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의 산업화·민주화, 그리고 지금의 모습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소설 한 권과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남북전쟁 이야기만으로 미국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북전쟁기에 실제 사람들이 어떤 길을 겪고 인생이 바뀌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잘 알려주는 대표적인 콘텐츠로는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한 켄 번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남북전쟁(The Civil War)>이 있다. 여기에는 역사책에 등장하는 링컨 대통령뿐만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죄악’ 노예제 아래서 학대와 구타를 당한 이름 모를 흑인들, 노예제 폐지를 외치던 깨어있는 지식인들과 그중에서도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노예제 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 전쟁을 지휘하던 장수들, 전장에서 스러져가던 병사들, 남북전쟁하의 일상을 적은 일기를 남긴 한 정치인의 부인, 그리고 수십년이 지나 백발이 성성한 채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인 참전 군인들 모습이 하나하나 그려져있다. 이것을 보고 남북전쟁이라는 역사는 어떤 하나의 대표적 인물이 아니라 당시 미국의 인구 3000만명, 그리고 전사자 60만명 개인의 삶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고, 지금의 모든 역사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라의 명운이 걸려있는 거대한 전쟁 한가운데서 싸우는 한 개인은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나타나있는 미 북부군의 설리번 벌루 소령이 출정을 하루 앞두고 집에서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 아내 사라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 싶다.

이 편지를 쓴 며칠 뒤 벌루 소령은 전사하였고, 편지는 아내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의 미래는 이러한 역사 속 개인의 이야기들 위에 만들어지고 있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 소속이었던 설리번 벌루 소령.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 소속이었던 설리번 벌루 소령. 출처 | 위키피디아


사랑하는 아내에게.

며칠 안에, 빠르면 내일이라도 전장에 갈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당신에게 다시는 편지를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몇 줄을 적어 보냅니다.

내일의 출정길이 편안할 수도 있고, 어려운 싸움과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신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쓰러져야 하는 운명이라면 나는 준비가 돼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하는 대의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없고, 나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문명의 생사는 우리 측의 승리에 달려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선조들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내 현생의 모든 즐거움을 내려놓을 각오가 돼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즐거움을 내려놓게 된다면 당신의 즐거움도 사라질 것이고, 고아였던 내가 겪어봐 아는 슬픔을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주게 된다는 걱정이 나라에 대한 나의 사랑과 부딪히고 있는 것이 나 스스로를 약해보이게 하거나 불명예스러운 일은 아닐지도 자문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는 2000명의 전우들 사이에서 나에게도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며 신, 조국, 그리고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라,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당신과 나를 묶어주는 사랑의 끈은 전지전능한 신만이 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국에 대한 나의 사랑이 센 바람처럼 나를 전장으로 이끌고 있고, 당신과 함께 보낸 황홀한 순간들에 대해 당신과 신에게 감사합니다. 신이 그리 뜻하신다면 계속 당신과 함께 살며 사랑하고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지만, 그것이 재가 되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롭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잘못과 나로 인한 고통을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당신과 아이들을 지켜줄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불행을 내가 다 짊어질 각오가 돼있지만, 영혼이 되어 당신이 홀로 세상의 풍파를 겪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가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할 순간까지 슬픔을 참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라,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 주변을 맴돌 수 있다면 화창한 날과 어두운 밤을 가리지 않고 당신이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뺨에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은 나의 숨결일 것이요, 당신의 고동치는 이마를 식혀주는 서늘한 공기는 나의 영혼이 당신을 스쳐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사라,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시오. 내가 잠시 떠났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려준다면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테니까. 오 사라, 그곳에서 기다리겠소. 나에게 와주시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설리번 벌루.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24)모든 것을 휩쓰는 바람…‘정중한 전쟁’은 있는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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