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관련해서 한가지 기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 후보들이 청와대 이전을 공약했다는 겁니다. 물론 막상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경호와 비용, 국회승인 문제 등 때문에 공약을 이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 윤석열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는 계획을 공식발표했는데요.
이렇듯 청와대가 오히려 주인들에게 기피 혹은 혐오시설로 꼽힌 이유가 무엇일까요.
청와대가 불통의 상징으로 지목되었는데요. 그러나 저변에 깔려있는 숨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죠. 언젠가부터 풍수지리상 청와대의 입지가 좋지않다는 이야기가 계속 떠돌았죠.
■기피 혐오시설이 된 청와대
대체 청와대가 어떻기에 이런 기피 및 혐오시설로 찍혔을까요.
일부 풍수가들의 주장이 흥미롭습니다. 풍수상으로 볼 때 청와대·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은 규모는 작은 데도 독불장군형이라는 겁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보잘 것 없는데(해발 342m) 딱 버티고 있는 꼴이 거만하기 이를데 없는 고집불통 같다는 겁니다.
청와대 주인들이 바로 그 북악산을 닮았다는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북악산은 사람이 청와대를 외면하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주산인 어머니(북악산)로부터 버림받은 땅이니 결코 명당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북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곳(자하문 고개)이 끊겨있습니다. 저승에서 부는 이른바 황천풍을 받는 곳이라는 겁니다. 이밖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청와대·경복궁을 보면 북악산 너머로 삼각산 보현봉이 보입니다. 몰래 엿보면서 청와대와 경복궁의 기운을 빼앗아가니 불길하다는 거죠.
더욱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왔죠. 청와대터가 정궁인 경복궁의 내맥이 내려오는 길목이라는 겁니다.
북악산-경복궁-광화문 라인은 백두산의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의 목과 머리에 해당된다는거죠. 그런데 일제는 용의 입에 해당하는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총독 집무실(구 국립박물관)을 조성했고, 목에 해당되는 회맹단터에 총독관저(청와대)를 지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른 결과가 어땠을까요.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거죠.
1926년 집무실을 지은 3·5대(1919~1927, 1929~1931)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1936년 2·26사건으로 비참하게 피살됩니다. 1937~39년 사이 지금의 청와대 터에 관사를 지은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1936~1942)는 2차대전 후 전범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다른 총독들도 비슷한 말로를 겪습니다.
해방 이후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들의 뒷끝도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럼 모든 책임은 주인 탓이 아니라 풍수탓이겠네요. 정치를 잘못한 것도, 말년이 불행해진 것도…. 과연 그럴까요.
■천하제일복지였던 청와대터
1990년 청와대 경내의 북악산 기슭 암벽에서 명문표석이 발견됐는데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해서, 이곳이 천하제일의 명당이라는 것을 알리는 6글자였습니다. 당시 금석학의 권위자인 임창순(1914~1999)은 “글씨는 300~400년 전 중국 청나라 시대의 서체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청와대터가 풍수상 ‘흉지’라고 해놓고 ‘천하제일복지’라는 명문바위는 또 뭡니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가 실은 고려 때부터 풍수적으로 길지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말여초야 말로 산천의 기운이 사람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이 각광을 받았던 때였죠.
1067년(문종 21) 서울은 3경의 하나인 남경으로 발돋음했습니다. 1101년(숙종 6) 삼각산 면악(북악산)의 남쪽 땅을 궁궐로 조성했구요. 1104년(숙종 9)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했습니다.
이후 예종(1105~1022)과 인종(1122~1146), 의종(1146~1170) 등의 어가가 남경을 오갔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천도하지는 않았는데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1096년(숙종 원년) 술사 김위제가 올린 상소문을 볼까요.
김위제는 “임금이 해마다 중경(개경)과 서경(평양), 그리고 남경(서울)에서 4개월씩 머물면 36국이 조회한다”면서 “개국한 뒤 160년 후에 목멱양(남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1년에 4개월 동안 머무르시면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주장합니다.
숙종은 김위제 등의 말에 따라 남경을 건설한 뒤 완전 천도하지 않고 ‘순주(巡駐)하는 도읍’으로 여겼습니다.
몽골의 침략에 고초를 겪던 고종(1213~1259)은 “남경에 궁궐을 짓고 거처하면 나라의 운세가 800년까지 연장될 것”이라는 승려의 말을 믿고 남경의 가궐(임시궁궐)에 왕의 옷과 허리띠를 봉안했답니다.
고려말 공민왕(1351~1374)과 우왕(1374~1388), 공양왕(1389~1392) 등은 남경 천도를 계획했거나 실제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천도가 어디 쉽습니까.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거나(공민왕) 준비부족 등(우왕·공양왕)으로 좌절되고 말죠.
■측근들의 충성맹세장으로 전락한 청와대터
그럼 남경의 궁궐터가 바로 지금의 청와대 부근이라는 증거가 있는 건가요.
<고려사>는 ‘삼각산 면악(북악산)의 남쪽 땅을 궁궐터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태조실록>도 “전조(고려) 숙종 때 경영했던 궁궐의 옛터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궁궐터(경복궁)를 정한다”(1394년 9월9일)라 했습니다.
남경의 궁궐, 즉 청와대터는 풍수지리가 유행하던 나말여초부터 조선 개국초까지는 명문바위의 글귀대로 ‘천하제일복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던 청와대터가 언제부터 흉지로 변한 것일까요.
앞서 인용한 <태조실록>을 보면 조선 개국과 함께 지금의 청와대 터(남경 궁궐터)는 정궁인 경복궁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청와대 터엔 회맹단이 설치됐습니다. 회맹단은 경복궁의 북문(신무문) 너머, 즉 지금의 청와대 본관 자리에 해당됩니다. 회맹은 임금이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들을 모아(會) 충성맹세(盟)를 받는 의식입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은 여러차례 공신회맹을 통해 충성서약을 받았는데요. 개국공신(1392)은 물론 1·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정사공신(1398)과 좌명공신(1401)들이 5차례나 모여 충성을 다짐했죠. 1417년(태종 17) 4월 7일 회맹단(청와대터)에서 거행한 회맹은 특별했는데요. 개국·정사·좌명공신은 물론 그들의 적장자(아들)까지 총출동하여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이들은 “만약 맹세를 바꾼다면 그 죄는 본인 뿐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맹약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계유정난(1453년) 등을 통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1455~1468)도 3차례나 충성맹세를 받았고요.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중종(1506~1544)과 인조(1623~1649) 역시 공신들의 충성서약을 받았습니다.
전란(임진왜란)의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할 선조(1567~1604)는 호성공신, 선무공신, 청난공신 등을 총출동시켜 회맹의식을 치렀습니다. 3차례에 걸친 친위쿠데타(환국)로 왕권을 휘두른 숙종(1674~1720)도 역대 공신은 물론 후손까지 총 489명을 참석시켜 충성맹세를 받았습니다. 남은 충성까지 탈탈 털라는 거였죠. 그곳이 바로 회맹단터, 즉 지금의 청와대 터였던 겁니다.
군주와 그 군주 한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국정을 농단하는 곳이 된겁니다. 천하제일복지라는 이름이 무색해진 거죠.
■용산은 천하의 길지다?
저는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긴다고 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았는데요.
풍수와 관련해서 아주 흥미로운 자료가 보이더군요. 풍수학자의 책(지종학의 <풍수지리>, 프로방스, 2015)인데요. 용산이 풍수상 엄청난 길지라는 견해를 피력했더라구요. 즉 주산인 남산(해발 271m)이 용산(해발 79m)을 병풍처럼 둘러주고, 남산에서 둔지산(해발 65m, 48m)까지 용맥이 훌륭하며, 남산에서 시작된 능선이 크게 좌청룡·우백호를 형성하고, 한강~관악산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관을 이룬다는 겁니다. 또 지세가 넓고 평탄하며 한강물이 풍부하다는 겁니다. 북악산이 외면했고, 산의 계곡에 있어 맥이 없으며, 좌청룡(낙산)은 허약하고, 우백호(인왕산)은 끊어졌으며, 물줄기가 원활하지 않은 청와대와는 비교가 안된다는 겁니다.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는 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이므로 이 참에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더라구요. 그러나 용산이 어디입니까. 13세기부터 몽골 침략군이 이곳을 병참기지로 삼았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주둔해서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벌이기도 했구요. 임오군란(1882) 때는 청나라군이 주둔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청군지휘소(용산 캠프 코이너)를 방문했다가 청나라로 납치되기도 했습니다. 청일전쟁(1894~1895) 때는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했습니다. 이 군대가 고종이 있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내세워 내정개혁을 강요했습니다. 용산 주둔 일본군은 이후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했습니다.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본격적인 한국의 무단통치를 위한 군사기지 설치를 하려고 용산땅을 수용했습니다.
한일의정서(1905년)를 내세워 부지 300만평을 헐값(평당 2전꼴)에 강제수용했고, 그중 117만평을 군용지로 사용했죠. 결국 한국을 강제병합한 일제는 조선주둔사령부를 설치하고 2만명의 병력을 주둔시켰습니다. 1910년 건립된 용산 대통령 관저는 초호화판으로 ‘용산아방궁’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는데요. 1930년대 말 청와대 자리에 총독관저가 신설되면서 용산관저는 귀빈들의 연회장으로 흥청망청했다네요. 이후 용산은 만주 대륙 침략의 기지가 됐고, 이 기지가 해방 후 미군의 관할구역으로 포함됩니다.
이렇게 용산은 예부터 한반도를 침략한 외국 군대의 주둔지였고, 그것이 미군기지로 이어진 겁니다.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풍수학의 관점에서 용산이 청와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길지라는 견해도 소개했는데요.저는 1101년(고려 숙종 6) 10월 8일 남경의 지세를 조사한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1036~1115)의 보고를 소개합니다.
“신 등이 (남경의) 노원역, 해촌(도봉산 아래), 그리고 용산 등의 산수를 살펴보았는데 도읍을 세우기에는 적당치 않고 오직 삼각산의 면악 남쪽이 산 모양과 물의 형세가…부합합니다. 그곳에 도읍을 건설하시기를….”
풍수사상이 극성을 이뤘던 고려 시대에는 용산이 길지가 아니라고 했네요.
■명당은 당신 마음 속에…
풍수가들조차 “풍수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역경> ‘문언전’을 볼까요.
“착한 일을 한 집안에는 경사가 찾아오고 그렇지못한 집엔 재앙이 찾아온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풍수의 덕목은 사람의 적덕(積德)이라는 겁니다. 땅은 그저 무대인데, 무대가 아무리 좋아도 배우가 엉망이면 좋은 연극이 나오겠습니까. 생각해보면 똑같은 궁궐에서 태어났어도 어떤 군주는 성군이 되고, 어떤 군주는 폭군이 됐잖습니까.
단적인 예로 경복궁에 머물렀던 세종대왕이 성군의 정치를 펼쳤잖습니까. 반면 노태우 대통령 시절 구 청와대 자리에서 굳이 집무실을 옮기고 관저를 따로 조성했죠. 그러나 결과가 지독한 불통으로 이어졌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서쪽으로 기(氣)가 빠져나간다면서 청와대 현관을 서향에서 남향으로 바꿨지만 그의 말로는 ‘백담사행’이었죠. 결국 풍수를 문제삼든, 혹은 소통을 문제삼든 결국은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겁니다.
풍수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한마디가 떠오르네요. “명당은 찾아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 할 대상입니다. 명당은 당신 마음 속에 있습니다.”
윤석열 당선인이 청와대 이전을 강행한다면 청와대는 권위와 불통의 상징이자 제왕적 대통령제의 이미지를 안고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생겼네요. 그래서 제가 영영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될 청와대를 위한 변명 한마디를 해보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주인이 청와대에 머물면서 정치를 잘해서 청와대의 명예를 회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참고자료>
지종학, <풍수지리>, 프로방스, 2015
지종학, ‘경복궁 청와대 입지의 비판적 분석과 대안 모색에 대한 연구-풍수이론을 중심으로’, 광운대 석사논문, 2009
최창조,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 민음사, 2009
최창조, <풍수잡설>, 모멘토, 2005
최창조, <사람의 지리학>, 서해문집, 2011
최세창, <청와대 풍수논쟁>, 돋을새김, 2007
청와대경호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2019